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단둘이
재혁의 증언에 따라 추가 증인 조사가 진행되었다.
출두 연락을 받은 성구는 50분의 짧은 조사를 마치고 검찰청 앞으로 나왔다.
유독 하늘이 맑고 파란 초여름이었다. 성구는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요즘 성구는 희진의 요양원 인근에 달방을 얻어서 지내고 있었다.
희진은 수원에 있는 요양시설에 들어갔다. 말이 요양시설이지 실상은 정신병원이었다. 안정제를 맞지 않고서는 계속해서 자해시도를 하기에 일반 병원에서는 희진을 보살필 수 없다고 했다.
안정제 부작용으로 발작하는 희진 때문에 거의 날마다 핸드폰이 울렸다.
처음엔 희진을 이렇게 만든 재혁에게 분노했지만, 오랜 병간호에 지친 성구는 이제 딸도 원망하기 시작했다.
겨우 남자 하나 때문에 미쳐버리다니……. 희진의 뒷바라지를 하는 게 점점 힘에 부치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 검찰청 조사를 받고 나오니 숨이 꽉 막혔다.
‘이재혁 씨에게 윤선아 씨와 류도진 군이 사귄다고 말한 사실이 있습니까?’
이재혁의 집에 방문했던 것이 인근의 방범 CCTV를 통해 확인되었고, 이재혁의 아버지까지 나서서 성구가 재혁을 부추긴 거라고 증언했다고 한다.
‘저는 그런 적 없습니다. 그 집에 찾아갔던 것은 이재혁에 대해 따질 것이 있어서였습니다. 사기 혐의로 구속된 이재혁은 윤선아와 결혼 준비를 하면서 제 딸을 만나왔습니다. 그 와중에 제 딸을 임신시키고 결국엔 책임지지 않은 채 폭언을 퍼붓고 버렸습니다. 그 과정에서 딸은 자해를 시도하여 현재는 요양시설에 입원 중입니다. 이 사실이 분통하고 원통하여 찾아간 것이지, 이재혁의 화를 부추길 만한 어떤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조사를 받으면서 성구는 재혁의 주장을 모두 부인했다.
사실 검찰청에 출두하기 전, 성구는 현숙에게 이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조언을 구했다.
법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그는 검찰청에서 온 소환 연락이 두려웠다. 정말로 자신이 이재혁을 도발한 일 때문에 사고가 벌어진 거라면 자신 또한 처벌받는지 알 길이 없었다.
현숙은 혐의를 부인하라고 조언했다. 이재혁이 계획적으로 벌인 일이라고 몰아가고 있으니, 재혁을 도발한 적이 없다고 말하라면서 다른 말을 덧붙였다.
‘성구 씨. 우리는 이제 헤어져야 할 거 같지?’
‘…….’
성구는 무어라 대답할 수 없었다. 현숙에 대한 마음만은 진심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성구 씨가 희진이랑 재혁이의 관계를 몰랐다는 걸 믿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찝찝했었거든.’
남들 앞에선 성구의 체면을 살려주겠다고 높임말을 섞어 쓰는 그녀였지만, 속에 있는 진솔한 말을 꺼낼 땐 이렇게 편안한 어투가 되었다.
‘이번에 성구 씨가 재혁이를 찾아갔었단 말을 듣고, 그간 왜 그렇게 찝찝했는지 알 것 같아.’
제게 말을 걸어오는 현숙을 보면서 성구는 자신의 늦은 사랑이 끝을 향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사실 성구는 그전부터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이 망가지고 있음을 눈치채고 있었다.
선아와 재혁의 파혼으로 인해 희진이와 재혁의 관계가 드러나는 그 순간부터 말이다.
‘희진이 일은 안타깝게 생각해. 그렇지만 누군가를 충동질해서 싸움 붙이는 거 그거야말로 정말 나쁜 짓이었어. 결국은 성구 씨 손은 움직이지 않고 이재혁이 자멸하긴 바란 거잖아.’
‘…….’
‘이번 일을 지켜보면서 나는 혹시 성구 씨가 희진이와 재혁이 사이를 알고 둘 사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하지 않았나. 그래서 선아와 재혁이가 잘돼서 이참에 희진이와 재혁이 사이가 정리되길 바란 게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어.’
성구는 그녀의 말 앞에서 속이 뜨끔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성구 씨, 내가 당신과 함께 살면서 느낀 건데, 성구 씨 일부러 희진이 자극할 때 선아 이용하곤 했잖아. 선아처럼 똑 부러져 봐라, 하면서 말이야. 나는 그때마다 희진이가 참 안쓰러웠었거든.’
철없어 보이는 가면을 쓰고 있지만, 현숙은 종종 이렇게 통찰력 있게 사람을 보곤 했다.
사업을 하며 여러 사람을 만난 까닭이리라.
‘나는 성구 씨의 그런 방식이 희진이를 벼랑으로 밀었고, 결국은 재혁이마저 류 팀장을 들이받게 하면서 모두를 안 좋은 길로 이끌었다고 생각해.’
