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보여줘
“그래서 그 의자는 언제 오는데?”
“오늘 중으로 온다고 했는데, 아직 안 왔네. 오후나 돼야 오려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딩동,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
줄곧 창가 앞을 서성이던 선아가 쏜살같이 현관 앞으로 향했다.
문을 여니 택배기사가 커다란 박스 두 개를 문 앞에 내려놓고 있었다.
선아는 택배기사를 도와 박스 두 개를 집 안에 들여놓았다.
선아의 몸만 한 커다란 박스에는 국내 유명 사무용 가구 회사의 로고가 큼지막하게 그려져 있었다.
“근데 왜 두 개야?”
“선배 것도 샀는데?”
“나는 컴퓨터 방에 의자 있는데?”
“컴퓨터 방에서 일하게?”
“뭐 딱히 어디서 일하겠다고 정한 건 아니지만.”
“그럼 나랑 같이 식탁에서 일해. 어차피 개인 컴퓨터로 인트라넷 접속 못 하잖아.”
선아는 현관 근처에 놓인 박스를 뜯기 시작했다.
박스 안에서 의자 바퀴와 몸통이 각각 모습을 드러냈다. 하얀색 프레임에 시트와 등받이는 각각 베이지색인 제품으로 도진의 집 세라믹 식탁과도 잘 어울리는 의자였다.
선아는 박스 안에서 꺼낸 의자 바퀴를 내려놓고, 차근차근 설명서를 읽었다.
“바퀴에 중심 봉을 끼우고, 그 위에 의자 좌판을 올린다…….”
설명서를 내려놓은 그녀는 바퀴 가운데 동그란 자리에 원통형 모양의 중심 봉을 끼웠다.
의자 몸통을 중심 봉에 끼워 넣기만 하면 되지만, 생각보다도 의자 몸통이 무거웠다. 선아가 의자 몸통 부분을 들고 중심 봉에 맞춘다고 낑낑거리자 보다 못한 도진이 일어났다.
“엇, 아냐, 선배는 그냥 앉아 있어. 환자잖아.”
“됐어. 그 정도는 들 수 있어.”
다리를 쩔뚝이긴 했지만, 몸을 못 쓸 정도는 아니었다.
도진은 선아에게서 받아 든 의자 몸통을 중심 봉에 가져다 댔다.
“봉만 잡아줘. 밀리지 않게.”
“아, 응.”
선아가 의자 바퀴를 잡아 의자 몸통 홈에 중심 봉을 가져다 대자 도진은 몸통을 봉에 끼워 넣었다.
그의 도움으로 어렵지 않게 의자 조립을 마쳤다. 헤드레스트는 가벼워서 선아 혼자서도 뚝딱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의자 두 개를 모두 조립한 선아는 바퀴 달린 의자를 굴려 식탁으로 가져갔다. 식탁 끝자리에 마주 보는 위치로 의사를 하나씩 두니 원래 이 집의 일부인 것처럼 잘 어울렸다.
“여기가 내 자리 찜.”
그녀는 싱크대에서 가까운 안쪽 자리를 선점하고 차에서 가져온 업무용 노트북을 꺼내두었다. 그렇게 도진의 집 안에 선아의 자리가 생겼다.
도진도 그동안 손대지 않았던 노트북 가방을 들고 식탁 앞으로 갔다. 선아의 맞은편 자리에 노트북 가방을 올려두니 그 앞에 앉아 의자 높이를 조절하던 선아가 고갤 갸웃거렸다.
“식탁에서 일하려니까 생각만큼 편하진 않네.”
“식탁이 책상보다 7cm가량 높대. 그러니 책상보다는 불편하겠지.”
“아, 어쩐지…… 식탁 높이에 맞춰서 의자 높이 조정하고 나니까 바닥에 발이 안 닿더라고.”
선아는 노트북을 꺼내 펼치는 도진을 바라보며 슬쩍 말을 붙였다.
“선배, 엄마랑 아저씨 이혼했다?”
“그래?”
“꼭 그럴 줄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말하네?”
“그렇다기보다 너랑 정희진이 삼각관계로 엮인 순간부터 헤어지는 건 정해진 일이었지.”
