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그간 참은 것
“사실은…… 그거 다 엄마 카드로 결제한 거거든……? 내 몸 좀 편해 보자고…….”
“뭐야. 그러면서 첫 선물이라고 생색낸 거야?”
도진이 실망했다는 듯이 말하자, 선아는 핑곗거릴 늘어놓으면 횡설수설했다.
“국산 차 조그만 거 하나 샀다고 통장이 텅장 돼버린 걸 어떻게 해……. 그나저나 선배, 키보드에 40만 원은 아닌 거 같아. 내가 소설 같은 거 쓰는 사람도 아니고. 아니 소설 쓰는 사람이라도 40만 원짜리 키보드는 안 쓰겠다. 나는 3만 원짜리 키보드면 충분하니-”
도진은 선아의 말을 흘려들으며 결제 버튼을 눌렀다. 핸드폰에 결제가 승인되었다는 메시지가 뜨자 선아가 빽 소리를 질렀다.
“아아악! 아니 그걸 왜 결제해? 검은색 키보드잖아. 난 검은색보다 흰색이 더 맘에 들었단 말이야. 선배, 빨리 주문 목록 들어가서 옵션 변경해. 검은색 취소하고 흰색으로 사라고!”
선아의 채근에 도진은 주문상품 옵션으로 들어가 키보드 색상을 변경했다.
“어휴, 준다니까 받긴 받는데…… 선배가 부자니까 받긴 받지만…….”
“뭐 더 필요한 거 있어?”
“더 필요한 거?”
“일단 키보드 손목 받침대인가 그거부터 하나 사고. 발 받침대도 필요하지? 식탁이 높아서 의자를 올리니 바닥에 발이 안 닿는다면서.”
“그렇지……? 필요하긴 하지……?”
“이리 와봐. 그것부터 고르자.”
도진은 선아를 옆에 앉혀놓고 재택근무 준비물이라는 핑계로 그녀에게 필요한 것들을 하나하나 사주었다.
“선배. 근데 키보드 손목 받침대는 선배 것도 하나 더 사. 그거 있으면 은근히 편하대.”
도진이 키보드 손목 받침대를 사자, 선아는 그 옆에서 마우스 패드처럼 자잘한 물건들을 골랐다.
“선배, 나는 분홍색 마우스 패드 살 건데. 선배도 하나 골라봐. 이건 5천 원밖에 안 하니까 이번엔 진짜 내 돈으로 사줄게.”
“그럼 나는 하늘색.”
“분홍이랑 하늘색 나란히 놓으면 이쁘겠다. 그러고 보니 이게 우리 첫 커플 템이네?”
그들은 그렇게 서로에게 필요한 것들을 사주면서 시간을 보냈다.
사다 보니 키보드뿐 아니라 노트북 받침대, 키보드, 키보드 손목 받침대, 선아가 쓸 책상 발 받침대부터 텀블러, 실내용 슬리퍼에 책상용 미니 선풍기까지 샀다.
둘이 함께 재택근무를 하다 보니 모두다 두 개씩 사게 되었는데, 선아의 말대로 그게 꼭 커플 아이템을 맞춘 것만 같았다.
“선아야. 방석은 안 필요해? 여기 보니까 메모리폼 방석이 편한데…….”
언제부터인지 도진이 더 신이 난 듯 인터넷 쇼핑을 하자, 선아가 말리는 형국이 되어버렸다.
“저기 근데 선배…… 선배가 돈을 쓰고 싶은 거 같아서 말리진 않겠는데…… 우리 이러다가 선배 집에 사무실 차리게 생겼어…….”
“방석까지만 사고. 아, 간식도 사놔야겠구나. 너 코코아 좋아하지. 코코아랑 커피랑…….”
“저기 선배…… 그런 건 나중에 천천히…….”
선아의 만류에도 도진은 그녀가 좋아할 만한 것들을 장바구니에 모두 담아 결제했다.
첫 번째 삶에서 가난했던 류도진이 아내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8천 원짜리 운동화에 튼살 크림 같은 것이 전부였고, 고작 그것들을 산다고 대리운전을 하러 다녀 선아의 마음을 아프게 했었다.
그때 해주지 못한 모든 걸 선아에게 주고 싶었다.
현재의 도진은 그때보다 많은 걸 갖고 있었고, 또 많은 것을 이루어 갈 터였다.
그랬기에 그때 아내에게 주지 못한 것들을 이렇게라도 주고 싶었다.
주고 싶은 건 비단 물건만이 아니었다. 선아가 장난치듯 오늘부터 1일이라 연애 선언을 했지만, 도진은 선아의 그 선언을 물러줄 마음이 없었다. 죽을 뻔했다가 살아난 후로 마음이 변했다.
