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화
적안에 서린 경탄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속으로 얼마나 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는지 모른다.
“이 정도면, 제가 교환의 대가로 내놓을 상품이 되겠습니까?”
그는 손등이 완전히 깨끗해진 다 음 내 손을 놓았다. 그러곤 그 손등 을 한참 보더니 날 빤히 바라봤다.
“좋다. 그 세 치 혀, 어디 한번 내 궁에 와서도 놀려 봐.”
“동생은요? 동생은요!”
“네가 필요하여 산 것이니 널 보
내 줄 순 없지. 그 동생인지 뭔지는 데려와 주겠다.”
앗싸, 이거 잘된 거 맞지?
난 너무 기뻐서 그만 몸에 마법 진을 새긴 원인인 세렝게반 개새끼 에게 감사할 뻔했다. 하지만 다행히 도 난 머리가 좋았다. 그 개새끼가 아니었더라면 이런 상황에 처하지도 않았을 것을 떠올리곤, 그런 중대한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 수 있었다.
그는 수행원 중 하나에게 턱짓을 하곤 홱 돌아섰다.
노예상은 잽싸게 칼을 거뒀고, 난 간신히 운신의 자유를 얻었다. 턱을
들고 노예상을 쏘아보는데, 수행원 중 한 명이 가까이 다가와 노예상에 게 금화를 건넸다. 노예상은 무려 금화씩이나 되는 것을 받지 않겠다 고 몇 번이나 거절했다. 왜 저러지? 미쳤나?
난 그 광경을 멍하니 보다가 방 금 들은 말을 다시 생각해 봤다.
근데 방금 무슨 궁이라고 하지 않았나?
궁……전……?
이제는 내 주인님이 된 그 검은 머리 남자 일행의 으리번쩍한 마차 세 대의 행렬이었다. 뭐, 마차 전시 회라도 하는 건지 내 머리로는 아무 리 이해하려고 해 봐도 이해가 안 되는 과한 행렬이었다. 그중 가장 볼품없는 것도 너무 화려해서, 짐칸 에 궁둥이를 붙이면서도 심장이 두 근거 렸다.
앞뒤로 말을 탄 사람들이나, 창을 들고 걷는 사람들이나, 그 사이에 선 시종으로 보이는 사람들마저도 다 멋들어진 의복을 차려입고 있었 다.
짐칸은 마차의 뒤쪽에 있어서, 나
는 진행 방향의 반대를 보고 앉았 다. 그래서 더욱 이 잘난 인물들의 행색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도 내게 신경 쓰지 않았지만, 나 혼자 신경 이 쓰였다.
이 일행에서 나 혼자만 동떨어진 느낌이었다. 초라한 행색에, 발에는 신발도 하나 없는. 게다가 노예의 신분으로 거둬졌으니…… 이제 자유 민도 아닌 셈이겠지.
그냥 모두 나와 비슷한 수준이었 던 뒷골목에 살 때가 좋았다. 골디 나 수도의 시궁창 뒷골목이 그리웠 다. 매일같이 오물 냄새가 나고, 골 목골목마다 수시로 범죄자와 경찰이
들락거리긴 해도 그곳에선 이런 기 분을 느낄 필요가 없었다.
“세렉 개새끼.”라는 말은 이젠 그 냥 한숨처럼 나오는 문장이었다. 그 말을 입 안에서 웅얼거리는 사이에 마차가 덜컹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 다.
행렬은 조용히 앞으로 나아갔다. 마차가 일정한 속도로 흔들리는 것 을 느끼고 있는 사이에 그나마 한시 름 놓았다. 아마 사태는 이보다 더 나빴으면 나빴지, 좋아질 리는 없었 을 거다.
하지만 전혀 모르는 곳으로 가는 거니까 걱정이 전혀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 까만 머리에 적안의 남자, 좋은 사람일까? 그래도 사람 보는 눈은 꽤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남자는 속을 읽을 수가 없었다. 순수하게 표정을 잘 드러내는 사람 같기도 하고, 속내를 숨기는 사람 같기도 했다.
아아, 모르겠다.
나는 기지개를 켜곤 내 뒤에서 앞으로 잔잔하게 흘러가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나무, 나무, 나무, 집, 집, 굴뚝, 산. 그리고 저 멀리 황금 색으로 물결치는 익어 가는 보리밭.
지금껏 내내 긴장해 있느라 보지 도 못한 광경들이 하나씩 눈에 들어
왔다.
동생이 어디에 있는지 빨리 알려 주고 싶었다. 지금쯤이면 약이 다 떨어져 갈 텐데.