“하긴. 그런 일까지 있었는데 가족으로 사는 게 더 이상하지?”
“응.”
“근데 나는 가족이 그렇게 쉽게 헤어질 수 있다는 거에 깜짝 놀랐어. 엄마랑 아빠, 아니 아저씨는 찐사랑이라고 생각했었거든.”
도진은 선아의 말에 다른 말을 덧붙이진 않았지만, 진짜 사랑이 아니었기에 헤어진 거라고 생각했다.
정말로 사랑했다면 그렇게 헤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도진만 하더라도 세 번 삶 동안이나 선아의 곁을 맴돌고 있으니 말이다.
그들은 헤어질 수 있을 만큼만 서로를 사랑했던 거다. 그저 그만큼, 헤어질 수 있을 만큼만 좋아했던 것이다.
“선배. 전에 나보고 아빠, 아니 그분 믿지 말라고 했잖아. 혹시 이전 삶에서 무슨 일이 더 있었어? 희진이 일을 도왔다거나…….”
도진은 고개를 저었다. 이전 삶에서 정희진의 죄가 밝혀진 이후에 성구의 행적에 대해 아는 바는 아무것도 없었다.
희진이 청부 살인할 때 쓴 돈은 성구에게서 나온 것이었지만, 무인 카페를 창업하기 위한 투자금으로 밝혀졌고, 성구에 대한 수사도 혐의없음으로 종결되었다.
“근데 선배는 왜 아저씨 믿지 말라고 한 거야?”
“이전 삶에서도 정성구 그 남자는 전형적인 방관자였어. 아마 모든 사실을 다 알았더라도 그 사람 성격이라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거야.”
기회주의자들은 제게 득이 될 게 없으면 움직이지 않고, 알고 있는 사실조차도 침묵한다.
그러다 결국에 힘의 균형이 깨어지는 순간 선택을 하는 게 기회주의자들의 특성이었다.
그런 이들은 사과 상자에 담긴 썩은 사과 같은 존재였다. 아주 조금 썩은 상태라도 썩은 사과는 결국 상자 안의 모든 사과를 썩게 만든다.
기회주의자가 부모이든 친구이든 간에 결국은 그런 이의 옆에 있는 이들은 불행해지고 만다.
“전에 엄마가 해준 말인데, 어떤 결정은 한번 잘못하고 나면 다시는 돌릴 수가 없대. 그래서 사람을 신중하게 만나야 한다고 그랬거든…….”
실상 그런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아는 엄마를 대단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세상에는 사랑에 눈이 멀어서 제 배로 낳은 어린 자식마저도 나 몰라라 하는 엄마들이 많은데, 현숙은 제 자식에게 해가 되었다고 판단하자마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성구를 버렸다.
“난 이번에 우리 엄마가 진짜 대단하다고 느낀 게…… 그렇게 아저씨를 좋아했어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헤어지더라고.”
“너였어도 그랬을 거야.”
선아는 고개를 저어 도진의 말을 부정했다.
“아니, 난 그렇지 못했어. 정희진, 이재혁 두 사람의 외도를 알았을 때 제일 먼저 든 생각이 뭔지 알아? 가정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었어.”
“…….”
“세빈이한테 아빠를 빼앗으면 안 돼서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면 나야말로 닥쳐올 변화가 두려웠는지 몰라. 게다가 결국 헤어지기로 해놓고도 어설프게 움직여서 살해나 당했잖아, 바보같이.”
“비약이야.”
“비약이지? 근데 선배, 이제 나 어떡하냐.”
“?”
“나도 결혼 생활 실패했지, 엄마도 실패했지……. 이제는 무서워서 누구도 못 만날 거 같아. 겉으로 보기엔 좋은 사람인지 아닌지 판가름이 안 되잖아.”
선아는 펼쳐놓은 노트북을 덮고, 맞은편에 앉은 도진을 응시했다.
“그래서 말인데 선배.”
“?”
“선배 그때 했던 고백이 아직 유효한 거면 우리 만나보지 않을래?”
“!”
도진은 그게 무슨 황당무계한 소리냔 듯 선아를 바라볼 뿐이었다.