‘…….’
‘성구 씨. 그런 태도는 방관보다도 더 옳지 않아. 성구 씨에겐 말릴 기회가 있었음에도 회피하려다가 결국은 일을 더 키운 꼴이 됐잖아.’
그녀의 말이 맞았다. 성구에겐 분명 모든 잘못을 끊을 기회가 있었고 바로 잡을 시간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책임이 돌아오는 것이 싫어서 방관을 택했다.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돌이킬 수 없는 일들이 연달아 일어났다.
‘나는 있잖아. 한번 어긋난 관계가 다시 붙는다고 생각하지 않아. 이미 자식들이 애정사로 얽힌 그 순간부터 우리 관계는 이미 파투났던 건지도 몰라.’
‘…….’
‘우리도 여기까지만 하자.’
관계의 끝을 말하는 현숙 앞에서 성구는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평생을 책임지는 걸 미루며 살았다.
그가 책임진 것은 자식인 희진이가 유일했고, 그녀마저도 실은 그가 철 따라 바꾸는 여자들의 손에서 자랐다.
이번에도 역시 그는 관계를 끝내는 역할을 현숙에게 미룬 채, 그녀의 조언대로 자신의 행위를 부정하고, 책임을 면하는 역할을 택했다.
검찰청 계단을 내려온 성구는 차에 올라탔다.
희진이가 있는 요양원 옆 달방으로 향하려던 그는 시동을 건 채 한참을 생각하다가 내비게이션에서 수원 요양원 주소를 지워버렸다.
역시나 책임지는 삶은 그에게 맞지 않았다. 하나같이 다 버겁고 힘에 부쳤다.
결혼을 통해 잠시라도 사람답게 살아보려고 했지만, 한평생 여자들을 등쳐먹으면서 살아온 성구에게는 아버지의 역할도 책임도 무엇 하나도 쉽지 않았다.
성구는 또다시 삶으로부터 회피했다.
정신을 놓은 딸로부터. 제 잘못을 지적하는 현숙에게서 또 한 번 도망치는 길을 택했다.
이후 성구가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이혼이 확정되던 날 가정법원 앞에서였다.
현숙에게서 위로금 조의 돈으로 수천만 원을 받은 성구는 그 뒤로 영영 희진의 앞에도, 현숙의 앞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 뒤로 성구의 소식을 들었단 이는 아무도 없었다.
***
현숙과 성구의 이혼이 확정된 날, 오랜 입원 끝에 도진이 퇴원했다.
다발성 골절로 총 수술 시간 11시간 30분의 큰 수술을 받았지만, 다행히도 팔다리에 이상이 생기진 않았다.
다만 허벅다리에 핀을 넣은 까닭에 도진은 다리를 절며 병원을 나섰다.
그러나 영원히 다리를 저는 건 아니었다. 다리를 저는 건 핀을 박아 넣은 다리의 뼈가 완전히 아물 때까지만이라고 했다. 핀도 뼈가 완전히 붙으면 수술로 제거한다고 했다.
선아는 입원한 도진을 자신의 차에 태워 그의 오피스텔로 데려왔다.
도진이 일반병실로 옮겨서 생활한 한 달간, 선아는 도진의 집 비밀번호를 받아 그의 집과 병원을 오갔다.
도진의 소식을 듣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던 그간의 시간을 보상받기라도 하려는 듯, 도진이 깨어난 뒤로는 그의 보호자를 자처하며 도진의 집에서 입원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나르고, 적극적으로 그를 돌보았다.
그런 시간이 한 달이나 되었다. 도진의 집 앞에 선 선아는 자신이 마치 집의 주인이라도 되는 양 자연스럽게 문을 따고 안으로 들어갔다.
“얼른 들어와, 선배.”
누가 객이고 주인인지 모를 상황이었다.
도진은 근 100일 만에 집에 발을 들여놓았다.
집은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다. 어젯밤 도진의 허락을 받고 집에 온 선아는 그가 쌓아둔 빨래를 한데 모아 돌리고, 구석구석 깨끗이 청소했다.
빚을 갚는다는 마음으로 석 달간 누구도 들고 나지 않은 집의 때를 벗기고 광을 냈다.
선아는 제집처럼 자연스럽게 발코니로 가 창문을 열었다. 창문 틈으로 더운 공기가 집 안으로 들어왔다.
도진이 입원해있는 사이 봄이 도둑처럼 왔다 갔고, 여름이 시작되었다.
“어제 청소하느라 환기하긴 했지만, 그래도 창문 열어두자. 환자한테는 맑은 공기가 필수래.”
“누가 환자야. 치료 다 받고 퇴원한 건데.”
“그냥 환자 해. 선배가 재택근무하는 덕에 나도 덩달아 선배 집으로 출퇴근하게 됐잖아. 제발 오래 환자인 척해줘, 나도 같이 슬렁슬렁 일 좀 해보자.”
