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화
“농담하시는 건 아니죠? 제발 농 담이라고 해 주세요.”
“너 이렇게 어리바리하게 굴다가 나까지 큰일 나게 생겼네. 으휴, 어 쩌다 이런 애를 주워 오셔서.”
동생이 기거할 셋방에 대해 상담 하려던 계획 같은 것은 이제 머릿속 에서 모두 날아가 버렸다.
나는 회랑이 주욱 이어진 황성 건물을 다시 한번 둘러보았다. 장식 이 화려한 골디나의 건물들에 비해, 수직으로 깎아지른 듯한 각이 뚜렷 한 건물은 보는 사람을 위압했다.
이제야 모든 게 이해됐다. 내가
살던 그 위대한 마법 왕국 골디나 는, 그 패왕님께서 마음만 먹으면 지도에서 사라질 곳이었다.
여긴, 내 주인 작자는 황성에 잠 깐 들르기 위해 온 것이 아니었다. 내 주인은 전 세계에서 가장 번영하 고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진 제국의 단 하나뿐인 지배자였다.
졸도하겠네.
마음이 하나도 진정되지 않은 와 중에도, 시녀가 황성 예절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강론하는 것들을 모두 귀담아들었다.
복도를 걸을 때는 오른쪽 벽에
바짝 붙어 걸을 것, 귀족들과 마주 치면 치마를 쥐고 인사를 올리고 눈 을 마주치지 않을 것, 폐하를 마주 칠 때는 언제나 웃는 낯으로 대할 것. 먼저 허락하시기 전엔 폐하보다 머리를 높은 곳에 두지 않을 것. 폐 하께는 비가 없으시니, 황성 내의 가장 큰 어른은 황태후시라는 것.
이런 것들은 들어 둬서 손해 볼 것은 없을뿐더러, 한번 알려 줄 때 잽싸게 익혀야 한다는 생각으로 처 음에는 귀 기울여 들었다. 하지만 들어도 들어도 규칙의 나열은 끝나 지 않았다. 종래에는 건물의 구조와 식솔들의 이름까지 한꺼번에 설명하
면서, 누구에겐 어떻게 대해야 한다 는 이야기까지 주르륵 늘어놓고 있 었다.
나는 머리가 비상하게 좋았다. 난 그녀 - 세레나가 말한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기억했다. 하지만 보 통 이렇게까지 많은 규칙을 한 번에 외울 리가 없다.
세레나라는 이름의 이 시녀는 지 금 심술을 부리고 있는 게 틀림없었 다.
왜? 고작 노예를 상대로?
이 건물에 내 아군이라곤 아무도 없다. 이 시녀가 아무리 날 미워한
다고 해도, 성심성의껏 이 아가씨를 설득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다행히도, 오랜 시간 뒷골 목에서 서비스직에 종사해 온 나는 가벼운 환심을 사는 법이라면 잘 알 고 있었다.
상대를 관찰하고, 가장 듣고 싶은 말을 해 주면 된다. 이 시녀는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가 아주 정갈했고 나름대로 멋도 부리고 있었다. 골디 나와는 머리 스타일 같은 게 달랐지 만, 유행하는 머리 모양을 하고 있 다는 것이나, 손톱과 눈썹 등 손질 이 잘되어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 다. 그리고 폐하에 대해 설명할 때
마다 아주 조심스럽게 굴었다.
‘황실에 일하는 사람이 어떻게 보 여야 하는가’를 신경 쓰는 사람인 거다. 일을 좋아하는 거지, 나쁜 사 람은 아니다. 오히려 좋은 사람이다. 성실한 이런 사람은 마음을 잘 열지 않지만, 한번 마음을 열면 한없이 잘해 주곤 한다.
그렇기에 그 잘난 폐하가 길 가 다가 이런 노예 따위를 충동구매한 게 마음에 안 드는 거다.
무슨 기분인지는 알 것 같다. 하 지만 나인들 갑자기 노예로 팔려 와 서 ‘구매 가능한 물품’이 되고 싶지 않았다고!
세레나의 말이 끊긴 틈을 타 나 는 방긋 웃으며 그녀를 불렀다.
“저기, 세레나 님.”
“왜 그래? 내가 한꺼번에 너무 많이 말했나?”
“……아뇨. 그런 게 아니라, 그렇 게 잘 알고 계시는 게 너무 멋지고 감탄스러워서요. 세레나 님은 정말 이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계신 것 같아요.”
그녀는 뭘 그렇게 당연한 말을 하냐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여기에서 일하는 누구 라도 자부심을 가지고 일해.”
