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화
난 뒷골목에서 자랐다. 이런 아저 씨가 막아선다고 해서 호락호락 물 러서기엔 내 그간의 삶은 너무 험했 다. 내가 판단을 하지 않고 믿는 것 은 내 남동생과 세렝게반밖에 없었 다. 그들의 헛소리가 진실인지 아닌 지 내 눈으로 똑똑히 봐야겠다.
“후회할 텐데요. 세렉 나오라고 해요. 아니면 날 데려가. 그러면 되 잖아요. 내가 만약 정말로 세렉의 친구라면 어쩔 건데요? 그러면 장교 님의 친구를 이딴 식으로 대접한 걸 감당할 수 있겠어요?”
내가 기세 좋게 그들을 노려보았 고, 문지기들은 이쯤 되자 아주 장
난인 것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는지 눈알을 데룩 굴렸다. 그들은 조금도 납득한 것 같지 않았지만, 내 말대 로 최악의 사태를 상정하기로 한 것 같았다. 얼굴을 마주 본 그들은 서 로 미루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둘 중 하나가 나를 안내해서 안쪽으로 데 려가 주었다.
연구소 안은 굉장한 곳이었다. 어 딜 보아도 하얀색밖에 보이지 않는 비싸 보이는 돌로 지어진 건물이었 고, 바닥에도 대리석이 곱게 깔려 있었다. 몇 걸음마다 부조 장식이 놓여 있기까지 했다.
나는 경탄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리
지 않기 위해 애를 써야 했다. 바닥 에 박혀 있는 돌들이 배치된 모양이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난 제대로 배 운 적은 없지만, 돌의 속성에 따라 서 마법에 관여하는 정도가 다르다 고 들었다.
세렉은 거기 있었다. ‘그것 봐, 세 렉은 내가 말한 대로잖아.’라고 말 하는 사람은 내가 되었어야 했는데, 그 말을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르 베르티티 였다.
내가 그렇게 자랑스러워했던 세렉 의 마법 장교 옷은 엉망으로 흐트러 져 있었고, 세렉의 앞에는 흑발의 키 큰 여인이 있었다. 그러니까……
입을 맞댄 채로.
사람이 상황이 너무 제대로 인지 되지 않으면 화를 낼 수도 없는 법 일까? 바로 사흘 전까지만 해도 내 게 와서 징징거리며 나를 가장 사랑 한다고, 좀만 더 상황이 안정되면 이런 고생 시키지 않아도 된다고 속 삭이며 내 몸에 새겨진 마법진을 써 먹던 그 사람이…… 지금 눈앞에서 이러고 있잖아.
내가 뭐라고 해야 돼?
좀 더 그럴듯하게 화낼 수 있는 말이 수십, 수백 개는 있을 것 같았 지만, 내 입에서 튀어 나간 말은 고 작 이것이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옆에서 보기에 민망할 정도로 짙 은 키스를 하던 세렉이 눈알만 굴려 나를 찾았고, 당황하긴 했는지 황급 히 그 여자와 떨어졌다. 그러곤 나 를 데리고 온 문지기를 한번 보았 고, 내 옷차림을 한번 훑었다.
그 여자는 갑자기 밀쳐 내지자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세렉이, 내가 그렇게 좋아했던 녹 색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다른 여 자와 키스한 입술로 내게 말했다.
“세상에, 셀레스……『
셀레스티아, 라고 발음도 하지 못
한다. 다섯 글자를 차마 발음하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런 천한 사람 과 알고 지내는 것이 대단한 마법 장교님의 위신에 큰 해가 되겠지. 저런 천치였다고?
혈관 속 피까지 다 식는 것 같았 다. 말도 안 되는 애정 같은 것으로 돌아 있던 머릿속도 순식간에 제정 신으로 돌아왔다.
르베르티티가 다 옳았다. 세렉이 다르긴 뭐가 달라. 이딴 놈인데. 장 교가 된 뒤부터 세렉은 변했다. 변 했는데…… 내가 그걸 모르는 척 외 면해 왔을 뿐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세렉과 지낸 그 모든 시간
이 너무 소중했으니까. 세렉이 너무 좋았으니까.
“변명할 테면 해 봐.”
나는 세렉에게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허탈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세렉이 어지간히 당황한 얼굴로 눈 을 데룩데룩 굴려 문지기를 바라봤 다.
문지기는 질펀하게 놀고 있는 세 렉에게 여태껏 하지 못했던 경례를 뒤늦게 붙였다.
“세렉 마법 장교님. 이분께서 친 구분이라고 말씀하셔서…… 혹시 아 시는 분이 맞는지 확인 부탁드립니
다.”
