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화
날이 두 번쯤 바뀌자 내 인내심 은 바닥이 났다. 난 결국 성질을 참 지 못하고 울면서 고함쳤다.
“진짜, 너무한 거 아냐? 니들은 가족도 없냐? 어?! 동생이 아프다는 데, 내가 없으면 죽는다는데, 어떻게 이래? 어?! 내가 돈 준다잖아! 날 팔면 얼마 받는데? 그 돈 내가 준 다잖아. 제발, 제발 좀 내보내 달라 고!”
결국 그들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남자가 손을 들었고, 마차는 멈춰 섰다.
아, 거 진짜 시끄럽네. 이
계집, 입 좀 막아.”
“그렇게 시끄러운데 들은 척도 안 하냐? 어?!”
“듣자 듣자 하니까……,”
눈이 길게 째진 그 사내가 이를 꽉 깨물고 내 쪽을 쏘아보았고, 덩 치가 산만 한 남자 둘이 그의 지시 를 받았는지 마차 철창에 다가섰다. 여기에는 나도 움츠러들었다. 두 사 내는 나를 흠씬 패 놓기라도 하려는 지 몽둥이를 꺼내 들고 날 철창에서 질질 끌어냈다.
마차 안에 있는 다른 예비 노예 남자 세 명은 나보다 더 겁에 질려
있어서 날 도와줄 처지가 아니었다.
덩치 큰 쪽의 사내는 사람을 한 두 번 때려 본 게 아닌지, 적당히 때리기 좋은 부위를 가늠하듯 날 살 피며 몽둥이를 확 치켜들었다. 난 몸이라면 날렵했고, 한두 번 정도는 피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랬다 간 화만 돋울 것 같았다.
눈을 질끈 감고 몸을 웅크렸다.
하지만 잠깐의 시간이 흘러도 예 상했던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대 신 어떤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발소리, 들렸던가?
멍하니 옆을 바라보는데 방금까지 아무도 없던 곳에 어떤 장신의 사내 가 서 있었다. 난 뭔가에 홀린 기분 으로 그를 바라봤다. 나 말고 다른 두 사내도 어지간히 놀란 얼굴이었 다. 손에 든 몽둥이를 팽개치고 얼 른 그에게 예를 표했다.
“헉, 여,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 까?”
“노예상인 것 같은데, 처우가 너 무 심하군.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네, 그렇습니다. 골디나에서 들여 온 노예이온데…… 너무 말하는 모 양새가 괘씸하여
“멀리서도 온 노예로군.”
“그렇습지요.”
“거기도 내내 노예를 내놓는 걸 보면 나라 관리가 엉망진창인 모양 이야. 언제 한번 가서 뒤집어 버리 든가 해야지.”
듣자 하니 영 말투가 이상했다. 마치 골디나를 정복하는 것쯤은 손 쉬운 일이라는 것처럼 들렸다.
골디나는 마법이 번성한 나라다. 골디나를 우습게 대할 수 있는 나라 는 부르크 제국뿐이다. 가뜩이나 국 력이 타국에 상대되지 않을 나라인 데다, 어마어마하게 잔혹하고 영토
를 확장하는 것을 취미로 삼는 패왕 이 있다고.
이 나라는 대체 어디길래 지나가 는 귀족이 저딴 소리를 지껄이지?
나는 다른 뒷골목 인생들처럼 태 어난 곳에서 멀리 떠나 본 적이 없 었다. 골디나 내의 다른 도시나 마 을에조차 가 본 일이 없는 내가, 마 차를 타고 하염없이 떠나온 이곳이 어딘지 알 턱이 없었다.
“노예의 몇 마디에 너무 과하게 굴지 말고 적당히들 해라.”
“네!”
갑자기 나타났던 그는 갑자기 떠
나가려는 기색이었다.
안 된다. 그가 이 중에서 유일하 게 제정신으로 보이는 사람인데. 그 의 주위로 뒤늦게 도착한 수행원들 이 몰려드는 게 보였다.
어떻게 하지? 지금이 그나마 돌 아갈 유일한 기회가 아닐까? 정말 어디론가 팔려 가면 끝장이잖아.
나는 망설이다가 그자의 앞으로 몸을 던지며 엎드렸다. 엎드린 채로 흘끗 주변을 살피니 노예상의 얼굴 이 새파랗게 질린 것이 보였다. 그 럴 정도로 높은 분이라 이거지.
“이 미친년이! 어느 안전이라고!”
노예상이 우악스럽게 내 팔을 움 켜쥐는 것을 보았지만, 나는 목이 잘려 나갈 각오를 하고 후다닥 말을 뱉었다. 안 될 줄 알았지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해 보아야 하 질 않겠는가.