“저…… 아까 제가 수도 이름도 모른다고 해서, 기분이 상하셨을 것 같아요. 전, 골디나에서 왔거든요. 그래서 잘 몰라서 아깐 그랬던 거예 요. 저도 이곳을 멋진 곳이라고 생 각하고 있고, 폐하께서도 좋은 분이 라고 생각해요. 누가 되지 않도록 할게요.”
세레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네가 도대체 어떻게 누가 되지 않겠다는 거야? 폐하께서 오늘은 쉬 게 하라고 하셨으니 그냥 두겠지만, 내일부턴 당장 일을 해야 해.”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니
까, 일하는 것엔 크게 불만이 없었 다.
“여긴 어릴 때부터 교육받은 시녀 들만 들어오는 곳이라고. 갑자기 들 어온 노예…… 하, 아무튼 갑자기 들어온 신참을 며칠이나 붙들고 교 육할 시간은 없는데…… 이게 다 무 슨 일인지 모르겠어. 폐하께서 전엔 이렇게 변덕을 부리신 적이 없었는 데.”
“제가 처음이에요?”
“노예를 사는 게 그렇게 자주 있 는 일일 것 같아?”
그녀가 뾰족하게 물었다.
“그리고 내가 설명한 것들을 하나 도 기억하지 못했을 것 아니니? 쓸 데없는 얘기 할 시간이 있으면
“다 기억해요.”
“ 뭐?”
“다 기억하고 있다고요.”
“하, 말도 안 돼……오 궁내부 장 관의 성함과 있는 곳, 말해 봐.”
“대대로 제헤라 백작이 맡은 지위 죠? 황궁의 관리들을 총지휘하시고 요. 3층 중앙 계단에서 오른쪽으로 두 번째 방에 계시고, 보라색 배지 를 달고 계신 걸로 알아 뵐 수 있
고요.”
세레나는 깜짝 놀랐는지 눈을 동 그랗게 떴다.
뭘 이런 걸로. 솔직히 세렉의 공 부를 도와줄 때의 그 어려운 것들에 비하면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다. 아마 그 멍청이는 지금도 아무것도 모르고 제가 왜 마법을 쓸 수 있는 줄도 모를 거다. 결국 내가 다 공부 해서 가르쳤으니까.
“ 의상부장님은?”
“황궁의 재정을 담당하시는 분이 고, 회계관들을 관리하시고요. 5층 오른쪽 계단으로 올라가면 바로 있
는 방에 계시고, 아홉 개의 보석이 그려진 배지를 달고 계신 걸로 알아 뵐 수 있지요.”
아까까지 퍽 불만스러워 보이던 세레나의 얼굴이 한결 부드러워졌 다. 그녀는 내가 미운 게 아니라, 자격 없는 사람이 제가 자랑스러워 하는 직장에 함부로 들어온 게 싫은 거였으니까. 내가 성심성의껏 한다 면 그녀도 차츰 마음을 열어 줄 것 이다.
“……너 정말 그걸 한 번 듣고 다 외웠어?”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걸 다 설 명해 준 세레나 님 덕분이죠.”
“세상에, 너 진짜……소 이런 것들 은 교육 기관에서 한 달 동안 가르 치는 건데……으 어쩌다 노예가 된 거야, 이렇게 똑똑한데?”
난 쓰게 웃었다. 세렉이 개새끼라 서 그렇지, 뭐.
“거기엔 뼈아픈 사정이 있죠.”
“……그렇구나.”
그녀는 훨씬 누그러진 태도로 이 리저리 왔다 갔다 하며 내게 필요한 물품들을 구비해 주었고, 한참 나갔 다가 돌아와서는 옷가지도 챙겨 주 었다.
“너, 폐하께서 한 번씩 불러올리
신다고 했으니까, 그때는 이런 몰골 로 가면 안 된단 말이야. 완벽하진 못하더라도 완벽에 가깝게, 알겠어? 이 옆에 욕실이 있으니까 거기서 씻 고, 옷도……/
“네, 세레나 님.”
“같이 일하는 처지에 그냥 세레나 라고 불러. 그런데 대체 폐하께서는 널 왜 찾으시는 거야?”
부반응을 치료하려고. 마력을 사 용한 부작용.
하지만 나는 입을 다물었다. 분 명, 처음에 내가 그것을 지적했을 때, 그 패왕은 나를 노려보며 어디
서 들었냐고 물었다. 그 병에 대해 서 알리는 것을 꺼리는 게 틀림없었 다.
가진 게 없으면 눈치라도 빠르고 입단속이라도 잘해야 오래 산다.
“죄송해요. 그건…… 폐하께 허락 을 구하고 말씀드릴게요.”
내가 못내 미안하다는 듯 말하자, 세레나는 아니라며 방긋 웃었다. 오 히려 내가 그렇게 비밀을 엄수하는 태도가 더 그녀의 마음에 든 것 같 았다.