세렉과 시선이 다시 맞닥뜨렸다. 아아, 나는 세렉을 너무 잘 안다. 저 얼굴 좀 보라지. 결 좋은 잿빛 머리카락 아래에 숨은 저 당황스러 워 죽겠다는 얼굴 좀 보라지. 남들 에게 표정을 들키기 싫어서 아무렇 지 않은 척하고 있지만, 저 안절부 절못하는 손가락과 흔들리는 동공 좀 보라지. 짓씹는 아랫입술까지.
“아니. 모른다.”
“세렉, 진심이야? 진심이냐고.”
경비는 이렇게 허탈하게 중얼거리 고 있는 내가 거짓말을 했다고 판단
하기에 이른 모양이었다. 그런데 내 가 생각해도 그게 거짓말이었던 것 같다. 나는 연인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잖아. 기가 막힌다.
나를 끌고 나가기 전에, 문지기는 마법 장교님의 얼굴을 한번 보겠다 고 무도한 거짓말을 지껄인 내 팔을 붙들려고 했다. 하지만 뒷골목 출신 인 나는 소매치기들을 친구로 두고 있었고, 그들은 내게 팔을 붙잡히지 않는 법을 재미 삼아 가르친 적이 있었다.
꽤 교양 있는 사람들만 상대해 온 듯한 경비는 제 손을 요리조리 피하는 나를 보고 기가 막혀서 달려
들었다. 나는 몇 걸음 더 물러나며 비명처럼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세렝게반! 미쳐 버렸어? 드디어 미쳐 버린 거야? 어? 권력이 그렇 게 좋아?”
제 원래 이름을 들은 세렉은 못 들을 심한 욕을 듣기라도 한 듯 얼 굴이 새파랗게 질려서 나를 쏘아보 았다.
“그 미친년을 어서 끌어내!”
“세렝게반. 나를 그냥 친구로 이 용만 해도 괜찮았는데. 연인처럼 군 건 너였잖아. 왜 그렇게까지 했어? 어? 내가 이런 걸 떠벌리고 다닐까
봐서? 세렝게반은 원형 탈모 있다! 이런 거? 어?!”
“……미쳤어, 셀레스티아?”
드디어 부르네. 다섯 글자.
내가 지금까지 얌전하게 살았던 건 내 성격이 얌전해서가 아니다. 널 사랑했으니까 네 앞에서 얌전하 게 굴었던 것뿐이야. 넌 똥을 밟은 거야, 알아?
나는 목청을 더 돋웠다. 연구소가 떠나가라 쩌렁쩌렁 고함을 쳤다.
“세렝게반, 너야말로! 내가 네 엉 덩이에 난 종기도 치료해 주고, 귀 가 멀었을 때도 치료해 줬잖아? 너
때문에 나는 온몸이 마법진투성이라 고! 부작용이 없는 줄 알아? 내가 자다가 일어나서 토한 게 얼마나 잦 았는지 넌 모르지?”
세렉은 눈을 피했다.
“……이제 너 같은 건 필요 없어. 이제 공격조를 담당하는 마법 장교 다. 알약 같은 건 얼마든지 보급되 고, 살 수도 있어.”
“하…… 그런데 왜 나한테 그딴 소리를 지껄였어? 이 탈모 새끼야.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하지만 왜 청혼했어? 왜 나밖에 없는 척했냐 고, 이 개새끼야. 어?!”
나는 더 욕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때 잔디 위에 앉아서 이 모든 이 야기를 듣고 있던 여인이 더할 나위 없이 당혹스럽다는 얼굴로 배 위로 손을 가져가는 게 보였다.
‘임신한 약혼자.’
진짜 내가 어이가 없어서. 도대체 어디까지 개새끼인 건데? 죽어 버리 고 싶다. 아니, 죽여 버리고 싶다.
문지기의 손이 내 뒷덜미를 붙들 었고, 몇 명의 경비가 더 가까이 오 기까지 했다. 내가 부릴 수 있는 난 동도 거기까지였다.
문지기는 이제 좀 곤란하게 된
모양이었다. 나와 세렉의 사이를 대 충 눈치챈 거지. 하지만 내일도 모 레도 이곳으로 출근해야 하는 문지 기는 여기서 가장 가엾은 사람이 나 라는 것과, 내 이름이 다섯 글자라 는 것과, 세렉 마법 장교님께서 이 상황을 마뜩잖아하고 계시다는 것들 을 재빠르게 판단한 모양이었다.
“이 침입자를 어떻게 처리할까 요?”
세렉은 ‘이 침입자’를 노려보았다.
나는 뒷골목에서 배운 눈치로 지 금이 마지막 해명의 순간임을 알았 다. 지금 내가 싹싹 빌면서 앞으로 조용히 닥치고 살면서, 지금처럼 가
끔 얼굴을 보는 것을 영광스러워하 겠다고 약조한다면 무사히 보내 줄 것이다.
하지만 이성적인 판단보다 내 입 이 더 빨랐다.
