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압박감
그 시각 재혁은 손에 집히는 대로 물건을 가방에 집어넣고 있었다.
도진을 친 후, 현장에서 도망쳤다. 그 뒤로 체포될 거라고 생각되었지만, 아직까지도 그는 체포되지 않은 채였다.
경찰에선 여러 차례 소환 일정을 통보했다. 성실하게 조사만 받는다면 재판 결과가 나올 때까지 집에서 경찰서를 오가면서 조사를 받을 수 있다고 했다.
또한 성실하게 조사받으면 형을 줄이는 데 참작이 될 거라고 했다. 그랬기에 정신을 가다듬고 경찰 조사에 응했지만, 어찌 된 일인지 그의 예상보다도 일이 더 이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경찰은 재혁이 고의로 사고를 낸 것은 아닌지에 대한 여부를 추궁하기 시작했다.
재혁은 경찰의 심문을 모두 부인했다.
우연히 그 시간에 그 거릴 지나게 되었고, 파혼으로 인해 심리적으로 불안하던 와중에 두 사람을 보고 저도 모르게 사고를 내게 된 것이라 주장했다.
그렇지만 도진에게 폭언을 퍼붓고 폭행한 걸 본 이들이 많다고, 심지어는 식당 앞 CCTV를 통해 증거를 확보했다며 원한에 의한 계획적 사고가 아니냐 캐물었다.
그에 대해서도 재혁은 부정했다. 실은 그가 차로 치어버리고 싶었던 것은 선아였다.
제 삶을 망가트린 윤선아에게 복수 하려던 것이지만, 선아가 아닌 도진이 차에 치였다.
물론 선아 못지않게 도진에게 유감이 많기도 했지만, 어쨌든 목표는 도진이 아닌 선아였었다.
그러나 재혁은 말을 속으로 삼켰다. 그 이야기를 한다면 고의 사고에 초점이 맞춰지게 될 테니까.
그렇게 제 모든 행위를 부정했음에도 불구하고 경찰들은 고의 사고에 더 무게를 싣고 있는 듯 보였다.
재혁이 선임한 국선변호사는 경찰의 조사를 부인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며 반성문을 제출하고 뉘우치는 자세를 보여서 형을 감량 받아야 한다고 했다.
돈이 없어 국선변호사에게 변호를 받아야 하는 재혁과 달리 류도진 측에서는 국내 유명 로펌을 전세 내다시피 하여 변호사들을 대거로 선임했다.
도진처럼은 아니더라도 좀 더 유능한 변호사가 자신을 변호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 재혁은 이제라도 차를 팔아볼까 했었지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기 결혼에 대한 고소가 들어오면서 차를 제 맘대로 처분할 수 없게 되었다.
선아 측에서 재산을 처분하지 못하도록 가압류 신청을 해둔 것이었다.
사방에서 제 목을 조여오기 시작하자 재혁은 도주 계획을 세웠다.
뺑소니 사건에 대해 경찰 조사를 받는 와중에 사기 결혼 사건이 검찰청으로 이관되었다는 소환장이 날아왔다.
사기 결혼에 대한 형이 확정되는 건 시간문제였고, 형이 확정된다면 감방에 갇힌 채 빼도 박도 못하게 된다.
거기다 뺑소니 사건까지 더해져 더 과하게 처벌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이게 얼마 전 국선변호사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였다.
그의 조언대로 반성문도 쓰고 조사도 성실히 받았지만, 빠져나갈 구멍은 사라지고, 사방에서 점점 더 그를 압박하고 있었다.
그는 사기 결혼이나 교통사고 같은 게 큰 죄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TV에 보면 납치, 살인, 강간같이 무서운 일들이 허다했고, 주변을 봐도 교통사고나 사기로 크게 처벌받는 경우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벌금을 물어주거나 집행유예 정도로 형이 확정될 거라 믿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재혁을 대하는 경찰들의 태도가 고압적으로 변했다.
“빨리 어디로든 숨어야 해.”
짐을 싸는 재혁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아버지가 즐겨보는 프로그램이었다.
