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수없이 많은 밤 @AW
빠르게 요동치던 심전도계의 그래프가 잠잠해진 것은 면회가 끝나 도진의 옆 침대의 보호자가 나가고도 한참이 흐른 뒤였다.
정환은 한참 동안 자리에서 있었다.
자리에 서서 응급의학과 과장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젊은 여자가 20일째 도진 군의 상태에 관해 묻습니다. 아침 면회 시간마다 중환자실 앞을 지키고 있어요.’
나중에서야 그녀가 HS 엔터테인먼트 윤현숙 사장의 딸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도진이 윤 사장의 딸을 대신해 차에 치였다고 들었다.
그랬기에 정환은 그녀가 매일 중환자실 앞에 찾아오는 이유가 죄책감 때문이라 생각했다.
‘도진이 동료였던 모양인데, 상태에 대해서 질문해오면 짤막하게라도 이야기해줘요.’
‘네. 이사장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도진의 행동엔 다 이유가 있다고 믿는 정환이었기에 구태여 도진이 구한 여자를 원망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몇 번 찾아오다가 말 것이라 여겼지만, 윤 사장의 딸은 도진이 중환자실에 들어간 지 30일이 지나고도, 40일이 지나고도 계속 중환자실 앞으로 찾아왔다.
도진과 윤 사장의 딸 사이를 단순한 동료 사이라고 생각했었지만,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윤선아 양이 전해달랍디다. 좋아한다는 말에 다른 대답을 하고 싶다고…… 얼른 일어나서 들어 달래요. 보고 싶답니다.’
정환은 발걸음을 돌려 중환자실 입구로 걸어갔다.
윤현숙 사장을 통해 그녀의 딸을 한번 만나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중환자실 앞 복도로 나갔다.
그러나 윤현숙에게 연락하지 않고도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중환자실 밖으로 나가자마자 보인 것은 2번 베드 보호자에게 도진의 상태를 묻는 선아의 모습이었다.
“처자가 말한 대로 전했어.”
“정말 감사해요. 그런데 혹시 링거액은 몇 개를 맞아요? 더 늘어났어요?”
“아니. 저번에 본 허연 건 이제 없고, 수액은 평소랑 똑같이 맞고 있더라고.”
“그래요? 아…… 다행이다. 혹시 상처는 좀 아물었나요?”
“처음 들어왔을 때보다 얼굴은 많이 좋아졌지. 울긋불긋한 건 거의 다 사라졌어.”
도진의 가족이 아니라서 중환자실 면회가 불가능하니 이렇게라도 사람들을 통해 도진의 소식을 전해 듣고 있는 것이었다.
노인이 입을 열어 한 마디 한 마디 할 때마다 선아는 손을 꽉 쥐었다가 놓기를 반복했다.
정환은 복도 한쪽으로 물러나 선아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중환자실에 들렀다가 회사에 가는 모양인지, 그녀는 출근 복장을 하고 있었다. 일전에 현숙의 병실에서 마주쳤을 때보다도 얼굴이 많이 수척해져 있었다.
때마침 노인과 선아의 이야기가 끝나가고 있었다.
정환은 선아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윤선아 양.”
노인과 작별 인사를 나누던 선아가 뒤돌아 정환을 바라보았다.
“아…….”
그녀는 당황한 듯한 얼굴로 정환을 보며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도진 선배 아버님이시죠.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었는데, 어떻게 전해야 할지 감히 생각할 수 없어서 사과가 늦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황급히 허리를 숙이는 선아를 향해 정환은 괜찮다는 듯 손을 저었다.
“도진이 사고에 대한 사과라면 넣어둬요. 윤현숙 사장님 통해서도 미안하단 말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선아 양이 무사한 걸 보니 다행이란 생각이 들어요.”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감사드리고, 정말 송구합니다.”
선아는 죄인처럼 고갤 들지 못했다. 정환은 착잡한 눈길로 선아를 바라보았다.
아들이 사람을 살리는 의사가 되길 바랐지만, 이런 식으로 누군가를 구하게 될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인간이기에 원망스러움이 아예 없다곤 할 수 없지만, 그 마음조차도 내려놓은 건 아들을 믿어서였다.
정환은 도진의 행동엔 다 이유가 있다고 믿고 있었다.