첫 번째 삶에서 부부로 함께한 둘에게 주어졌던 시간은 1년이 채 되지 않는다.
장난 같은 선언으로 연애가 시작되었지만, 선아의 장난을 절대로 물러주지 않고 1년, 2년, 3년, 5년, 10년. 아주아주 긴 시간 동안 제 모든 것을 그녀에게 줄 것이다.
“선배, 그러면 내일부터 선배 집으로 출근할게. 오늘 산 거 모레쯤 배송 올 테니까 그때 자리 세팅한 후에 본격적으로 일 시작하자.”
“그럼 내일은 놀잔 거야?”
“응. 그게 재택근무의 매력 아니야? 적당히 땡땡이도 치고 놀기도 놀고. 내일은 연애 2일째 되는 날이니까 우리가 서로에 대해서 알아가는 시간을 갖고…….”
세 번에 이르는 삶 동안 두 번의 결혼 생활을 했지만, 연애 경험도 두 번이 전부인 터라 선아는 연애 미숙자였다. 그랬기에 이렇게 어설프게 연애를 선언하고 서로를 알아가자는 둥 하는 이상한 소릴 하는 것이다.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시간을 갖자니, 그거 좀 음흉한 말로 들리는데…….”
도진은 소파 한쪽에 놓인 쿠션을 들어 선아와 자신의 사이에 놓았다. 선아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소파 가운데 올라온 쿠션을 바라보았다.
“이 쿠션 무슨 의미야? 설마 내가 그렇고 그런 거 생각한 줄 알고 내외하는 거야?”
선아는 쿠션을 집어 방바닥에 던져버리고 빽 소리쳤다.
“저기요, 류도진 씨. 류도진 씨가 매우 매우 잘생겨서 솔직히 동아리 첫인사 때 좀 관심이 가긴 했지만, 보기 좋은 떡이라고 생각해서 그쪽 상대로 이상한 생각한 적 한 번도 없거든요?”
“정말?”
“……아니 뭐. 솔직히 ‘아, 저 선배 잘생겼다. 한번 꼬셔보자.’ 생각은 하긴 했지만, 선배가 엄청 철벽 쳤잖아. 술자리 한 번 참석 안 하고.”
“아……. 꼬실 생각은 하긴 했구나…….”
“아니,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마케팅 동아리 여자애들 다 선배한테 눈독 들였었거든?”
“그래서 그때 내가 철벽 안 쳤으면 나랑 사귀었을 거란 말이야?”
“아……. 그만 이야기하자. 나 선배한테 좀 말로 말리는 거 같아. 그만 말할래.”
첫 번째 삶에서는 그렇게 서로 첫눈에 반해 번갯불에 콩을 구워 먹듯 연애를 시작하고 이른 나이에 부모가 되었었다.
두 번째 삶부터 어긋나긴 했지만, 그들은 마주칠 때마다 그렇게 서로에게 반했었다. 그러니 지금의 이 자리가 두 사람이 원래 있어야 할 자리였다.
“그보다 연애 2일째부터 서로에 대해 알아가자 한 게 무슨 뜻인지나 설명해줘.”
“그건 말이야. 선배랑 나랑 지난번 삶부터 서로 알던 사이긴 했지만, 아까도 말했다시피 선배가 무지무지 철벽을 쳐서 나는 선배에 대해서 아는 게 별로 없잖아?”
“그래?”
“응. 지난 삶에선 세빈이 키우느라 선배가 주는 관심을 고맙게 받긴 했어도, 선배에 대해서 알아갈 여력이 없어서 솔직히 선배랑 선배 형들이랑 나이 차이가 정확히 몇 살이 나는지도 이번 삶에서 알게 된 거야.”
“그랬구나.”
“응. 그랬어. 그래서 연애를 시작한 김에 선배가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가고 싶은 여행지 같은 건 있는지, 그런 기본 사항을 알고 싶다고.”
그와 반대로 도진은 선아에 대한 거라면 무엇이든 기억하고 있었다.
선아가 초콜릿 우유를 좋아한다는 것, 함께 가본 적은 없지만, 밤바다 드라이브를 가보는 게 소원이고, 또 머리를 쓰다듬는 걸 좋아한다는 사실 같은 것들 말이다.
지금 삶의 선아가 들으면 깜짝 놀라겠지만, 그녀가 잘 때 오른쪽으로 누워 잔다는 것까지도 도진은 알고 있었다.
도진은 아내에 관한 기억이라면 단 하나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홀로 사랑을 간직해왔다.
“좋아하는 음식은 갈비찜인데, 갈비로 한 갈비찜이 아니라 돼지고기 뒷다릿살로 한 갈비찜을 좋아해.”
“그게 무슨 갈비찜이야. 그냥 돼지고기찜이지.”