동생이 머물 곳은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 것까지 신세를 질 수는 없었다. 여기도 골디나의 수도처럼 외지인에게는 방을 세놓지 않으려는 풍습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곤 란한데오
병을 돌봐 주는 것으로 아주 조 금이나마 봉급을 받을 수 있을까? 하지만 그가 분명 말했다. 서로의 필요를 교환하는 거라고. 봉급을 받 는 것까진 아무래도 무리일지도 모
른다. 노예로 팔려 가는 것을 구해 준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여기라고 할지도 모른다. 동생을 데려와 주는 것만 해도…… 정말 감사한 일이니 까……으
그렇다면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 게 여유 시간 동안 나갈 수 있게 해 줬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마차는 꾸준히 달려갔다. 자꾸만 눈이 감겼 지만, 난 이런 상황에서 자는 사람 이 아니다. 아닌데, 아니어야 하는 데…… 먼 거리를 가는 마차에서 나 는 그만 깜박 졸고 말았다.
덜컹!
마차가 멈추며 기울어지는 반동에 깜짝 놀라 눈을 떴다. 다 왔나? 어 디지? 그 남자의 집인가? 고개를 살짝 옆으로 빼 마차들의 동태를 살 폈다.
멈춰 선 마차로 제비같이 날렵한 옷을 입은 남자가 다가가 문을 열었 고, 양쪽으로 활짝 열린 문으로 가 장 먼저 내린 것은 그 까만 머리의 남자였다. 정말 키가 크고 몸이 좋 긴 했다. 마치 사자처럼 보였다. 아 까도 골격이 좋다고 생각했지만 다
른 사람들 사이에 있으니 더 돋보였 다.
그가 마차에서 내리는 순간, 어디 에서 쏟아져 나온 건지, 희고 노란 옷을 입은 한 무리의 남녀가 자연스 럽게 그의 곁에 일사불란하게 달라 붙었다. 의전이라도 하듯 그를 모시 며 건물 안으로 걸어갔다.
이게 다 무슨 일인가 싶은데, 그 까만 머리의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 은 듯 덤덤한 얼굴로 그 무리 속에 섞여 걸어갔다. 그의 바로 옆에 달 라붙은 사람이 그에게 뭐라고 혼자 떠들어 대는 걸로 봐서 뭘 보고하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왕이라도 모시듯 하네. 저 까만 머리, 대단한 사람인가?
난 늘 세렉과 동생의 곁에 달라 붙어 있느라 골디나 수도에서 가끔 있는 여왕님의 행렬 같은 걸 본 일 이 없었다. 하지만 르베르티티는 꼭 목 좋은 자리에서 보고 와서 이야기 를 해 주곤 했는데, 마치 그 이야기 를 들으며 상상한 광경을 보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막 건물 그림자로 그의 뒤통수가 사라지려던 찰나, 그가 내 쪽을 흘 끗 돌아보는 것 같았다.
그렇게 먼데도 시선이 마주친 느
낌이다. 정말 어지간히도 강렬한 사 람이 다.
그와 그의 수행원들이 모두 사라 지고 난 휑한 마차에 혼자 남겨졌 다. 주위에 오가는 사람들은 많았지 만 그래도 그나마 속이 좀 안정되었 다.
황궁에 무슨 볼일이 있어서 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곧 다시 출발할 테니까…… 그때까지 마차에 서 기다리면 되겠지?
하지만 혼자만의 시간을 잠깐 즐 기려던 내게 시녀로 보이는 여자가 불쑥 다가왔다.
설마 내가 도망칠까 봐 감시하러 왔나? 난 동생만 데려올 수 있으면 골디나에 딱히 미련도 없고, 세렉이 그 난리를 쳐 놓은 이상 뒷골목으로 돌아가서 정착할 수도 없는 몸이었 다. 도망칠 리 없는데.
황궁의 시녀는 과연, 내가 가진 어떤 가장 좋은 옷보다도 더 질이 좋아 보이는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녹색의 튼튼해 보이는 드레스에 청 결해 보이는 흰 옷감을 덧대 입고 있었다. 그녀에게선 좋은 냄새가 났 다.
“노예라고 들었는데, 따라와.”
“전 여기서 기다릴게요.”
시녀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무슨 소릴 하는 거지? 누굴 기다린다는 거야.”
누구……라고 대답해야 되지? 나 를 산 그 흑발 적안의 이름도 모르 거니와 신분도 몰랐다. 난 어쩔 수 없이 적당히 통용되는 명칭을 썼다.
“주인님이요.”
이번에는 그 시녀는 정말 말도 안 되는 것을 들었다는 얼굴이었다.