“중환자실 측에는 전해둘 테니, 원한다면 오늘 밤부터 보호자 자격으로 도진이 면회하도록 해요.”
“네……? 제가…… 그래도 되나요……?”
“얼굴 보고 하고 싶은 말도 하고, 어서 일어나라고 호통이라도 한번 쳐줘요.”
선아는 허리를 90도가 넘어갈 정도로 숙이며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정환은 선아에게 짧게 작별 인사를 한 후 복도를 지나 ID카드로만 출입할 수 있는 공간에 들어섰다.
기다란 복도를 걸으면서 그는 방금 본 윤선아라는 여자와 그녀의 이름 석 자에 요동치던 심전도계를 생각했다.
어쩌면 도진에게 윤선아라는 이는 세상에 미련을 생기게 할 만큼 중요한 존재인지 모른다.
비단 아까 본 심전계 때문에 한 생각만은 아니었다.
제 자식이지만 도진은 이상한 구석이 있는 아이였다.
의사가 된 후 정환은 30년이 넘는 시간을 일과표대로 움직여왔다.
요일별로 외래진료와 수술, 학회 일정이 꽉 차 있었고, 그것들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서도 씻고, 먹고 자는 일상조차도 정해진 시간대로 움직였다.
그렇게 해야지만 아주 약간의 짬을 개인 시간으로 쓸 수 있었다. 보람은 되었으니 곤한 삶이었다.
그러나 도진은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그런 삶을 살았다.
의대에 재학하던 아들은 벅찬 의대 공부를 하면서도 프로그래밍 동아리 활동을 했다. 그렇게 잠을 아끼고 노력한바, 의대 재학 중에 빅터라는 프로그램을 완성했다.
의대 성적이 톱이었기에 아들이 다른 일을 하고 있으리라 생각하지 못했다. 그랬기에 아들이 의대를 졸업한 뒤, 의사를 하지 않고 제가 만든 프로그램으로 취업을 하겠다 했을 땐 뒤통수가 얼얼하기까지 했다.
의사가 되지 않겠다는 이야길 열아홉 살 때 했다면 분명 반대를 했을 것이지만, 의대에 입학해서 아버지의 뜻에 따라 살고, 성적마저도 최상위권을 유지한 아들이었다.
그랬기에 크게 반대를 할 순 없었다. 그저 염려하는 선에서 반대를 하고 도진의 뜻대로 하게 두었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의대에 입학 하긴 했지만, 도진은 의사가 될 마음이 없었다. 그랬으니 일반병으로 입대하고, 프로그램 개발 일을 손에서 놓지 않은 것이다.
그러기 위해 저를 속여 온 듯한 기분을 떨칠 순 없었지만, 그렇게 살면서 누구보다 노력하고 힘들었을 아들을 미워할 수도 없었다.
그런 아들이었다.
어떨 땐 최선의 선택을 위해 한 발짝 물러나기도 했지만, 그 애는 결국 자신이 정한 길로 걸었고, 자신이 원하는 걸 이루어나갔다.
그 애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에 다 의미가 있었다.
아들은 인생을 다 산 백전노장 같아 보였다. 아니, 백전노장이라기보다는 인생을 다시 한번 되짚어가는 사람 같아 보일 정도였다.
그런 아들이 선아를 구해내고 그녀 대신 차에 치였다.
아들이 선택한 행동이었다.
그랬으니 그 행동 또한 이유 있는 행동이라는 게 정환의 믿음이었다.
***
도진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의 시야에 흐드러지게 핀 연분홍 꽃줄기와 꽃줄기 틈으로 보이는 파란 하늘이 들어왔다.
죽음 앞에서는 주마등이 스친다던데, 종일 낮달맞이꽃밭을 걷다가 밤이 되어 꽃밭 한가운데 누워 잠이 들면 이승에서의 일들이 꿈으로 펼쳐졌다.
그렇게 낮에는 저승길을 걷고 밤에는 이승의 일을 꿈에서 보았다.
그러는 사이 이곳에서 며칠이 지났는지도 잊었다. 그저 이곳에 온 지 아주 오래되었다고 느낄 뿐이었다.
꽃밭 한가운데 잠들어 있던 도진은 따스한 햇볕이 이마에 닿음을 느끼곤 눈을 끔뻑끔뻑했다.