“나, 나리. 나리! 제발 살려 주십 시오. 제발 가엾게 여기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드신다면 절 돌려보내 주세요.”
인정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지 만 그건 다 착각이었을까. 그자에게 서는 조금의 흥미도 찾아 볼 수 없 었다. 귀찮은 기색이 언뜻 비쳤다.
노예상이 나를 끌어당기는 데로 내 몸은 질질 끌려갔다. 난 목청을 키웠다.
“제겐 동생이 있습니다. 제가 없 으면 앓다 죽을 겁니다. 혼자서는 집 밖에 나올 수도 없는 동생입니 다. 저 말고는 돌봐 줄 사람도 없습 니다. 그러니 제발 제 동생을 구해 주십시오.”
그 흑발의 사내는 이 사태가 재 밌다는 듯 길게 웃었다. 사람이 사 정하는데 웃다니.
“그래서 어쩌라는 거지?”
“……네?”
“내게 원하는 것이 있다면, 내가 얻을 상응한 대가가 있어야 할 것 아닌가. 내가 자원봉사자로 보이 나?”
비정한 것처럼 들려도 저건 틀림 없는 세상의 논리였다. 나는 그가 매정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 만 내 손에 아무런 협상 거리가 없 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포기부터 할 수는 없었 다.
골목에서 배운 것은, 귀족이든 누 구든 완벽한 자는 없다는 거다. 그 들은 마약이든, 하룻밤을 함께 보낼
남자든 아무튼 제 손에 없는 것을 구하기 위해서 천하디천한 우리를 찾기도 하니까. 뭐든 필요한 게 있 을지도 모른다, 저자도.
이렇게 더 빌 수 있는 시간도 아 주 조금밖에 남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필사적으로 그 남자를 살폈다.
늠름하고 반반한 얼굴이 인상적이 다. 골디나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흑발에 붉은 눈이 그은 피부와 잘 어울렸다. 책상물림은 아니라는 소 리다. 볼에는 햇볕에 타지 않은 부 분이 약간 남아 있었다. 투구를 가 끔 쓰는 사람이군. 기사로 나가는 귀족?
옷 위로도 태가 나게 드러나 보 이는 떡 벌어진 어깨와 잘 짜인 몸 이 보기 좋았다.
신분을 가장 잘 설명해 주는 것 중 하나가 몸에 걸치고 있는 옷이 다. 아예 사치품보다도, 뒷골목 사람 부터 귀족, 황제까지 모두 걸치고 있는 그 옷이야말로 정말 계급을 확 연하게 드러내는 물건이기 마련이 다.
그가 걸치고 있는 망토의 목 부 분엔 흰 담비 털이 둘려 있었고, 고 급 모직물인 옷감은 틀림없이 먼 동 방의 수입품이었다. 그리고 간간이 들어간 자주색에는 잠깐 놀랐지
만…… 모르겠다. 내가 워낙 타국의 사정에 무지하다 보니……오 저 보랏 빛은 골디나에선 황제의 색이라고 하여 귀족들도 쓰지 못하는 색이었 지만, 나라마다 풍습은 다른 법이니 까 그리 신경 쓸 건 아니겠지.
결국, 알아낸 것은 그가 내 도움 같은 게 필요할 리 없는, 신분도 높 고 돈도 많은 나리라는 것뿐이었다.
난 절망하여 시선을 거두려다가 긴 옷자락 새로 드러난 그의 손등을 보았다.
그의 손등에는 눈에 띄는 화상 자국 같은 것이 번져 있었다. 화상 이 아니라 포진처럼 보이기도 했다.
손가락이 시작되는 바로 이전 지점 까지 번져 있었다.
그것은 분명 내가 아는 것이다.
부반응0어아).
그건 세렝게반이 마법 장교가 되 기 전에 종종 앓던 바로 그 증상이 었다. 마력을 제대로 운용하지 못하 거나, 허용량 이상으로 너무 많이 사용하면 앓는 병.
이젠 정말 옛날 일처럼 느껴지지 만, 그 개새끼를 바로 얼마 전까지 만 해도 치료해 줬던 내가 그걸 잘 못 볼 리 없었다. 골디나에서는 그 증상을 과잉 마력 증후군, 또는 부
반응이라고 불렀다.
이렇게 대단하신 분이 왜 손등이 그 꼴이 될 때까지 치료를 안 하 고? 손 꼴이 저 정도가 되려면 하 루 이틀 치료를 못 한 게 아닌 것 같은데. 꽤 오래 누적되었을 거고, 실제로 고통도 느껴질 거다.
알약을 못 살 형편이라고는 생각 도 되지 않는데, 어째서?
