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1화 (1/103)

— 1화

1. 그녀가 노예가 된 이유

나는 골디나의 뒷골목에 산다.

그 더러운 뒷골목에도 희망과 사 랑이 싹트는 법이다. 뒷골목에는 거 리마다 오물이 흘러넘치고, 판자로 쌓아 올린 건물들 사이로 난 좁은 흙길에는 시체처럼 거지들이 드러누 워 있었지만, 나는 내 사랑을 생각 하면 기운이 났다.

오늘도 푼돈이나마 벌기 위해 노 점을 차리고 손님을 기다렸다. 간판 은 없지만, 단골은 제법 있다.

멍하니 가판대를 정리하며 골목의 끝을 바라보았다.

세렉은 왜 안 오는 걸까? 오늘 분명히 온다고 했는데. 요즘은 매일 같이 약속을 미루기가 일쑤였지만, 오늘에야말로 정말 온다고 했는데.

체념하기가 무섭게 다시 천막을 들춰 보고 또 들춰 보며 거리를 살 피는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세렉이 아니라 뒷골목에서 전당포를 운영하 는 르베르티티였다. 어지간한 소매 치기와는 다 알고 지내는 그녀는 빠 삭한 정보통이었다.

“셀레스티아! 오늘도 출근했네?”

“르베르티티. 어서 와.”

녹색 머리칼을 엉덩이까지 늘어뜨 린 르베르티티는 웃으며 내 옆을 지 나 작은 노점 안으로 들어섰다. 가 게랄 것도 아닌 작은 천막 안에는 의자 두 개가 덜렁 놓여 있을 뿐이 었다. 그녀는 한숨부터 쉬었다.

“자기, 오늘도 기다리는 거 아니 지? 그딴 대단하신 장교님이 자기를 진지하게 생각할 것 같아?”

나는 입을 꾹 다물고 르베르티티 의 팔을 붙잡아 이리저리 살펴보았 다. 마법을 배울 수 없는 몸이지만, 마법을 지우는 능력을 어떻게든 익

힌 나는 마법 문신을 지우는 일을 하며 푼돈을 번다.

처음 보는 문신이 하나 생겨 있 었다.

“나도 내 능력을 못 믿으니까, 이 렇게 무분별하게 문신을 새기지 말 라고 말했잖아.”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야. 그만 기다려. 정말이지, 세렉은 그냥 자기 를 이용하는 거라니까.”

나는 못 들은 척 손끝에 정신을 집중해 그 문신을 살살 문질렀다.

가령 1에서부터 10까지를 읊어 새겨 두는 게 마법이라면, 나는 마

법을 쓴 사람의 의중을 헤아려 10 에서부터 1까지를 거꾸로 읊어 파훼 하는 거다.

남들이 나와 같은 일을 하는 걸 본 적은 없는데, 나는 이 일에 요령 을 터득했다. 뭐, 썩 자랑은 아니었 지만, 온몸에 금기의 마법진이 있는 터라 마력을 다루지 못하는 몸이지 만 머리를 잘 쓰면 마법을 지울 수 있었다.

팔에 새겨진 문신은 순식간에 사 라졌다.

“자자, 다 됐다. 그리고 세렉은 올 거야. 온다고 했어.”

“정신 차려, 자기. 왜 이렇게 순 진해?”

나는 쓰게 웃었다. 그녀의 그 말 을 듣는 게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하지만 세렉은 그런 귀족들과는 다르다. 뒷골목에 있는 사람을 한 번 이용하고 버리는 다른 장교들과 는 질적으로 달랐다.

세렉의 본명은 세렝게반.

잘나고 귀하신 분들은 이름이 짧 지만, 세렉도 본디 그렇게 이름이 긴 뒷골목 출신이었다. 그런 그가 지금만큼 출세한 것은 모두 내 도움 이다.

나와 세렉, 그리고 내 남동생까 지, 우리 셋은 어릴 때부터 이 뒷골 목에서 함께 자라났다.

우리는 누구 하나라도 성공해서 우리를 먹여 살리자고 늘 입을 모았 다. 사람 때리길 밥 먹듯 하던 보육 원에서 함께 탈출한 우리는 한 몸이 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나마 우리 중에선 세렉이 가장 마법에 재능이 있었다. 어느 정도 있는 게 아니라, 대단했다.

우리는 이거라고 생각했다. 신분 고하를 가리지 않고 출세할 수 있는 것은 마법이 유일했다. 마법은 재능 이니까. 귀족 나리라고 해서 더 잘

할 수 있는 그런 게 아니었다. 나리 들은 어릴 때부터 고등 교육을 받으 시지만, 마법은 그런 게 아니라 재 능과 뼈를 깎는 수련이었으니까.

