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첫 경험
마침내 중환자실의 유리문이 열리고 흰 가운을 입은 응급의학과 교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뒤를 피로 짙은 얼굴의 레지던트들이 따르고 있었다.
교수가 복도로 나올 때부터 울던 여자는 눈물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최지환 씨 보호자분.”
환자의 이름이 호명되자마자 여자는 교수 앞으로 달려갔다.
선아는 혹시나 오늘은 교수의 입에서 희망적인 말이 나올까 기대했지만, 오늘도 역시 비슷한 답이 돌아왔다.
수술은 성공적이었지만 경과를 지켜봐야 한다, 혈압과 맥박은 불안정하고, 언제 의식이 돌아올지는 확답을 할 수 없다. 선아는 한 달간 이 자리에서 저와 비슷한 대답을 하는 교수의 모습을 스무 번도 더 보았다.
매번 교수의 앞에 선 보호자는 달라졌지만, 그들 대부분이 절망스러운 답을 들었다. 그 정도로 중환자실 유리문 너머의 환자들은 위중했다.
3분도 되지 않는 짧은 면담이 끝났다. 응급의학과 교수는 보호자를 향해 짧은 목인사를 한 후 다시 걷기 시작했고, 보호자는 그의 흰 가운이라도 잡아 보려다가 공중에서 손을 말아 쥐었다.
선아는 교수와 그 일행을 따라 걸었다.
일직선으로 난 복도를 걸어간 그들은 의료진 ID카드로만 들어갈 수 있는 구역 앞에 섰다. 레지던트 중 가장 어려 보이는 이가 흰 가운에서 ID카드를 꺼냈다.
그가 출입문 옆 전자기기에 카드를 데려는 순간, 선아가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교수님!”
“!”
“류도진 환자 상태는 호전되었나요?”
교수는 이제 선아를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그녀는 한 달째 매일 그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었으니까.
“몸은 좀 어떤가요? 의식이 돌아올 기미는 없나요?”
선아는 도진과 그 어떤 사이도 아니었다. 좋아한다는 고백을 들었지만, 그와 미래를 약속한 사이도 아니었고, 그의 가족도 아니었다. 그랬기에 의료진을 통해 도진의 소식을 들을 자격이 없었다. 당연히 면회도 허용되지 않았다.
교수는 곤란한 얼굴로 선아를 바라보았다.
도진은 이 병원 이사장의 막내아들이었다. 병원 이사장에겐 사경을 헤매는 막내아들을 포함한 다섯 아들이 있었는데, 늦둥이 아들을 제외하고 그들 모두 중년의 나이였다.
장가를 간 네 아들의 처가 이렇게 젊을 리가 없기에, 이 여자는 도진의 가족이 아니라 판단했다. 그랬기에 교수는 선아에게 도진의 상태를 함구해왔다.
그러나 이런 대치가 한 달째 이어진 결과, 이제는 교수도 그녀를 향해 도진의 상태에 대해 짤막하게나마 언질을 주기 시작했다.
“다발성 골절 수술은 성공적이었지만, 혈압과 심박이 불안정합니다. 약물로 조절하고 있지만, 어젯밤에도 심장발작이 있었어요.”
또 심장발작이라니…….
“의식은…….”
“의식이 언제 돌아올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다른 중환자실 환자의 보호자들이 듣는 것과 거의 같은 대답이었다. 선아의 고개가 바닥을 향해 떨어지는 순간, 그는 지금까지는 한 번도 하지 않았던 말을 덧붙였다.
“의료진들도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함께 기다려주십시오.”
출입구가 열렸고, 교수 일행이 그 안으로 들어갔다. 선아는 멍하니 유리문 너머로 사라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았다.
회사로 출근을 해야 하지만 기운이 나지 않았다.
그 사이 계약했던 차도 출고가 되었다. 도진의 차를 어설프게 운전하던 선아는 도진의 면회를 다닌다고 아침저녁으로 병원을 오가면서 운전도 늘었다.
그러나 정작 선아에게 운전을 다시 가르쳤던 도진은 중환자실에 누운 채였다.
***
도진은 두 번째 삶에서 다시 선아를 만났다.
