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고드는 밤-79화 (79/85)

79화. 심장박동

“내일 아침에 윤선아 양이 전해달랬다고 말 전해줄 테니까,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봐.”

말을 전해준다니……. 생각지도 못한 제안이었다.

할머니의 남편이 도진의 옆자리에 입원해있으니 바로 옆에서 이야기하면 도진에게도 들릴 것이다.

선아는 잠깐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좋아한다는 말에 다른 대답을 하고 싶은데……. 왜 들으러 오지 않냐고…… 기다리고 있다고, 보고 싶다고 전해주세요.”

할머니가 고갤 끄덕였다.

“애인이었구먼.”

“애인은 아니에요.”

“그 총각 일어나면 애인 삼아. 아주 잘생겼더구먼.”

“……네.”

할머니와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선아는 건물 앞에서 그녀와 헤어졌다.

“내일 말 전할 테니까 아무 걱정하지 말어. 내일 아침에 이 앞에서 봐.”

“네. 감사합니다.”

주차장으로 향하기 전, 그녀는 중환자실이 있는 3층의 창을 올려다보았다.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 곳. 도진이 저곳에 들어간 지도 벌써 40일이나 지났다.

그녀를 밀어내고 대신 차에 치인 후, 도진은 40일간이나 의식을 차리지 못했다.

깨어난다고 해서 이전과 같을 거란 보장이 없었다.

그러나 선아는 그가 어떤 상태로 깨어난다 해도 다 괜찮았다.

그의 부재가 길어질수록 누가 자신을 지탱해주고 있었는지가 명확해진다.

현재의 선아 옆에는 이전 삶과 달리 소중한 사람들이 많았다.

엄마도 있고, 대학 동기들과의 연락도 꾸준히 이어가고 있었다. 오히려 재혁과 파혼한 일로 결혼식에 참석한 동기들로부터 평소보다도 더 많은 연락이 오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제는 서로를 지지하고 믿는 직장 동료들도 있었다.

무수히 많은 이들이 선아를 지탱해주고 있는데도 마음은 이전 삶보다도 더욱 허했다.

당연한 듯 제 곁에 있었던 도진의 부재 때문이었다.

늘 그녀 곁에 있었던 도진의 부재에, 선아의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도 공허하게 말라가고 있었다.

***

“선아야. 이리 좀 와봐.”

선아가 집으로 들어갔을 때, 현숙이 기다렸다는 듯이 선아를 불렀다.

도진이 사고 난 지 40일, 현숙의 얼굴도 퀭하게 변했다.

도진이 입원하면서 네이비와의 MOU도 보류되었고, 라이센스를 가진 이가 그이기에 빅터 프로그램 또한 가동할 수 없게 되었다.

사업에 제동이 걸리면서 회사도 비상이 걸렸지만, 비단 그것 때문에 얼굴이 핼쑥해진 건 아니었다.

이젠 현숙도 사업이 어찌 되든 상관없었다. 그저 도진이 무사하기를 바라고 또 바랄 뿐이었다.

선아가 소파에 앉자, 현숙은 허리를 세워 앉으며 딸과 시선을 맞추었다.

“오늘 변호사 만나서 고소 건 어떻게 진행되는지 듣고 왔어.”

평소에 현숙은 변호사나 세무사 같은 전문가들을 직접 만나러 다니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문외한인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돈 쓰는 걸 아까워하지 않았다. 그랬기에 도리어 그들이 앞다퉈 현숙을 찾아왔다.

현숙은 그저 회의실 하날 비워놓고 자신을 찾아오는 그들을 시간 맞춰 만나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현숙은 도진의 일에 있어서만큼은 직접 변호사를 찾아다니며 소통했다.

뺑소니 사건에 대한 고소는 도진의 집안에서 진행하고 있지만, 변호인단을 꾸리는 데 돈을 지원하고 있는 건 현숙이었다.

류 이사장의 만류에도 그녀는 그렇게 해야지만 자신의 마음이 편하다며 변호인단 구성에 돈을 아끼지 않았다.

“결혼 사기와 뺑소니 사건, 두 건 다 고소 진행 중인데, 사기 사건부터 형이 나오도록 변호사들이 전방위적으로 압박 중이야.”

“뺑소니 사건이 더 크잖아. 그거부터 해야 하는 거 아니야?”

“결혼 사기로 형 확정되면 죄가 인정되는 거잖아. 사기죄가 확정되는 순간, 파혼에 억하심정을 갖고 고의로 사고를 내고 도주한 거라고 몰아가기로 시나리올 짰어. 게다가 사기 건의 형이 확정되면 가중처벌 때문에 뺑소니 사건 형량도 무거워질 거고.”

“고의로 선배를 치려고 했다고 몰아가는 게 가능해? 이재혁은 나를 치려고 한 거잖아. 이재혁도 입이 있으니 아니라고 변론할 텐데?”