그녀는 이만 쉬라고 말하곤 내일 아침 6시 반에 일어나라고 일러 주
었다. 그러곤 또 다른 일이 있는지 바삐 사라졌다.
나는 동생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기회를 놓친 것을 곱씹으며 멍하니 빈방의 침대에 앉아 있었다. 세레나 는 그런 일을 처리할 권한이 있는 자로는 도무지 보이지 않았으니까.
앞으로 뭐가 어떻게 되는 걸까.
일의 스케일이 어지간히 커야 말 이지……소 제국이니 패왕이니……오
나는 일단 방을 둘러보았다. 방은 일꾼이 쓰는 방 중 하나를 내준 모 양이지만, 다인실도 아니고 나 혼자 쓰는 방이었다. 이렇게 큰 건물을
관리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이 필요 할지를 생각해 보면, 그것만도 굉장 한 일이다.
채광이 잘되는 작은 창문과 볏짚 을 엮어 만든 향이 좋은 침대가 있 었고, 옆에 딸린 작은방에는 욕조까 지 있었다.
“와I”
욕조 위에 있는 동그랗게 튀어나 온 것을 꾹 누르자, 물이 콸콸 쏟아 져 나왔다.
세상에. 골디나의 귀족 나리들도 이런 호사는 누리지 못한다. 꿀꺽, 절로 침이 넘어갔다.
쉬어도 괜찮다고 했으니까 좀 씻 어도 되겠지? 지난 며칠 동안 노예 상의 마차 속에서, 그것도 남자들하 고 함께 지냈다. 제대로 씻기는커녕 세수도 못 했더니 몸이 퀴퀴해져서 곰팡이라도 피는 게 아닐까 싶었다.
문에 달린 미는 잠금쇠를 채우고, 창문에도 꼼꼼하게 커튼을 내린 나 는 냉큼 옷을 벗고 욕조에 들어갔 다.
“너무 좋아……『
몸이 녹아 없어질 것처럼 행복했 다. 따뜻한 물에 그간의 피로가 모 두 씻겨 나가는 듯했다. 물속에 몸
을 완전히 담그자, 물 위에 붉고 긴 머리카락이 둥둥 떠다녔다.
오랜만에 머리도 감고 몸도 깨끗 하게 씻고 나니 정말 살 것 같았다. 방에 놓여 있는 얇은 가운을 걸치고 머리를 말리고 있는데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세 레나?”
틀림없이 내 목소리가 바깥까지 들렸을 텐데 대답은 없었다.
노크하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도 미리 물어 둘걸. 그냥 누구냐고 하 면 되는 걸까?
난 달려가 문을 열어 주었다. 어
차피 오늘 더 올 사람은 없다고 했 으니까, 세레나일 게 틀림없을 터.
하지만 문 앞에 선 것은 세레나 가 아니었다. 예상한 곳에는 얼굴이 아니라 가슴팍밖에 없었고, 한 발짝 물러나서 올려다보자 흑발의 황제가 서 있었다. 이제야 저 보라색 의복 의 의미도 온전히 이해가 되었다. 내 손에서 수건이 떨어졌다.
황제는 내가 문 앞에 서 있는 게 거슬린다는 듯 손을 옆으로 까딱까 딱했다. 난 황급히 한쪽으로 비켜섰 다.
“들어가도 괜찮은지 물어볼 필요 는 없겠지? 내 소유의 건물과 내
소유의 인간이니까.”
거만하게도 지껄인다. 그래, 가진 거 많아서 좋겠수.
남의 소유의 건물에 오늘부로 입 주한 남의 소유의 인간인 나는, 황 제가 호위병들을 문 앞에 두고 혼자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고 하나밖에 없는 의자에 앉는 걸 바라봤다.
황제가 나를 묘한 눈으로 훑어보 았다.
나는 속성 과외를 받은 내용을 실천하여 예에 맞게 그의 손등에 키 스하고 물러나 바닥에 앉았다.
“씻겨 놓고 보니, 노예상들이 그
렇게 시끄러운 걸 견딘 이유를 알 것 같군. 예쁘군.”
“무슨 말씀이시죠?”
“기분이 나빴나?”
그는 내 기분 같은 건 안중에도 없단 얼굴로 물어 오더니, 내 대답 을 듣기도 전에 제 할 말을 계속했 다.
“내가 여기 온 건, 쓸데없는 소리 를 지껄이지 말라고 온 거다. 날 치 료할 수 있다니 뭐라도 된 것 같겠 지만……,”
“그런 소리를 지껄이고 다니는 멍 청이는 아닙니다. 폐하의 병에 대해
서는 함구하겠습니다. 저도 바라는 게 있으니까요.”
“바라는 거? 아아, 그 동생 말이 지.”
배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
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