— 6화
황제는 크게 관심이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또 제 하고 싶은 이야기로 넘어갔다.
“눈치는 빨라서 다행이군. 그런데 궁금한 게 있단 말이지.”
“하문하십시오.”
“내 병은, 그 누구도 낫게 하지 못했다. 난 알약이 듣지 않거든. 치 료사들도 다 고개를 저었다. 그 잘 난 마법 왕국이라는 골디나에도 은 밀히 수소문해 보려 몇 번 사람을 보냈지만, 마땅한 수를 찾을 수 없 었다. 그런데 어떻게 너 같은 노예 가……?”
짐작은 했지만, 역시……,
생각해 보면 나같이 마력을 무효 화할 수 있는 인간이 달리 또 있을 리 없었다.
그는 알약이 듣지 않는 특이 체 질이기 때문에 나 같은 사람이 필요 한 거지, 평범한 경우를 생각하면 내 능력은 사실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오죽 쓸데가 없었으면 거리에 서 문신이나 지우고 있었겠느냔 말 이다.
누구도 이렇게 쓸모없는 능력을 익히기 위해 죽음을 감수해서까지 몸에 마법진을 새기는 그런 무모한
일을 하지는 않으리라. 마법을 배울 정도로 머리가 좋은 지식인이라면 더욱더.
나도 머리가 좋기는 하지만, 정보 에 접근하는 게 워낙 제한적인 가난 한 인생이었고…… 그 마법진을 몸 에 새길 때는 아직 제정신이 들기 전의 철없을 때라서 그게 얼마나 많 은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는 짓인지 도 몰랐다.
지금 다시 하라고 하면 죽어도 안 하겠지.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 었는지 말로 다 할 수 없다.
난 쓰게 웃었다.
“궁금하십니까? 어떻게 제가 치료 할 수 있었는지.”
황제는 붉은 눈을 가늘게 접었다.
이제 알겠다. 저 얼굴, 기분이 나 쁘다는 거다. 웃는 게 아니라.
하지만 내게 지금 무엇보다도 중 요한 건 동생이었다. 이 황제를 그 냥 내버려 뒀다간 언제 데려올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지금 내게 대답을 흥정하는 건 가?”
저 눈에다 대고 그렇다고 말하자 니 심장이 다 떨렸다. 살인, 해 봤 겠지……?
하지만 난 태연을 가장했다. 뒷골 목 상인들이 말하길, 흥정할 때는 뻔뻔한 사람이 이기는 법이라고 했 다.
“그렇습니다. 궁금하시면 제 동생 을 먼저 데려와 주십시오.”
기가 막히다는 듯 황제가 입술을 비틀며 조소했다.
“바뀐 것은 외양의 태도뿐이군. 말투가 고와져서 폐하, 폐하, 하기로 서니 내 앞으로 뛰어들던 강단이 어 딜 갈 리 없지.”
“약속한 것이니 언제든 치료는 돕 겠습니다. 그리고 그 비화 또한 듣
기 좋은 이야기는 아닙니다.”
황제는 비딱하게 날 바라봤다. 굳 이 내 몸을 훑어보는 게 아니었는데 도, 괜히 내 행색을 확인하게 되었 다.
그제야 난 내가 입고 있는 옷이 고작 로브 하나라는 것을 자각했다. 골목길에서 자랄 때는 거의 훌렁 벗 고 다니든 말든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고, 여자라고 해도 속옷을 꼭 갖춰 입지 않아도 아무렇지 않았는 데……스
하지만 황제는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는 듯 어깨를 으쓱하고 말했 다.
“좋다, 네 말대로 약속한 것이니 까. 그 동생의 이름과 주소를 적어 시종장에게 넘겨라. 그가 알아서 할 것이다.”
고작 노예의 일을 시종장에게 맡 기라니. 하지만 나는 기꺼이 고개를 숙였다. 타국까지 넘어가서 뒷골목 에서 사람을 찾는 일은 내게는 하염 없이 불가능해 보였지만, 이 황제에 게는 별일도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는 할 말을 다 했는지 갑자기 상의를 훌훌 벗었다. 나는 남자가 상의를 벗는 것 따위 하루 종일 보 고 자란 몸이다. 그런 것에 놀라지 는 않았지만, 보기 좋게 꽉 짜인 몸
에 넓게 퍼져 있는 화상 자국에는 경악했다. 등이 온통 울긋불긋했고, 어깨를 지나 가슴께까지 그 자국이 번져 있었다.
그제야 왜 그가 내내 표정이 안 좋았는지 알 것 같다.