“갈비양념으로 하면 갈비찜 맛이 나잖아.”
“아, 그래?”
“응. 그렇게 해 먹으면 진짜 맛있어. 내일 일찍 오면 해줄게.”
“응. 일단 돼지고기 뒷다릿살로 한 갈비찜. 기억해놓을게.”
“그리고 가보고 싶은 곳은 새벽 시장. 지금 재개발하는 동네에 작은 새벽 시장 있거든. 거기 한번 가보고 싶어.”
생각지도 못한 구체적인 답에 선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무슨 그렇게까지 구체적인 기호를 갖고 있어?”
도진은 오른손을 선아의 정수리에 올리고 그녀의 머리를 흩트렸다.
“자세히 말해줘도 불만스러워하네?”
“아니, 뭐. 그런 건 아니고…….”
그사이 해가 완전히 저물었다.
재택근무 시간은 업무 시간과 똑같이 오후 6시까지였지만, 선아는 저녁 8시까지 있다가 해가 완전히 지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진은 선아를 지하 주차장까지 마중했다. 선아가 절뚝이는 다리로 굳이 배웅해주지 않아도 된다고 한사코 거절했지만, 도진은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와 선아가 차에 오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잘 가.”
“내일 봐, 선배.”
선아가 운전석에 오르고 차 문을 닫았다. 도진이 돌아서려는데 운전석 창문이 내려갔다. 지이잉, 창문이 내려가는 소리에 도진은 운전석 쪽을 바라보았다.
“왜? 뭐 잊은 거 없어?”
도진이 선아를 향해 물었다. 그러자 선아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아니……. 뭐 잊은 게 있는 건 아니고.”
선아는 그렇게 말하다 말고 입술을 모아 앞으로 쭉 내밀었다. 기왕 연애하기로 했으니 도장 한번 꾹 찍어놓을 심산이었다.
그 모습에 도진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윤선아. 네가 말했다시피 우리 오늘 1일이야. 이렇게 한꺼번에 진도 빼는 경우가 어딨어.”
“그래서 안 하려고? 안 할 거야? 내가 입술 이렇게 내밀고 있는데?”
기왕 하는 연애, 정말로 연애다운 연애를 하고 싶어 선아는 용기를 내었다. 실은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오랫동안 지인으로 살며 지켜왔던 선을 절대로 넘지 못할 것만 같았다.
도진은 허릴 숙여 선아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쪽.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선아는 얼굴이 붉어진 채 그에게 닿았던 입술을 말아 물었다가 놓았다.
막상 도진에게 마음을 허락하고 나니 지나치게 가슴 속이 간질거렸다.
“선배처럼 점잖은 사람이랑 연애하려면 나라도 이렇게 분발해야지.”
점잖은 사람이라…… 아마도 선아는 평생 모를 것이다. 첫 번째 삶에서 우리 둘이 어땠는지. 눈만 마주치면 두 사람은 마른 장작에 불이 붙듯이 훨훨 타올랐다. 그래서 하룻밤에 여섯 번-
“선배!”
선아의 부름에 정신이 든 도진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응?”
“한 발짝만 뒤로 가줘. 선배가 차에 바짝 붙어 있어서 출발을 못 하겠어.”
“아, 응.”
도진이 한 발짝 물러났다. 선아는 도진을 향해 손을 한 번 더 흔들고 창문을 닫았다.
선아가 탄 차가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도진은 그녀의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한참을 제 자리에 서 있다가 뒤돌아 집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엘리베이터의 투명한 창을 통해 도시의 야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도로를 따라 이어지는 붉은 빛 중의 하나가 집으로 향하는 선아의 차일 터였다.
도시의 네온사인 위로 여름밤이 깊어져만 갔다.
그녀를 잃고 맞이했던 수천 일의 밤. 그 무수한 밤마다 선아에 대한 기억은 도진의 가슴을 파고들어 통증을 자아냈다.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선아를 사랑하면서도, 그녀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그녀가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는 걸 지켜본 적도 있었다.
실은 그 또한 방관자였다.
그 사실을 깨달은 이후 무수히 많은 밤을 지나 여기까지 왔다.
신의 안배로 그녀가 다시 제게로 왔다.
이제는 그녀를 행복하게 해줄 유일한 이가 자신임을 믿는다.
다시는 볕이 들지 않을 것 같던 그의 삶에서도 어둠이 걷히기 시작했다. 까마득한 어둠의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날이 밝으면 저 길을 따라 선아가 제게로 올 터였다.
이제는 기쁘게 그녀를 맞이하리라. 함께 하는 이 삶에 감사하리라.
그것이 세 번이나 반복된 삶의 소명임을, 도진은 이제서야 알 것 같았다.
〈파고드는 밤〉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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