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인연
첫 번째 삶에서 HS 엔터테인먼트는 도진이 눈을 감는 순간까지도 중견 엔터테인먼트사의 위치에 머물렀다.
반면에 도진은 첫 번째 삶에서 빅터를 활용해 짧은 시간 동안 C 홈쇼핑사를 대기업 반열까지 끌어올린 경험이 있었다.
도진은 빅터를 활용해 소비자들의 니즈를 파악하고 매출을 발생시켰던 경험을 엔터테인먼트 시장에 대입해 프레젠테이션했다.
엔터테인먼트 사업에서 빅테이터를 활용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빅터의 첫 계약 회사였던 C 홈쇼핑이 4년간 십수 배 몸집을 불린 것처럼 빅데이터를 활용한 마케팅을 한다면 HS 엔터테인먼트의 규모 또한 키울 수 있지 않을까.
빅데이터를 통해 세계인들의 취향과 기호를 알아낼 수만 있다면 한국에서 세계적인 스타를 배출하는 일 또한 가능하지 않을까.
정장 차림보다는 맨투맨에 청바지가 더 어울릴 법한 어린 청년은 5년 단위로 HS 엔터테인먼트의 비전을 제시했다.
어색한 정장 차림에 서류 가방 달랑 하날 들고 HS 엔터테인먼트에 쳐들어왔던 청년은 그 단 한 번의 프레젠테이션으로 현숙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
이미 빅테이터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장은 마련되어 있었다.
스마트폰 보급률이 늘어나면서 사람들이 손에 컴퓨터를 들고 다니는 것과 마찬가지인 세상이 되었다.
이 변화의 물결을 현숙이 모를 리가 없었다.
현숙은 그날 스물여섯 살 청년 류도진에게 반했고, 도진이 말하는 비전을 믿는 첫 번째 추종자이자 든든한 조력자가 되었다.
현숙은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했다. 빅터 프로그램을 5년 독점 임대하는 조건으로 계약금 5억 원을 내걸었다.
사실 그녀에게는 파격이었지만 도진에게는 전혀 메리트가 없는 조건이었다.
빅터 프로그램의 가치와 첫 번째 삶에서의 성공사례로 보았을 때 5억 원은 큰돈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독점 임대 조건이었다.
지금이라도 과거처럼 프로그램을 여러 회사에 납품한다면 이틀 안에 계약금 5억 원을 마련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곳은 다름 아닌 선아의 어머니가 사장으로 있는 회사였다.
도진은 지난 삶에서 지키지 못한 약속이 있었다. 그랬기에 현숙이 제시하는 조건 그대로 HS 엔터테인먼트와 계약했다.
현숙은 또 다른 조건을 하나 더 달았다. 도진이 입사해 직접 빅터 프로그램을 관리하고 회사의 홍보와 마케팅에 빅터를 활용해보란 조건이었다.
선아의 말대로 그녀 어머니는 셈에 밝았다. 골수까지 뽑아먹겠단 속내가 눈에 보였지만 도진은 그 조건 또한 수용했다.
그렇게 해 도진은 HS 엔터테인먼트에 특채로 입사했다.
2년 뒤 공채로 입사한 선아는 도진과 같은 팀에 배정되었다.
도진은 다시 또 제 주변으로 온 선아를 보며 첫 번째 삶에서 지키지 못했던 약속을 떠올렸다.
‘꽁이 아빠. 나 돈 좋아하는 거 알지? 나중에 돈 많이 벌어서 가져다줘. 그거면 돼. 우리 엄마보다 더 부자 만들어줄 거잖아. 그치?’
처음 만난 자리에서 돈을 좋아한다고 털어놓은 그녀였지만, 정작 그녀는 돈 한 푼을 제대로 쓰지 못했다.
3천 원짜리 생닭을 2백 원 깎아서 사야 했고, 3만 원을 벌기 위해 새벽 2시부터 두 시간 동안 임신한 몸으로 목욕탕 청소를 다녔다.
‘꽁이 아빠가 빅터 완성하면 그 뒤로는 쭉 사모님으로 살 건데 지금 고생 좀 하면 어때.’
이번 삶에서 다시 빅터를 만든 것은 지난 삶에서 선아에게 주지 못한 걸 주기 위해서였다.
두 번째 삶에서 도진은 오직 선아를 위해 일했다.
HS 엔터테인먼트의 자산가치가 커지면 그 혜택이 사장 딸인 선아에게 돌아갈 것이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HS 엔터테인먼트에 헌신했다.