“이재혁이 류 팀장한테 행패를 부린 적이 있다면서?”

선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결혼식 전전날에 있었던 회식 자리에서 이재혁은 술에 취한 채 도진에게 행패를 부렸다. 남의 여자를 노린다는 둥 하면서 주먹까지 날렸다.

“그날 일을 전략팀 사람들이 증언하겠대. 이재혁이 류 팀장에게 원한을 갖고 있다고 말이야. 고의성이 인정되면 단순 뺑소니 사건이 아니라 류 팀장의 예후에 따라 살인 혹은 살인 미수 사건이 된대. 그러면 형도 훨씬 높게 받을 거고.”

“아…….”

“내가 그 새끼 1년이라도 더 형 받게 하려고 변호인단에 부장판사까지 지낸 변호사도 넣었어. 어차피 그 자식 형은 확정이지만, 어떻게든 감옥에서 오래오래 썩게 하려고 압박하는 중이야.”

선아 또한 이재혁이 오래오래 감방에서 썩길 바랐다.

눈을 감으면 도진이 차에 치여 보닛에 매달린 채 끌려가는 장면이 떠오른다. 피 흘리며 쓰러진 도진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 사고 현장에서 이재혁은 도진을 들이받은 후에 차를 후진해서 도망쳐버렸다.

사람이라면 그럴 수가 없었다. 홧김에 사고를 쳤다고 한들, 사고 난 그 순간에 잘못된 일임을 깨닫고 내려서 사고 수습을 해야 했다.

“평생…… 감방에서…….”

이재혁이 평생 감방에서 썩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려던 선아는 입을 꾹 닫았다.

재혁이 형을 더 높게 받는 경우는 도진이 사망한 경우다. 그렇게 되면 살인죄로 인정을 받게 될 테니 형이 훨씬 더 무거워진다고 했다.

이재혁이 평생 감방에서 썩었으면 좋겠지만, 그게 꼭 도진이 잘못되길 바라는 말같이 느껴진 선아는 황급히 입을 닫았다.

“엄마, 나는 왜 그런 놈이랑 결혼까지 하려 했을까.”

이미 그놈 때문에 한 번의 인생이 망가졌는데, 또 같은 길을 걷겠다고 그런 놈을 옆에 두었다가 이런 일이 벌어졌다. 할 수만 있다면 과거로 돌아가 자신의 뺨이라도 때리고 싶었다.

“그래서 사람을 신중하게 사귀어야 하는 거야. 이재혁 같은 놈을 피해 가려고.”

현숙의 말대로 이재혁은 선아의 인생에 해가 되었었다.

잘못인 걸 알았을 때 끊어버렸어야 했는데, 그래도 좋은 남편이 되겠지, 좋은 아빠가 될 거라고 믿으면서 시간은 끌었고, 그 결과 지난 삶에서는 죽음에 이르렀다.

“이마에 나쁜 사람이라고 써놓고 다니는 게 아닌데, 좋은 사람이랑 나쁜 사람을 어떻게 알아봐야 해? 솔직히 일이 이렇게 되고 나니까…… 이제 친굴 사귀기도 겁이 날 정도야…….”

“그러니까 오래 지켜봐야지. 살다 보면 좋은 일도 있고 나쁜 일도 있을 텐데, 그럴 때마다 사람들이 걸러질 거야. 그렇게 인생이라는 체에 거르고 걸러서 남는 사람들이 진짜인 거지.”

돌이켜보면 선아는 이재혁에 대해 어떤 검증도 하지 않은 채 자신의 사랑만을 믿었었다.

지난날의 자신이 그렇게나 어리석었다.

“그렇게 자책할 필요 없어. 이번 기회에 배우면 되는 거야.”

“응…….”

그러고 보니 며칠째 성구가 집에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엄마, 그나저나 아빠는?”

“희진이가 아프다 하더니만 상태가 영 좋지 않나 봐.”

“희진이가?”

“어디가 아프다곤 정확히 못 들었는데. 대학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치료 끝났다고 퇴원 권유받았나 봐. 괜찮은 병원 알아봐서 전원했다는데…….”

“대학병원에서 퇴원하라 그런 거면 치료가 끝난 거 아니야? 치료 끝났으니까 퇴원하라 그랬을 거잖아. 근데 또 무슨 병원을 알아봐?”

“그게 좀…… 희진이한테 정신적인 문제가 생겼나 봐. 아빠 앞에선 희진이 이야기하지 말고.”

“아, 응. 알았어.”

선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2층으로 올라왔다.

정신적인 문제가 생겼다는 소리를 듣고도 일말의 동정도 들지 않았다.

“미련한 년.”