나는 몸짓 언어를 읽는 데 능숙 하다. 언제나 다른 사람의 위에 서 있었다는 듯, 아래를 내려다보는 시 선이 당당하기 짝이 없는 그다. 그 런 그가 왜?
난 소매치기에게서 배운 화려한 스킬을 구사하며 노예상의 손을 빠 져나와 다시 바닥에 엎드렸다.
“귀족 나리께서 바라시는 것 중 무엇도 제가 드릴 수 있는 게 없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제가 드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리께서도 꼭 원하시는 것입니다. 저희는 나쁘 지 않은 거래를 할 수 있습니다.”
“……저, 당돌한 년이 미쳤나! 지 금 누구한테 네까짓 게 필요하다는 거야?”
노예상은 이번에야말로 죽여 버리 겠다는 듯 아예 장검을 뽑아 들었
다. 장사하는 입장에서는 그래도 내 가 명이 붙어 있는 게 나을 텐데, 저렇게까지 구는 걸 보면…… 어지 간히 내가 말실수를 하긴 한 모양이 다.
하지만 어떻게 하겠는가. 여자 노 예가 팔려 갈 곳이라야 정말로 구질 구질하고 생각도 하기 싫은 곳일 게 틀림없었다. 홍등가에 가든, 변태에 게 팔려 가든 다시는 나오지 못할 늪이리라.
내 다급한 말이 진실일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지, 그 흑발에 적안의 남자는 픽 웃음을 흘렸다.
“보아하니, 넌 당돌하게 입을 잘
못 놀려 노예가 되었구나. 하지만 정말로, 나는 필요한 게 없다.”
나는 납작 엎드려 있기를 포기하 고 몸을 일으켰다.
“지금 앓고 있는 그 병을 매일 낫 게 해 드릴 수 있습니다.”
몸을 돌리려던 그 나리는, 그대로 멈춰 섰다. 그가 멈추자, 모두가 행 동을 멈췄다. 내 목에는 막 노예상 의 날카로운 칼날이 와 닿은 찰나였 다. 목을 만져 보지 않아도 살갗이 베어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따끔 한 감촉에 목이 뜨겁게 느껴졌다.
그자는 지금까지 본 중 가장 험
악한 얼굴로 나를 쏘아보았다. 위압 적인 사람이라곤 생각했지만, 막상 이렇게 되자 살기가 장난 아니다.
“……어디서 나에 대해 뭘 들은 거지?”
“궁금하다면 절 데려가십시오. 그 러지 않으면…… 제가 다른 곳에서 뭐라 지껄일지 모르지 않습니까?”
“다시 한번 묻겠다. 어디서 뭘 들 은 거지?”
“전……;
아무리 그래도 목에 칼이 붙어 있으니 몸이 덜덜 떨렸다. 침이 꼴 깍 넘어갔다.
“어디서 무엇도 듣지 않았습니다. 나리가 누구신지도 모릅니다. 다만 전 그 병을 알고, 치료하는 법을 압 니다. 그래서 증상만 보고도 아는 것입니다.”
“치료할 수 있다……오 그걸 나보 고 믿으라는 건가?”
그의 의심스러운 눈이 마음에 걸 렸다. 골디나에서 부효과는 그리 드 문 병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 병 때 문에 엄청 고생하기라도 했나? 설마 그 드물게 있다는, 알약이 안 듣는 체질인가?
마음속에 조금의 불안이 있긴 했
지만, 난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은 채로 손바닥을 위로 하여 한쪽 손을 위로 내밀었다.
그가 내 손을 쏘아보았다.
왜 이렇게 사람이 의심이 많은지 모르겠다. 사랑과 정의가 넘쳐 나는 세상이라면 내가 손을 내민다면 덥 석 악수를 해 주었을 텐데.
“입증해 드리겠습니다.”
“……좋다. 손해 볼 건 없겠지.”
그의 주변에 서 있는 수행원들이 경악스러운 얼굴을 하는 게 모조리 눈에 들어왔다.
그가 내 손에 제 손을 겹쳤을 때,
난 그 손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내 목덜미에서부터 등, 배, 허리, 어깨, 팔을 걸쳐 새겨진 마법진의 술식에 집중하며 그의 몸의 속과 겉 의 부작용을 무효화했다. 그의 몸에 일어난 부효과들을 계산하며, 숫자 를 10에서부터 1까지 거꾸로 세었 다. 그렇게 눈 깜짝할 사이에 낫지 는 않았지만, 눈으로 보아도 서서히 붉은 피부가 정상적인 색을 찾아 가 는 걸 알 수 있을 정도의 속도였다. 틀림없이 고통도 완화되고 있으리 라.
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