“정말 제대로 교육받은 게 없 군……, 앞으로는 폐하, 라고 부르도
록 해라. 주인님이라거나 하는 식으 로 좋을 대로 부르는 것도 안 돼.”
“……폐하?”
“그래. 그렇게. 보아하니 앞으로 갈 길이 깜깜하군. 가르칠 게 한두 개가 아니겠어.”
시녀는 투덜거리며 빨리 안 일어 나고 뭐 하냐는 듯 손을 저었다. 나 는 그 기세에 눌려 얼결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폐하라니……오 그러니까……
그…… 폐하라는 단어가, 나라마다 다른 뜻을 가졌나? 공용어를 쓰긴 하지만 지방색이 드러날 때가 있다
고 듣긴 했다.
황궁에 와서 폐하라는 말을 들으 니까, 그런 생각이 얼핏 들긴 했다. 제국의 패왕은 까마귀처럼 까만 투 구를 쓴 붉은 눈의 미치광이라는 말 을 들은 적이 있으니까. 혹시 그가 나를 산 사람은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 말이다. 하지만 설마 그럴 리 는 없지 않겠는가.
시녀는 부지런히도 투덜거리며 손 에 들고 있던 가죽 신발을 내밀었 다. 시녀가 신고 있는 것과 비슷하 게 생긴 것을 보면, 여기에서 일하 는 사람들이 신는 것 같았다.
“크기 몰라서 대충 가져와 봤어.”
“아……/
난 깜짝 놀라 양손으로 그걸 받 아 들었다.
“궁 안에서 맨발로 돌아다니는 사 람이 있다는 소문이 나게 하고 싶 어? 얼른 신어.”
“고맙습니다!”
“폐하께서 직접 명하신 거니까 내 가 챙기지만, 앞으론 다 알아서 해 야 돼. 알아?”
그 정신 없는 와중에 내가 맨발 인 걸 용케도 봤다.
난 감사하다는 말을 중얼거리며
신발을 신었다. 사이즈는 조금 컸지 만 이 정도는 끈을 조이면 잘 맞을 터.
하지만 폐하라는 단어, 그렇게 나 라마다 다르게 쓰는 걸까? 역시 들 을수록 이상하다.
그녀의 뒤를 따라 벽에 바짝 붙 어 걸어가는 사이에, 나는 차마 치 밀어 오르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슬쩍 질문을 했다.
“아…… 저…… 그래서 여기가 어 딘가요?”
“ 뭐?”
“저기, 그러니까…… 여기가
하
“여기가 어디냐니. 노예를 사 왔 다고 하더니, 농담이 아니셨나 봐. 여긴 헤게니야.”
헤게니.
그게 뭔데? 그게 어딘데?
내 머릿속에는 특정 지식은 몹시 완벽하고 뚜렷하게 자리 잡혀 있었 지만, 또 특정 분야는 까마득히 몰 랐다. 책이란 게 워낙 귀한 물건이 다 보니, 뒷골목에 있는 중고 서점 에 있는 책도 손님이 없는 시간에 가서 후다닥 읽고 나와야 했다. 그 러니 당연히 귀족 나리들이 잘 안 찾는 이상한 책들을 통해 잡학만 늘
수밖에.
너무 당연하다는 듯 말하기에 되 묻기가 좀 그랬지만, 어쩔 수 없었 다. 모르는데 어떻게 하겠어.
“헤게니가…… 그러니까…… 어디 죠?”
“얘 좀 봐. 기가 막혀. 수도잖아. 부르크 제국도 모르는 건 아니겠지, 설마?”
“……부르크 제국……이요?”
등골이 오싹했다. 뭔가, 낮에 떠 올렸던 생각 중 하나가 번뜩 머리를 다시 스쳤다. 말도 안 되는 추론이 라고 생각하고 말았는데.
부르크 제국. 폐하. 검은 머리. 붉 은 눈.
단서들이 모이고 보니, 마치…… 그러니까…… 마치……,
하지만 설마…… 그럴 리가 없잖 아? 하하하,
“주인님…… 아니, 폐하께서는 그 러니까……;
시녀가 기가 막히다는 눈으로 나 를 홱 돌아봤다.
“당연히 부르크 제국의 단 하나뿐 인 황제, 반 님이시지 누구겠어.”
세상에. 부르크 제국의 패왕이 맞
았다.
이게 말이나 되나?
내 삶은 지극히 평범한 뒷골목 인생이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걸 까?
엄마는 내게 늘 분수에 맞게 살 라고 하셨는데. 하늘같이 높은 직책 이라고 생각했던 골디나 국의 마법 장교가 나를 버리고 나서, 날 거둔 사람이 무슨 제국의 패왕이라고?
해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
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