아버지는 매주 산에 사는 자연인들이 나오는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다큐멘터리에서 자연인들이 공통으로 하는 말이 있었다. 깊은 산속에서는 한 달에 사람 한 명 보기도 어렵단 말이었다.
“산에 숨으면 못 찾겠지.”
자연인들은 버섯이나 약초 같은 걸 채취해서 내다 팔아 돈을 구했고, 자연에서 난 걸 채취해서 음식을 해 먹고 살았다.
그다지 어려워 보이는 일도 아니었다. 감방에 가서 썩느니 차라리 산에 가서 약초를 캐면서 지내는 게 나을 듯했다.
우리나라 국토의 70%가 산이라 하니 깊은 곳으로 숨으면 경찰도 자신을 찾을 수 없을 터였다.
재혁은 등산 가방에 짐을 쑤셔 넣었다. 세면도구와 칫솔, 일회용 면도기를 챙기고, 속옷 몇 벌과 가벼운 옷, 여벌 운동화를 챙겼다.
그리곤 파리채를 들어 안방 장롱 아래를 휘저었다. 그 안에 어머니가 숨겨둔 비상금이 있었다.
비상금이라고 해봤자 재혁의 퇴직금을 뺏어간 돈이었다. 그 돈은 어차피 제 돈이기에, 어머니의 돈에 손을 대면서도 양심의 가책 같은 건 느끼지 않았다.
이른 아침, 재혁은 대문을 열고 나섰다. 자신의 동선을 추적하지 못하도록 버스를 타고 이동하다가 CCTV가 없는 데서 택시를 잡아타고 인적이 드문 시골로 갈 생각이었다.
그렇게 골목 주변을 탐색하면서 버스 정류장으로 향해 갈 때였다.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아까부터 누군가가 자신의 뒤를 캐는 듯했다.
‘설마…….’
재혁은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았다. 은색 승용차 한 대가 골목을 천천히 달리고 있었다.
진하지 않게 코팅된 앞 유리 너머 건장한 남자 둘이 재혁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순간 불길한 예감이 그의 머리를 스쳤다.
형사다.
형사가 아니었으면 클랙슨을 눌려 길을 비켜달라 했을 것이다.
차에 탄 두 남자가 형사란 생각이 든 순간, 재혁은 대로변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잡아!”
역시나 남자들은 형사였다.
그들은 도망치는 재혁을 발견하자마자 차를 멈추어 세우고 차 밖으로 달려 나왔다.
재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리기 시작했다.
달리기라면 자신이 있었다. 중고등학교 체육대회에서도 늘 반 대표로 뛰었었고, 젊은 데다가 나름대로 몸 관리를 해온 터라 충분히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건 오판이었다.
재혁보다도 족히 열 살은 많아 보이는 경찰은 숨 한 번 흩트리지 않고 달려와 재혁의 목덜미를 쥐었다.
그에게 목덜미를 잡힌 재혁은 꺽꺽 소리를 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재혁 씨. 당신을 사기 혐의로 체포합니다.”
“놔! 놔! 이거 놓으라고!”
또 다른 이가 재혁의 얼굴 바로 앞에 영장을 내밀었다.
“성실히 조사받으면 체포 안 한다고 했잖아! 갑자기 무슨 체폰데! 놔! 놓으라고!”
경찰은 재혁의 면전에 대고 미란다 원칙을 읊었지만, ‘체포’라는 말 앞에 머릿속이 하얘진 그는 무슨 소린지 알아듣지 못했다.
그렇게 영장이 발부된 줄도 모르고 도망을 치다가 붙잡힌 그에게 도주 혐의 하나가 더 추가되었다.
***
이미 두 건의 형사 사건에 연루된 재혁이 도주할 우려가 있다는 판단하에 법원은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하필이면 그날 도주를 하다가 발각된 재혁은 혐의 하나가 더 추가된 채로 철창 안에 갇힌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렇게 수감된 지 일주일째 되던 날, 법원은 재혁의 사기 혐의를 인정한다면서 형을 확정하였다.