손등뿐만이 아니었다. 어쩐지 이 질적인 뭔가가 느껴졌다 했다.
“……이 정도면 밤잠도 못 이루셨 겠는데요.”
굉장히 고통스러울 텐데 그는 태 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이 황제, 이렇게 얼마나 오랜 세월을 살아온 건가.
이렇게 될 바에야 마법을 쓰지도, 익히지도 않는 게 당연한 거 아닌 가? 이 사람은 대체……소
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등에 손을 댔다. 그냥 살짝 닿았을 뿐인데도 고통스러운지 작은 신음이 들렸다.
난 새빨갛게 변해 버린 등 피부 를 이곳저곳 만져 보았다. 절로 한 숨이 나왔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 었다.
세렉의 경우는 나 같은 유능한 호구가 바로 옆에 붙어 있었기 때문 에, 하나의 트러블이 생기면 하나를
치료하는 식으로 바로바로 대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황제님은 도 대체 어떤 인생을 살아오신 건지 이 마법, 저 마법의 부효과가 온몸에 누적되어 있었다.
노예 주제에 함부로 입을 나불거 리긴 좀 뭐해서 나는 최대한 격을 갖추어 말씀을 올렸다.
“이러다가 고인이 되십니다.”
패왕은 어이가 없는지 대꾸도 안 했다. 표정을 안 봐도 알 것 같다. 기가 차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있겠지.
“치료를 할 수 있다고 장담했던
건 너다. 이제 와서 어렵다고 말하 거나 헛수작을 부릴 생각이라면
“그런 것이 아니오라, 자세히 살 펴보니 내장까지 다 상한 지경이라 서 그래요. 아니, 도대체…… 어휴. 일단 가장 최근 것부터 역순으로 지 우는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알 약도 효과가 없으시다면서 무슨 마 법을 이렇게 쓰신……,”
투덜거리는 중에 황제가 왼손을 들어 올렸고, 난 내가 너무 막말을 했나 싶어 내 입을 틀어막았다. 하 지만 다행히도 황제는 내 목을 따는 대신 제 몸의 울긋불긋한 상처 중
하나를 가리켰다. 오른쪽 어깨 위였 다.
“아마 여기겠지. 최근에 소규모 반란을 진압할 때 생긴 상처다.”
“어떤 마법이었습니까?”
“그런데 꼭 만져야 치료가 되나?”
대화가 꼭 이렇다. 질문에 질문으 로 답하고.
하여튼, 제 할 말만 중요하지. 뭘 했는지 알아야 치료가 쉽지, 이 고 집불통아.
하지만 힘없는 내가 뭘 어쩌겠는 가. 얌전히 대답해야지, 뭐.
“네, 꼭 만져야 됩니다.”
“접촉을 매개로 한다……오 흠, 재 밌군.”
어깨에 손을 올리자, 탈 듯이 뜨 겁게 느껴졌다. 단단한 어깨 근육이 퍽 보기 좋게 자리 잡고 있는데, 이 런 상처투성이여서야 그동안 여자도 제대로 못 만났을지도.
도대체 무슨 마법이길래 이렇게 미로를 빠져나가는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다. 거기에 붙어 있는 술식을 후다닥 거꾸로 읊으며 정신을 집중 했다. 어깨 위에 손을 올리고 살살 문지르자, 상처가 희미해지는 게 보
였다.
어깨의 상처가 꽤 옅어졌다 싶자, 그는 길게 한숨을 토했다.
“이제 좀 살 만하시죠?”
그는 어깨를 만지작거렸다. 그 바 람에 아직 그의 상처를 돌보고 있는 내 손도 같이 만지작거렸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하긴, 그 것도 그렇겠지. 따지고 보면 그는 치료 서비스를 샀는데, 그 서비스가 마침 사람 모양인 것뿐이니까.
“……정말 괜찮아지는군. 진통제 로도 누그러지지 않던 고통인데.”
감탄은 또 솔직하게 하는 게 이
황제님의 신기한 면모다. 뭔가, 이렇 게 대단한 사람에게 도움이 된다는 게 좀 신이 나긴 한다.
“등에 있는 것들을 한꺼번에 지워 버리고 싶긴 합니다만, 생각하시는 것보다…… 서로에게 좀 부담이 되 는 일입니다. 이렇게 할 일이 많을 줄은 몰랐습니다.”
“흐”
으
“대신 오늘 밤은 편히 주무실 수 있도록 해 드리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되지? 접촉을 매개 로 한다면, 안고 자면 되나?”