“사장님 들으면 펄쩍 뛰신다?”
“아, 그렇지. 울 엄마 들으면 난리 나지.”
엄마의 이야기에 선아가 피식 웃었다.
일은 어찌 돼도 좋다고, 도진이만 무사하면 된다고 소원하던 현숙은 도진이 의식을 차리고 회복을 시작하자마자 제 버릇을 못 버리고 본색을 드러냈다.
미래전략본부 사업 전체가 멈춰 있다면서 빨리 털고 일어나서 일하자고 도진을 설득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호들갑을 하는 현숙을 말린 건 선아였다.
쩔뚝이는 다리로 출근 준비를 하고 사무실에 오가기 힘들 테니, 도진의 다리뼈가 완전히 붙을 때까지는 재택근무를 해야 한다고 현숙을 설득한 것이다.
더불어 도진의 일을 서포트 한다는 명목으로 선아가 이 집으로 출퇴근하게 되었다.
보류되었던 빅터의 서버실 업무나 네이비 MOU 진행 건 모두 도진과 선아가 하던 일이었다. 원활한 업무 진행을 위해서도 그편이 나았다.
“어쨌든 선배, 될 수 있는 한 오래 나이롱환자 역할 좀 해줘. 나도 이참에 좀 자유롭게 일하고 싶단 말이야.”
“언젠 일 좀 가르쳐달라고 하더니.”
선아는 아서라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선배, 생각 좀 해봐. 선배 입원한 동안 아침저녁으로 병원에 출퇴근하면서 일한 게 100일이나 돼.”
선아는 푸념을 늘어놓으면서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그러고 보니 선아는 차에서부터 지금까지 틈만 나면 핸드폰을 확인하고 있었다.
“왜? 기다리는 연락 있어?”
“아. 응.”
“누구?”
“별거 아니야.”
문자를 확인한 선아는 핸드폰을 끄기 전 네이비 포털 창에 접속해 메인에 뜬 뉴스를 확인했다.
메인 뉴스에 이재혁에 대한 기사가 떠 있었다.
선아가 떠들썩하게 파혼해놓은 덕에, 파혼부터 뺑소니 사건에 이르는 과정을 일간지 기자가 취재하기 시작했다.
그가 쓴 기사 속에서 재혁과 선아, 희진은 A 씨, B 씨, C 씨 등으로 표현돼 있었지만, 네티즌 수사대는 결국 재혁과 희진의 신상을 알아냈고, 상간 남녀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막장 드라마보다도 자극적인 사건이었다. 사건에 관한 기사는 높은 조회 수를 기록했고, 연달아 후속 기사가 쏟아져 나왔다.
네이비 메인에 뜬 기사는 상간 남녀의 최후에 관한 기사였다.
재혁의 형이 확정되었다.
재혁은 사고의 고의성을 부인했지만, 증거들을 모아 취합한 결과, 법원은 도진에 대한 재혁의 분노와 사고 간에 인과관계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해 재혁은 살인미수죄로 징역 8년을 선고받았다. 그전에 있었던 결혼 사기 건까지 해 9년이나 징역살이를 하게 된 것이다.
선아는 9년 형이 참 마음에 들었다. 지난 삶에서 그와 연애하고 결혼 생활한 시간이 9년이었다.
자신을 기만한 그 시간과 같은 시간 동안 그가 감방에서 썩는다고 하니 속이 다 후련했다.
재혁의 징역형에 관한 기사 아래에 사이다를 한 사발 들이켰다는 둥, 인생은 실전이라는 둥 하는 댓글이 넘쳐나고 있었다.
선아는 그중에서도 ‘좋아요’를 가장 많이 받은 댓글을 읽어보았다.
[대한민국에 상간 남녀님들. 간통죄 폐지됐다고 신나 있을 텐데요. 그렇다고 정신 못 차리고 그 짓거리 하다가 이 꼴 납니다. 보고들 배우시길.]
“뭐야. 뭔데 그렇게 웃으면서 보는데?”
도진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선아는 핸드폰 속 인터넷 창을 끄며 말했다.
“사실 의자 두 개 주문해 놨거든.”
“의자?”
“응.”
“무슨 의자? 집에 의자 많은데?”
도진은 주방 쪽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독거남의 오피스텔치고는 이 집엔 꽤 큰 식탁이 놓여 있었다. 6인까지 앉을 수 있는 세라믹 식탁엔 양옆으로 의자가 네 개나 놓여 있었다.
“식탁 의자에 앉아서 일하면 허리 아프단 말야. 선배 거랑 내 거랑 업무용 의자 하나씩 주문했어.”
업무용 의자라니…….
“재택근무 2주 아니었어?”
“뭐? 2주우? 고작 2주 앉자고 내가 개당 50만 원짜리 의자 주문한 줄 알아?”
선아는 이 집에서 재택근무하는 일정을 짧게 끝낼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