이전 삶에서 선아는 희진 때문에 생때같은 자식을 잃었다. 세빈이는 자신의 목숨을 내놓아도 바꿀 수 없을 만큼 귀한 아이였다.

그뿐만 아니라 정희진은 선아까지도 청부 살해했다. 저 하나의 이기심 때문에 말짱하던 두 사람을 죽인 그녀가 고작 남자 하나 때문에 정신을 놓았단다.

“정신병은 무슨……. 애초부터 정신이 나약했으니까 그런거지.”

남을 찌를 때는 상대가 아픈 줄도 몰랐을 것이다. 그런 이가 정작 제 살갗 조금 베이니 아프다고 뒹굴고 있는 꼴이었다.

이젠 웃기지도 않았다.

***

이른 아침, 정환이 중환자실에 들어섰다.

근무를 서던 간호사가 그의 등장을 알아차리곤 데스크에서 일어났다.

한국 병원 톱5 중에서도 톱으로 꼽히는 이 병원의 이사장이 류정환이었다.

의사 집안에서 자란 그는 아들 다섯 중 넷을 의사로 키워냈고, 현직에 있을 땐 외과의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이사장님 오셨습니까.”

“막둥이 놈 얼굴만 보고 가려는 거니까 신경 쓰지 말아요.”

권위주의가 강한 의사 사회의 꼭대기에 선 그였지만, 그는 필요할 때가 아니면 권위를 내세우지 않는 편이었다.

그 점을 잘 아는 간호사는 원치 않는 친절을 베풀기보다는 데스크에 앉아 교대할 이에게 넘길 데이터를 작성했다.

병상 앞까지 걸어간 정환은 아들을 내려다보았다.

중환자실에 가족을 둔 보호자치고 정환은 이곳에 자주 오지 않는 편이었다. 그도 의사였기에 지금의 아들 상태를 낙관할 수 없었기에 부러 더 오지 않았다.

처는 도진의 얼굴을 한 번 보고 난 후에 팔공산에 있는 절로 들어가 버렸다. 그곳에 소원을 이루어주는 불상이 있다고 했다. 의료진들이 도진에게 해줄 게 더는 없다는 말에 신에게라도 의지하기 위해 애끓는 마음을 끊어버리고 그곳으로 간 것이다.

도진의 침상으로 다가간 정환은 침대맡에 물티슈를 한 장 뽑아 침대에 결박된 아들의 손과 발을 닦았다.

다발성 골절로 수술을 받긴 했지만, 다행히도 신경은 모두 살아 있었다. 의식이 없으나 무의식중에 손발을 움직이는 걸 방지하기 위해 결박을 해둔 것이었다.

올 때마다 닦아서 손끝과 발끝은 깨끗했지만, 지금의 자신이 늦둥이 아들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그것뿐이었기에 정환은 연신 아들의 손발을 닦았다.

자리에 누워도 칠순이 넘은 자신이 누울 줄 알았지, 생때같은 아들에게 이런 일이 닥칠 줄 생각도 하지 못했다.

정환이 도진의 손발을 닦고 있을 때 간호사가 아침 면회 준비를 시작했다.

평소엔 면회 한참 전에 와서 도진을 슬쩍 보고 가는 게 다였지만, 오늘은 전날의 꿈자리가 좋지 않아서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젯밤 꿈속에서 열아홉 살 된 도진을 보았다. 꿈에서 아들은 의대에 가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정환은 그런 아들과 절연을 했다.

하필이면 생과 사의 고비를 넘나들 때 절연하는 꿈이라니……. 그 불길한 꿈 때문인지 도진의 앞에서 꼼짝을 할 수 없었다.

“어서 일어나거라. 식구들 다 기다리고 있다.”

중환자실 면회가 시작되고 2번부터 6번 베드에 누운 환자의 보호자들이 중환자실에 들어서고 있었다.

주변이 부산스러워지기 전 정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보마.”

침대에서 물러나 걷기 시작한 정환의 옆을 2번 베드 환자의 보호자가 스쳐 지나갔다.

중환자실 입구를 향해 가던 정환의 발걸음이 멎은 건 등 뒤에서 들려오는 말소리 때문이었다.

“류도진 씨.”

2번 베드 보호자가 도진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정환이 의아함을 느끼고 돌아섰다.

“윤선아 양이 전해달랍디다. 좋아한다는 말에 다른 대답을 하고 싶다고…… 얼른 일어나서 들어 달래요. 보고 싶답니다.”

노인은 선아의 이야기를 전한 후, 돌아서서 2번 침대에 누운 남편의 상태를 확인했다.

태연하게 면회하는 노인과 달리, 정환은 바닥에서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못 박힌 사람처럼 선 채 한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노인의 입에서 윤선아라는 이름이 나온 순간부터 도진의 침대 옆에 놓인 심전계가 요동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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