난 내가 빈민가의 작은 학교에라 도 다닐 수 있는 돈을 다 세렉에게 쏟아부었다. 나는 엄청나게 머리가 좋다는 소리야 많이 들었지만, 내가 뭘 배운다고 해도 출신이 비천하니 출세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게 뻔 했다.

세렉은 도통 마법의 공식을 제대 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걸 내가 다 일일이 가르쳤다. 왜 그렇게 쉬 운 것을 이해하지 못할까 싶었지만,

마력을 다루는 것은 잘했으니까 그 걸로 됐다.

하지만 세렉은 재능이 뛰어난 만 큼 마법을 쓰는 데 반동이 대단했 다. 그것을 마법사들은 ‘부효과’라고 불렀다. 보통 귀족 집안에서는 그러 면 반동을 치료하는 알약을 사 먹는 다는데, 세렉은 그럴 형편이 아니었 다.

온몸에 울긋불긋한 종기가 나기도 했고, 고열로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언젠가 한번은 시력을 잃어버리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매번 세렉을 낫 게 했다. 말했지만, 나에겐 마법의 재능이라곤 밤톨만큼도 없었다. 하

지만 세렉을 낫게 하겠다는 의지 하 나로 마법의 파훼를 독학했다. 세렉 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 기에.

그 결과, 지금 내 몸에는 목 뒤에 서부터 등, 팔의 윗부분까지 마법을 무효로 하는 마법진이 새겨져 있다. 머리로 계산하는 거야 달리 쓸데없 는 이 머리를 풀가동하면 대충 짜 맞출 수 있었지만, 무효화라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니까.

중고 상점에 굴러다니는 고서적에 서 발견한 진이었다. 몸에 마법 진 을 새긴다는 것은 인체에 어떤 해를 끼칠지 모르는 일이며, 죽음에 이를

수도 있는 금기 중의 금기라고 했지 만, 일자무식한 길거리 인생에게 금 기란 중요치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어마어마한 부작용 을 가져왔지만, 결국 성공했다.

모든 걸 내 몸에 새겨 두었더니, 접촉해야만 그 파훼 진들이 발동했 다.

내 손을 붙들면 세렉은 열에 지 쳐 헛소리를 떠들다가도 정신을 차 리곤 했고, 전혀 앞이 보이지 않아 헤매다가도 내가 며칠이고 옆에서 밤을 새우며 간호하면 눈을 뜨곤 했 다.

어떤 날은 출세의 관문이라며 공 격 마법 같은 것을 무리하게 연습하 다가, 정신을 놓고 나를 때리기도 했다. 그리고 어떤 날은…… 내게 키스하기도 했다.

나는 그 순간을 떠올리곤 나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처음부터 내가 좋아서 한 건 아 니었겠지만, 그래도…… 지금은 세 렉에게 나뿐이니까. 지금 와서 생각 하면 모든 순간이 우리의 운명을 이 어 주는 시간이었으리라.

“……아냐. 세렉은, 그럴 사람 아

니야.”

“자기는 진짜, 어쩌려고 그래.”

르베르티티가 한숨을 거하게 쉬며 깨끗해진 팔을 이리저리 돌려 보았 다. 그러곤 동화를 한 닢 내게 내밀 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결혼도 하기로 했는걸.”

작게 속삭이는 말에 천막을 걷으 려던 그녀가 나를 홱 돌아보았다. 꿈을 꾸는 듯한 내 눈빛을 봤을까? 르베르티티는 으아, 하는 이상한 소 리를 내며 화를 내더니 이마를 짚었 다.

“잘 들어, 자기. 내가 진짜…… 이런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응?”

“세렉은 이미 세렝게반이 아니야. 헌신하면 헌신짝 된다는 말, 몰라? 10년이나 자기 삶 안 살고 모든 걸 세렉한테 갖다 바친 건 알겠는데, 세렉은 이미 마법 장교잖아. 여자가 한 트럭이라고.”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세렉에겐 나뿐이야.”

“가 봐, 그러면.”

“ 어?”

“연구소 뒤뜰에서 지금쯤 질펀하 게 놀아나고 있을 테니까. 그런 사 람하고 결혼할 수 있어?”

나는 르베르티티도 좋아했다. 그 녀의 말도 믿고 싶었다. 하지만 세 렉도 믿었다. 세렉이 그럴 리가 없 었다. 왜냐하면, 세렉은 나를 사랑하 니까. 온몸이 아파서 내게로 달려올 때마다 내게 사랑한다고 늘 속삭였 으니까. 누구보다도 나를 원한다고 했으니까. 병이 났을 때만 내게 키 스했지만, 그것은 평소에는 부끄러 워서 하지 못하기 때문이었을 테니 까……스

하지만 르베르티티의 안타까운 듯 한 눈빛에 등을 떠밀렸다.