대체 이 황제는 무슨 소리를 하
는 거람.
진짜 골디나 뒷거리의 미친 아저 씨들처럼 음탕한 농담을 하려고 한 거면, 목숨을 보존할 수 있는 선을 봐 가면서 짜증을 냈을 거다.
하지만 이 황제는 좀 가엾은 구 석이 있었다. 고통을 덜기 위해 제 소유물을 제 소유의 다른 방에서 다 른 형태로 놓고 자겠다는데 누가 뭐 라고 할 것도 아니고.
게다가 생각해 보면 또 전혀 효 과가 없을 것 같진 않기도 하다. 난 살아 있는 마법진이나 다름없다. 내 가 의식이 들어 있지 않아도 어느 정도 효과는 있을 거다.
난 멍하니 생각하다가 내 볼을 꼬집었다.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된 다. 헛소리를 지껄였다간 포근한 짚 침대에서 혼자 잠드는 행복을 포기 해야 할지도 모른다.
얼른 화제를 돌렸다.
“전체적으로 한번 보살펴 드리겠 습니다. 내장에도 경미하게나마 영 향이 있어서…… 일단은 급한 불을 끄는 것만 해 드리는 거니, 내일도 일과를 모두 소화하시고 나면 제게 오…… 저를 불러 주십시오.”
“ 좋다.”
“무슨 마법인지 알면 좀 더 수월
해질 텐데 말입니다.”
“집요하게 묻는군.”
“……죄송합니다.”
“아니다. 생각한 것보다 유능한 것 같은데, 최근 산 것 중 가장 잘 한 구매 같아서 흡족하군.”
황제의 장바구니에 들어간 물품 중 제일 좋은 거였다니. 나 말고 다 른 것들은 엄청나게 비쌌을 테니 까…… 이건 어마어마한 칭찬일 텐 데, 어째 욕처럼 들렸다.
아아, 자유민이던 시절이 그립다.
황제의 등을 전부 돌보는 데는 20분 남짓이 걸렸다. 겉으로 보기에
는 그렇게 큰 차도가 없지만, 황제 가 느끼기에는 훨씬 나아졌을 거다.
등의 가장 아래, 꼬리뼈 근처까지 손바닥으로 살살 쓸어내린 뒤, 나는 물러났다. 몸도, 뇌도 녹초가 되어서 더 이상은 못 하겠다.
황제는 들은 체 만 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깨를 돌려 보기도 하고, 크게 숨을 들이셔 보기도 하더니 내 게로 돌아섰다.
“지금은 가뿐해졌다. 이 기세로 매일 진료하면 언제 완치가 되겠는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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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완치라는 게, 폐하께서
마력을 안 쓰시면 될 것 같습니다 만……;
황제는 한숨을 쉬었다.
“전혀 안 쓰는 건 불가능하다.”
“어째서입니까?”
“정말 제국 사정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군.”
“제가 뭘 어떻게 알겠습니까. 노 예로 팔려 가다가 정신을 차려 보니 여긴데.”
“그것도 그렇긴 하군. 오늘은 이 만 가 보도록 하지.”
아무리 나도 눈치 봐 가면서 받
아 줄 만하니까 떠들고 있는 거라곤 하지만, 내가 꽤 따박따박 말대꾸를 하고 있는 것치고 패왕은 별 대수롭 지 않은 눈치였다. 황제쯤 되면 이 렇게까지 그릇이 넓어지는 건지
그는 왔을 때처럼 스스로 문을 열고 나갔고, 호위병들이 그의 곁에 바로 달라붙었다.
혼자 남은 나는 많이 지친 상태 라 쓰러지듯 침대에 누웠다. 하지만 어쩐지 쉬이 잠들 수 없었다. 내일 은 시종장님께 동생의 주소를 알려 드리고, 그리고……오
손끝에 닿았던, 델 듯한 상처의
뜨거움이 계속 느껴지는 것 같았다. 대체 남 부러울 것 없이, 젊은 나이 에 누구도 호령할 수 있는 대륙 제 일의 지위에 올라 있는 저 패왕은 어떤 삶을 살고 있는 걸까.
노예 주제에 말도 안 되는 소리 였지만,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그 런 것들을 가리기 위해 긴팔을 입는 것 같아 그가 가엾게 느껴졌다.
아아, 도무지 잠이 안 온다. 정말 로 잠이 안 온다.
하지만 잠이 안 온다는 생각을 열 번째 반복할 때쯤, 피곤에 전 내 몸은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