그렇게 그가 일에 전념하는 사이, 선아에게 사랑하는 남자가 생겼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선아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그랬기에 그녀의 사랑이 자신을 향하지 않을지라도 괜찮았다.
아니, 자신은 선아에게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기에, 예전 생에서 그녀가 죽는 날까지 고생만 시켰던 사람이기에 차라리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선아의 사랑을 진심으로 응원했다. 일부러 더 선아에게 선을 긋고 한 발짝 떨어져서 그녀를 지켜보았다.
하필이면 선아가 사랑하는 남자는 과거의 저처럼 가난한 남자였다. 도진은 그 남자가 회사에서 실권을 쥘 수 있도록 팀의 수장으로 끌어주었다. 그래야지만 선아가 바라던 대로 사모님으로 살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선아는 그 남자와 결혼을 했다.
결혼식장에 누구보다 먼저 도착해 웨딩드레스를 입은 선아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직접 골랐을 웨딩홀과 홀을 가득 채운 생화 장식을 눈에 담았다.
모두 다 제가 주지 못했던 것이고, 제가 주지 못했던 행복을 누리는 선아의 모습이 좋아서 그녀의 행복한 결혼 생활을 진심으로 염원했다.
그러나 세상일은 다 그의 바람대로 되지 않았다.
선아를 사랑하는 듯 보였던 남자는 결혼과 동시에 선아에게 심드렁해졌고, 선아는 외로운 결혼 생활을 시작했다.
임신을 한 선아는 남편의 권유로 사직을 했다.
이따금 선아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했지만, 저의 관심이 불순하게 비쳐 선아의 평판을 해칠 수도 있기에 그마저도 참았다.
그러나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계기가 생겼다. 지방 병원에서 출산하면서 선아가 의료사고를 당했다. 선아는 무사했지만, 아기가 위독하다고 했다.
소식을 들은 도진은 아버지에게로 달려갔다. 이 삶에서 아버지의 뜻대로 살지 않을 것이기에 손 한번 벌린 적 없지만, 그날 처음으로 도와달라며 고갤 숙였다.
그렇게 해 이동용 인큐베이터가 실린 앰뷸런스를 타고 선아 모자에게로 향했다.
출산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선아는 몸의 마디마디가 모두 퉁퉁 부어 있었다. 그녀는 몸도 추스르지 못한 상태로 인큐베이터 속 아이를 보며 울었다.
선아 모자를 태우고 서울로 오는 길, 선아는 아기를 보며 말했다.
‘세빈이야. 이세빈.’
그 순간, 두 번째 삶에서 눈을 뜨고 10년 동안을 쌓은 마음의 벽이 와르르 허물어졌다.
첫 번째 삶. 만삭의 선아와 새벽길에 지었던 이름. 첫 번째 삶을 기억하지 못하는 선아였지만, 그 이름만은 그녀의 뇌리 한구석에 남아 있는 듯했다.
‘꽁이 아빠, 꽁이 태어나면 이름 뭐로 지을까?’
‘뭐로 짓고 싶은데?’
‘세빈이 어때?’
‘세빈이? 너무 여자애 같지 않아?’
‘그래? 나는 중성적인 이름이라고 생각했는데.’
‘류세빈…. 류세빈……. 음……. 막상 발음해보니까 좋은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그럼 세빈이 할까?’
‘그래. 세빈이 하자.’
‘꽁이야. 네 이름 말이야. 세빈이로 정했어. 너도 맘에 들지? 어? 꽁이 아빠. 세빈이라 그러니까 갑자기 막 신이 나서 태동한다? 우와, 신기해. 꽁이가 우리 말 알아듣나 봐.’
도진은 인큐베이터 속에 잠은 남자아이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선아와 그녀 남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이지만, 세빈이란 그 이름을 듣는 그 순간부터 도진은 세빈이를 남으로 생각할 수 없었다.
인생의 목적이 선아의 행복이 아니라 선아와 세빈이의 행복으로 바뀌었다.
선아뿐 아니라 세빈이에게는 무얼 주어도 아깝지 않을 것만 같았다.
선아의 결혼 생활은 완벽하지 않았지만, 세빈이가 태어난 이후로 그녀는 모든 삶을 통틀어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세빈이를 사랑하는 선아의 모습, 세빈이를 키우는 선아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 또한 진정으로 행복해졌다.