믿기 위해서였다. 의심해서가 아 니라, 믿기 위해서 가는 거다.

앞치마를 벗어 놓고 천막을 나섰 다. 가는 길에 연구소라는 멋진 곳 에 가기에는 내 차림이 너무 초라하 다는 생각이 들어 집에 들렀다. 남 동생은 몸이 좋지 않아서 여전히 자 고 있었다.

평소에 잘 입지 않는 제일 좋은 원피스를 꺼내 입었다. 더러운 뒷골 목에서 입었다간 하루 만에 시커먼 꼴이 될 것이 틀림없어서 넣어 두기 만 했던 흰색 공단 원피스였다. 이 런 뒷골목에 있는 더러운 내 가게에 도, 소문을 신경 써서 몰래 들르는 귀족 나리들이 있었다. 그들 중 한 명이 주고 간 옷이었다.

나는 그걸 입고 빙글빙글 돌아 보곤 쑥스러워 씩 웃었다. 새빨간 머리칼도 하나로 잘 정리해서 땋았 다. 얼굴도 깨끗한 물로 세수하곤 옆 천막에서 만들어 파는 냄새가 좋 은 싸구려 크림까지 발랐다.

세렉을 만날 때는 부러 조금이라 도 신경을 쓰려고 했지만, 이렇게까 지 꾸미는 것은 잘 없는 일이었다.

가는 길에 세렉이 좋아하는 골디 나 무화과도 다섯 알 사서 종이 꾸 러미에 들었다.

연구실이 있는 길은, 빈민가와는 명백히 구분되는 새하얀 돌이 바닥

에 깔리고 수로까지 정비된 번화가 구역이었다. 나는 부지런히 걸어 그 하얀 돌담 앞에 도달했다.

세렉은 내가 여기에 오는 것을 좋아할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세렉에게 미안해서 연구실로 직접 찾아오는 것은 처음이었다. 어쩐지 이런 하찮은 지인…… 아니, 연인이 있다고 알려지면 미안하니까.

그래도 어차피 결혼할 사이인걸.

연구소 앞에는 새파란 제복에 높 은 모자를 쓴 기사 나리들이 서 있 었다. 그들은 대번에 내가 못사는 아이라는 걸 알아봤겠지만, 과연 마 법을 수호하는 건물이라 그런지 그

런 이유로 나를 쫓아내지는 않았다.

창을 든 기사 하나가 내게 물었 다.

“무슨 일이지, 꼬마야?”

“전 꼬마가 아니에요.”

“그래. 그래서 무슨 일이지?”

“세렉을 만나러 왔어요.”

문지기 둘은 시선을 교환했다.

“설마 세렉 장교님을 말하는 건 아니겠지?”

왜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거지? 내 가 여기 어울리지 않는 건 맞지만, 난 엄연한 세렉의 연인인데.

“맞아요. 저랑 장교님은 곧 결혼 할 사이니까요.”

“세렉 장교님하고 결혼? 하, 이 꼬맹이도 그런 소릴 하는군. 이봐, 꼬마. 장교님이 워낙 인기가 많긴 하지만……;

창을 든 쪽이 어이가 없다는 표 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세렉 장교님은 애를 가진 약혼자 가 있으시다고. 어처구니없는 소리 그만하고 돌아가.”

“……네?”

어처구니가 없는 쪽은 나였다.

내가 딱딱하게 굳어 있기만 하자, 그들은 내가 충격을 받았다고 생각 한 것 같았다. 아니면 내가 현실을 자각하고 세렉에 대한 선망을 거뒀 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르지.

문지기들은 손을 저었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돌아가지 그래. 애먼 꼬마에게 창을 휘두르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래그래, 썩 돌아가. 연구소 나 리들은 주위가 소란해지면 민감하게 군다고.”

농담을 하는 거라고 생각해 봤지 만, 이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는 기

사 나리가 그런 재치 넘치는 위험한 농담을 하고 있다고는 생각하기 어 려웠다.

“날 들어가게 해 줘요. 난 세렉의 둘도 없는 친구니까.”

‘연인’이라는 단어를 택하지 않은 것은 그 와중에도 ‘애를 가진 약혼 자’라는 단어가 어지간히 마음에 걸 렸기 때문이다.

“아니, 이 꼬마가. 그런 소리를 하는 게 아니야. 장교님을 이름으로 함부로 부르다간 큰코다쳐! 그러니 썩 꺼져!”

문지기들은 좋게 쳐 줘도 번지르

르한 가문의 사람 같아 보이지 않는 내가 세렉을 찾는 것이 마뜩잖은지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만 나는 허리에 손을 짚고 그들을 노려봤다.

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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