“세렝게반 개새끼! 확 기능 부전 이나 걸려 버려라!”
바닥에 침까지 퉤 뱉고 나서도 속이 시원하지가 않았다.
세렉은 이제 제 잘못 같은 건 생 각도 나지 않는지, 나를 귀찮은 원 수 보듯 노려보았다.
“입을 함부로 놀리는 걸 가만히 둬 봤자, 또 함부로 놀리겠지. 저자
를 끌어내 시장에 내다 버려!”
“네!”
시장에 내다 버리라고? 그게 무 슨 말이지? 나는 얼핏 이해되지 않 는 은어에 얼굴을 확 찌푸렸다.
끌려 나가면서도 발버둥을 치고 욕을 지껄여 대는 나를 경비들은 힘 으로 질질 끌었다. 입구까지 끌려 나간 나는 꽁꽁 묶여 입구 근처에 있는 작은 골방에 처박혔다. 보아하 니 바깥으로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 는 마법이라도 걸려 있는 것 같았 다.
손만 풀려 있었다면, 이딴 마
법…… 처음 보는 마법이지만 해체 하는 건 일도 아닌데.
나는 의자에 묶인 채로 한참을 버둥거리다가 지쳐서 몸을 늘어뜨렸 다.
괜한 성질 부리지 말고 좀만 참 을걸. 남동생이 걱정할 텐데. 오늘 안에 풀어는 주겠지? 내가 뭘 잘못 한 건 아니잖아. 잘못을 했다면 세 렉이 했고, 내가 한 거라곤 내가 그 동안 바친 10년 넘는 순정을 고작 몇 분 분풀이한 것밖에 없는데.
도대체 언제 보내 줄 건지, 꽤 오 래 나는 혼자 내버려져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험하게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고, 고개를 들 틈도 없 이 무슨 포대 같은 게 내 머리 위 에 씌워졌다. 그제야 겁이 덜컥 났 다. 뭘 어쩔 셈인가? 제일 먼저 떠 오른 건 사형수들의 모습이었고, 그 다음으로 떠오른 것은 팔려 가는 노 예들의 모습이었다.
설마, 설마 아니겠지.
나는 시야가 제한된 채로 어디로 걷는지도 모르고 이끄는 대로 휘청 휘청 걷다가 악에 받쳐서 외쳤다.
“세, 세렉! 세렉! 아니지? 아니잖 아! 고작 그걸로 사람을……오 난 남
동생도 있다고! 약값은 어떻게 해? 세렉! 세렉, 나와 보라고! 내가 사 과할게! 내가……-”
거기까지였다. 후두부에 가해지는 강한 충격에 기절하기 전까지 내가 가진 기억은.
눈을 떴을 때, 나는 노예상의 마 차 안이었다. 철창에 갇힌 채 시장 에 출품되기 위해 운송되는 중이었 다.
2, 패왕을 만나다
난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하루 종일 철창에 붙어 서서 바 깥에서 말을 모는 덩치 좋은 남자들 에게 빌었다.
“제발, 이러지 맙시다. 제발 좀 내보내 주세요. 제발요. 가진 돈은 없지만 빚을 내서라도 드리겠습니 다.”
험상궂은 사내들 중 하나가 적당 히 하고 입을 다물라는 듯 주먹을
쥐어 보였지만, 뒷골목 인생인 내가 그깟 주먹을 두려워할 리는 없었다. 짖는 개가 물지 않는다는 말처럼, 저렇게 위협적으로 구는 자들이 오 히려 덜 무서웠다.
차라리 몇 대 얻어맞아서 뼈라도 부러져서 내가 살던 곳으로 돌려보 내 준다면 더 소원이 없을 지경이었 다.
마차 안에는 나 말고도 다른 이 들이 몇 명 더 있었다. 그들은 날 말리려고 했지만 난 필사적으로 사 정했다. 더 이상 목을 축일 물도 주 지 않아 목소리가 갈라졌지만 계속 사정했다. 비굴하든 말든 좋았다.
“제 동생이 아파요. 제 동생은 제 가 없으면 죽어요. 자기 발로는 집 에서 나오지도 못하는 애라고요. 제 발 이렇게 부탁할게요, 네?”
저것들이 저러고도 사람인가? 이 렇게 간곡하게 부탁하는데도 노예상 들은 날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내 애원은 당나귀가 푸르릉거리는 소리 만도 못했다.
그럼에도 난 몇 시간이고 계속해 서 빌었다. 하지만 내 말소리 이외 에는 마차가 덜컹거리는 소리뿐이었 다. 나는 무릎까지 꿇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동생이 보고 싶었다. 내가 쓸데없 는 짓을 해서 동생을 보지도 못하게 된 이 상황이 너무 미안했고, 세렉 을 죽여 버리고 싶었다. 어떻게 나 한테 이러는지……,
내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