선아와 선아를 닮은 아이가 웃을 때마다 도진은 조금씩 더 행복해져 갔다.
세빈이 옆에서 행복한 선아를 지켜보면서 도진은 제가 두 번째 삶을 살게 된 게 이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선아와 세빈이를 지켜보던 시절이 그의 두 번의 인생을 통틀어서 가장 좋은 시절이었다.
그래, 그런 좋은 시절이 있었다.
도진에게도 잊고 싶지 않은 그런 좋은 시절이 있었다.
***
중환자실 앞 대기실 창문으로 해가 완전히 저물었다.
저녁 8시. 하루 중 두 번째 면회가 시작되는 시간에 이곳 분위기는 저녁 면회를 앞두고는 한층 더 가라앉는다.
‘오늘은 깨어나겠지.’라면서 희망을 품는 아침과 달리, 저녁때 이 앞에 모인 보호자들은 ‘오늘도 역시 깨어나지 않았다.’라며 깊은 절망에 빠진다.
그런 날이 40일이 넘게 반복되었다.
그사이 선아는 조금 더 대담해져서 안면을 익힌 중환자 보호자들에게 도진의 상태를 묻기 시작했다.
그렇게 물어본 지 일주일 만에 도진의 옆자리 환자의 보호자를 사귀게 되었다.
“오늘은 링거 주사가 더 많아진 거 같어. 전에는 노란 거 한 팩에 말간 거 두 팩 달려 있었는데, 오늘은 허연 것도 한 팩 더 매달려 있더라고. 그나마 머리에 감고 있던 사과 포장지 같은 모자는 벗었는데 말이여. 수액이 늘어난 거 보니까 좋아진 것만은 아닌 거 같어.”
그녀는 남편 면회를 다녀올 때마다 도진이 수액을 몇 팩이나 맞고 있는지, 얼굴의 상처는 나았는지를 보았다가 선아에게 설명해주었다.
“감사해요, 할머니. 정말 감사해요.”
아침저녁으로 신세 지는 게 미안했던 선아는 약국에서 사 온 성인용 기저귀 세 팩을 내밀었다. 의식 없이 누운 할머니의 남편을 위해 준비한 것이었다.
“뭘 이런 걸 주고 그래. 나도 이 나이 이때껏 돈 벌고 있어서 영감 기저귀 살 돈은 있어. 이래 봬도 내가 목욕탕 주인이여. 여탕 남탕 다 청소할 정도로 말짱하다고. 해서 기저귀 살 돈은 있어.”
“할머니 건강하시고 능력 있으신 거 저도 알아요. 그치만 이렇게 해야 제가 덜 죄송해서 그래요. 이거 드리고 마음 편하게 부탁드리려고 그러는 거니까 받아주세요.”
매일 이렇게 만난 결과, 선아는 그녀가 작은 목욕탕을 운영하고 있다는 것도, 새벽 2시부터 5시까지 청소를 하고 아침을 먹은 후에 새벽 버스를 타고 아침 면회에 온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도와주는 이가 있을 땐 두 시간이면 하는 목욕탕 청소가 이제는 세 시간이 걸린다면서,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고, 늙은 영감이 이제야 좀 집에 붙어 있나 했더니 누워서 돈을 축낸다고 푸념을 하곤 했다.
그럼에도 아침저녁의 두 번 면회 시간마다 이곳에 제일 먼저 도착하는 이는 바로 그녀였다.
“처자야말로 얼굴이 반쪽이 됐는데, 다음번에는 기저귀 같은 거 사지 말고 그 돈으로 아침밥이라도 사 먹고 와. 젊다고 밥 굶고 다니지 말고.”
그러면서 영감이 이 기저귀 다 쓰도록 살아 있느니 이제는 편하게 저세상 가는 게 낫다는 마음에도 없는 소릴 했다.
“할아버지도 얼른 깨어나시길 기도할게요.”
“그려. 내일 아침에 봐.”
중환자실 데스크에 기저귀를 맡긴 그녀가 선아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녀가 지나간 자리에 희미한 락스 냄새가 스쳤다.
선아도 그녀를 따라 엘리베이터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 앞서 걷고 있던 목욕탕 주인 할머니가 뒤돌아섰다.
“근데 처자.”
“네? 하실 말씀 있으세요?”
“처자는 이름이 뭐여?”
“윤선아예요.”
“그럼 내일 아침에 윤선아 양이 전해달랬다고 말 전해줄 테니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