“뭐야. 죽을 뻔하다 깨어나더니 이제 나 싫어?”
싫으냔 말에 도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행히 싫어진 건 아니란 뜻이네? 그럼 오늘부터 우리 1일 하자.”
“뭐?”
“오늘부터 우리 1일! 땅땅땅!”
중고등학생도 하지 않을 법한 연애 선언이었다.
선아는 의자 등받이에 기대앉아 또다시 핸드폰을 하기 시작했다.
도진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그녀를 바라봤다.
선아와 연애를 하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에 갑작스러운 연애 선언도 황당하지만, 이제부터 1일이라 선언한 이후 쳐다도 보지 않고 핸드폰을 하는 건 너무한 거 아닌가.
“선배.”
잠시 후, 선아가 침묵을 깨고 도진을 불렀다.
“응.”
“노트북 받침대 사줄까?”
“노트북 받침대?”
“아무래도 여기서 일하려면 노트북 받침대랑 키보드, 키보드 손목 받침대 이런 게 필요할 거 같아. 식탁에서 일하다가 몸 다 망가질 거 같아서.”
현재 그녀 나이가 스물다섯 살밖에 안 되었고, 길바닥에서 자고 일어나도 몸이 개운할 나이지만, 나이를 먹었었던 경험이 어디 가는 건 아니었다. 선아는 몸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들엔 돈을 아끼지 않는 편이었다.
“어차피 선배도 회사 일 하려면 인트라넷 로그인되는 회사 노트북으로 해야 하잖아.”
“응.”
“노트북 받침대 있으면 훨씬 일하기 편하대. 그러니까 선배 것도 하나 살게.”
“내 것도?”
“응. 남친 첫 선물.”
그 말에 도진이 픽 웃어버렸다.
부부로 살 적 어린 나이에 부모가 될 준비를 하던 두 사람은 서로에게 변변찮은 선물 하나를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세 번째 삶은 어떤가.
이미 두 번 살아본바, 그는 두 번의 삶을 살아오면서 겪었던 시행착오까지 모두 포함해 더 많은 걸 이루어 가고 있었다.
게다가 두 번째 삶의 기억으로 내년 즈음 가치가 천정부지로 치솟는 코인에 빅터 계약금 일부를 투자해두었다.
두 번의 인생 경험을 허투루 쓰지 않은 덕에 이제는 첫 번째 삶과는 완전히 다른 삶이 되었고, 두 번째 삶보다도 더 큰 부를 손에 쥐게 될 것이다.
선아에게 더 많은 걸 해줄 수 있게 되었다.
“선아야, 키보드랑 손목 받침대도 산다고 했지?”
“응.”
“그건 내가 고를게.”
도진은 핸드폰을 놓아둔 소파로 자리를 이동했다.
“선배가? 뭐로 살 건데? 같이 보고 고르자.”
식탁 앞에 앉아 있던 선아가 그를 따라 거실 소파로 왔다.
도진이 소파에 앉자 선아가 옆자리에 앉아 그의 어깨에 뺨을 붙여왔다.
“뭐로 고를 거야? 보여줘.”
도진은 선아 뺨에서 이는 체온을 의식한 채, 쓸 만하다 싶은 키보드를 검색했다.
선아는 그가 고른 키보드를 보고는 빽 소리를 질렀다.
“40만 원? 아니, 무슨 키보드가 40만 원이나 해? ESC 키를 순금으로 만들어서 박아놓은 것도 아니고…….”
“손가락에 무리가 덜 간대. 앞으로 문서지원 열심히 하려면 이 정도는 써야지.”
연애 첫 선물로 노트북 받침대를 받았으니 그에 상응하는 선물을 하고 싶었다.
도진은 키보드 두 개를 장바구니에 담아 결제 페이지로 넘어갔다.
“아니, 손가락에 무리가 갈 정도로 나 부려 먹으려고 한 거야?”
“너야말로 열과 성을 다해 재택근무하려고 의자에 노트북 받침대까지 산 거 아니야?”
“사실은…… 그거 다 엄마 카드로 결제한 거거든……? 내 몸 좀 편해 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