또 하루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걸어야 할 시간이었다.
왜 걸어야 하는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본능처럼 이 동산을 걷고 있었다.
몸을 일으킨 도진은 허리까지 길게 자란 달맞이꽃 줄기를 헤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의 앞으로 연분홍 낮달맞이꽃밭이 능선에 능선을 따라 보이지 않는 곳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푸른 하늘과 금빛 해, 그리고 그 아래 끝모르게 이어진 꽃밭은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웠다.
아주 오랜 시간 같은 풍경을 보며 걸었는데도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풍경이었다.
그러고 보면 이곳은 참 신기했다.
언젠가 선아에게 이곳에 대해 들었을 때, 그녀는 이곳에서 밤낮으로 걸어도 발이 아픈 줄도 몰랐다고 했다.
그 또한 시간의 흐름을 잊을 만큼 오래도록 걸었음에도 발이 아프지 않았고 몸이 지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연분홍 낮달맞이꽃밭이 진노랑의 달맞이꽃밭으로 바뀌는 밤이면 가던 길을 멈추고 몸을 뉘었다.
저승에서도 규칙적으로 휴식을 취하고 잠을 자는 이유는 그렇게 하면 이승에서 사랑했던 이를 볼 수 있어서였다.
날이 밝았으니 다시 또 걸어야 했다.
어디에 닿는지도 알 수 없지만 걷는 것이 도진의 일이었다.
그렇게 꽃밭 속에서 한 발을 떼는 순간,
“아야얏!”
꽃줄기 속에 숨어 있던 누군가와 부딪혔다.
“누, 누구?”
도진은 꽃줄기를 헤쳐 자신과 부딪힌 이를 찾았다. 줄기를 양손으로 치우자 그사이에 넘어진 아이가 웅크리고 있었다.
“세빈이……?”
“도진 삼촌!”
꽃밭에 넘어져 있는 아이는 세빈이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세빈이는 도진의 손을 붙잡아 길로 이끌었다.
“꽃 속에서 숨바꼭질하는 건 재밌는데 앞이 안 보여서 답답해. 얼마나 더 커야 언제 저 꽃보다 키가 커질까?”
도진은 귀여운 푸념을 하며 저를 잡아끄는 세빈이를 내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세빈이는 오른손으로 도진을 붙잡고 있었다. 자신을 잡은 아이의 손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이승에서의 세빈이는 오른손을 쓰지 못했다. 재활 치료를 통해 걸을 수는 있게 되었지만, 오른손은 끝끝내 쓰지 못했었다.
“세빈아, 너 오른손이….”
“내가 오른손 쓸 수 있게 된 게 언젠데! 엄마가 삼촌한테 그런 이야기도 안 했어?”
“아…….”
물론 들은 적이 있었다. 술에 취했던 선아는 세빈이를 업고 저승길을 걸었던 이야길 하면서 이곳에서 세빈이의 몸이 다 나았다고도 했다.
“여기가 그곳이 맞았구나…….”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이곳은 정말로 선아가 걸었던 그 길이었고 세빈이가 사는 세상이었다.
길로 나온 도진은 꽃밭 사이에 굽이굽이 이어진 길을 바라보았다.
가느다란 길은 끊길 듯 끊기지 않고 끝도 없이 이어져 있었다.
“세빈아.”
도진이 세빈이의 이름을 부르며 아이를 내려다보았을 때,
“응!”
“응!”
꽃밭 안에서 또 다른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진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소리가 난 곳을 응시했다.
허리까지 오는 꽃줄기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 안에서 누가 꽃을 헤치고 도진의 앞으로 오고 있었다.
마침내 끝에 이르렀는지, 꽃밭 안의 존재가 꽃줄기를 양옆으로 헤치며 길로 나왔다.
꽃에서 나온 이는 여덟 살 세빈이보다도 한 뼘 정도 키가 큰 소년이었다.
“!”
도진은 단번에 그 아이가 누군지 알아보았다.
어떻게 너를 몰라볼 수 있을까.
“…….”
수천 일의 밤 동안 네 생각을 했다.
네가 태어났으면 어떤 아이였을지 수도 없이 상상해왔다.
나는 너를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
“꽁이야.”
도진이 아이를 소리 내 불렀다.
그러자 아이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응. 아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