징역 1년 3개월에 벌금 1천만 원이 선고되었다.
재혁은 현금이 없었다. 그간 모아둔 자산은 탈탈 털어 차 할부금을 갚았다. 그럼에도 일부는 갚지 못해 남아 있었지만, 그의 드림카는 벌금을 내지 못하자 압류당했다.
그야말로 있는 것 없는 것 모두 탈탈 털린 것이다.
원통하고 분해서 배식으로 나온 밥도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그렇게 하루하루 깡말라 가는 재혁에겐 또 한 건의 형사 재판이 남아 있었다.
수감생활을 중에도 재혁은 조사를 받으러 검찰청을 드나들어야 했다.
뺑소니 사건에 대해 첫 검찰 조사를 받던 날, 재혁은 언제부턴가 경찰들이 자신을 고압적으로 대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의 혐의는 분명 뺑소니였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뺑소니 건은 살인 미수 건이 되어 있었다.
살인 미수라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인가!
“이재혁 씨가 류도진 씨를 향해 원한을 갖고 있었다는 증언과 증거를 대량으로 입수했습니다. 더군다나 이재혁 씨는 류도진 씨를 차로 친 후 어떤 구호 행위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조사해본바, 이재혁 씨의 차 내비게이션은 사고 당일, HS 엔터테인먼트를 목적지로 설정해두었었고, 고의로 그곳에 간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따라 류도진 씨에게 살인 혹은 상해를 입힐 목적이 보이는데, 이에 동의하십니까?”
검찰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재혁의 머릿속은 하얗게 변해갔다.
이런 씨발! 빼도 박도 못하게 모든 정황이 짜여 있었다.
재혁은 터져 나오는 욕을 목구멍 안으로 꾹꾹 눌러 담으며 제 혐의를 부인했다.
계획적으로 사고를 일으켰다고 하면 형이 더 추가될 테니 우발적으로 벌인 일로 만들어야 했다. 게다가 실제로도 우발적인 범행이었다.
“그날 HS 엔터테인먼트 사장의 남편이자 제 장인이 될 뻔했던 정성구라는 사람이 집으로 찾아왔습니다. 그 사람이 찾아와서 제게 정혼녀였던 윤선아와 류도진이 사귀는 사이라고 약을 올렸어요. 두 사람이 사귀는 사이라서 저를 궁지에 몰 생각으로 파혼을 계획하고 저를 엿 먹이려 한다고요! 그래서 화가 나서 따지기 위해 뛰쳐나간 거지, 절대로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정말이에요!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설정한 건 단속카메라 때문에 그런 거예요! 진짜예요.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믿어주세요!”
피가 터지도록 자신의 혐의를 부인했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앞에 앉은 검사는 심드렁한 얼굴이었다.
조서를 제대로 작성하기를 하는 건지, 검사의 손은 한참이나 노트북 자판 위에서 멈추어 있었다.
“아니, 왜! 왜 조서를 작성하다 말고 손을 멈추세요? 왜 제가 한 말은 기록하지 않으십니까!”
재혁은 다급한 소리로 말했다. 이제는 경찰도 검사도 제게 죄를 뒤집어씌우려는 사람으로 보였다.
“제가 주장하는 것도 적어야죠! 상대방 말만 듣고 저한테만 죄를 씌우면 안 되죠!”
그제야 검사가 고갤 들고 재혁을 바라보았다.
“물론 이재혁 씨 진술 내용은 적어 넣을 겁니다. 추가로 증인 출석을 요청해야 하는지 잠시 생각했던 겁니다.”
“당연히 증인 출석 요청해야죠! 제 말도 기록해야죠! 저는 정말이지, 억울해요. 저야말로 덫에 걸린 거리니까요!”
“아, 네. 네.”
“검사님! 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선량한 시민이었어요. 하루하루 벌어서 세금 내고, 차 할부나 갚던 평범한 시민이었다고요!
사기 혐의로 징역 1년이 구형돼 수감 중인 이가 재혁이었다.
그런 이의 입에서 나온 선량이나 평범 같은 단어들은 전혀 설득력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