처음 만남과 같은 방식이었다.
프로그래밍 동아리와 마케팅 동아리의 협업 시작에 앞서 자기소개하는 자리였다.
“안녕하세요. 마케팅 동아리 윤선아입니다. 경영학과에 재학 중이고요. 2학년입니다.”
대학 취업지원처에서는 동아리 지원금을 놓고 동아리 간 협력 프로그램을 진행하였다.
회사의 프로세스는 어느 한 조직만으로 돌아가지 않기에 사회생활과 비슷한 경험을 장려하기 위한 프로그램이었다.
프로그래밍 동아리는 마케팅 동아리와 매칭되었고, 이 첫 소개 자리에서 도진은 선아에게 첫눈에 반했었다.
“제 꿈은 돈을 많이 벌어서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제가 마케팅을 공부하는 것도 마케팅이 돈을 더 많이 버는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도 역시 도진의 눈은 홀린 듯 선아에게 닿아 떨어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누구나 돈을 원하지만, 그 욕구를 내비치는 순간 속물적이란 평가를 듣는다.
그러나 돈에 대한 욕구를 내비치는 스물두 살의 선아의 눈빛이 너무나 해맑았기에 오히려 솔직해 보였다.
“그런 의미에서 차세대 산업을 이끌어갈 프로그래밍 동아리와 협력할 수 있게 돼 기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자기소개를 마친 선아를 향해 커다란 박수갈채가 이어졌다.
동아리 방에서의 첫 모임 이후 프로그래밍 동아리와 마케팅 동아리의 술자리가 이어졌지만, 도진은 그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다.
마케팅 동아리 여학생들의 눈에 아쉬움이 내비쳤지만, 도진은 그들에게서 등을 돌려 기숙사 건물로 향했다.
그날 밤 그는 의과대학 기숙사에 와서 시험 공부에 매진했다.
첫 번째 삶에서의 이날, 선아와 도진은 술자리를 계기로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도진은 재기발랄한 선아에게, 선아는 눈에 띄게 잘생긴 도진에게 첫눈에 반했고, 스물다섯 살의 류도진과 스물한 살의 윤선아는 얼마 지나지 않아 캠퍼스 커플이 되었다.
두 사람은 도진의 낡은 자취방에서 첫 경험을 했다. 갑작스러운 행위의 마지막, 미숙한 갈무리로 아이가 생겼다.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도진이었지만, 선아와 아이를 책임지기 위해 동분서주했었다. 돈을 끌어모아 자취방보다 큰 방으로 옮기고, 프로그램 개발과 납품에 박차를 가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선아와 아이를 남부럽지 않게 살게 해주고 싶었던 삶의 목적은 선아의 죽음과 함께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도진은 선아를 잃은 후, 스물아홉 살이 될 때까지 4년을 더 살았다.
그가 만든 빅터 프로그램은 C 홈쇼핑 회사의 규모를 키우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빅터 프로그램을 납품한 지 1년이 지나지 않아, 그에게 프로그램 임대 문의를 해오는 회사가 여덟 곳으로 늘어났다.
빅터 프로그램의 개발에 성공한 지 3년이 되었을 때는 국내외 쇼핑 사이트 대부분에서 빅터 프로그램을 도입해 빅데이터를 활용했다.
소비자들의 니즈 파악에 성공한 업체들은 무서울 정도로 몸집을 불렸다. 한국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프로그램 활용에 대한 문의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프로그램에 대한 독점 임대 계약을 하지 않은 덕에 도진은 수많은 회사에 빅터 프로그램을 임대할 수 있었다.
첫 1억 원의 납품 계약에 가슴이 부풀었었던 청년은 서른 살이 되기도 전에 수백억 자산을 가진 거부가 되었지만 정작 그의 삶은 행복하지 않았다.
부자가 되어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던 아내와 자식이 떠난 뒤였다.
웨딩드레스도 입혀주지 못했던 아내, 만삭의 몸을 이끌고 목욕탕 청소를 다닌 아내는 프로그램 납품 성공에 대한 소식도 듣지 못했고, 부모로부터 인정받았단 소식도 듣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선아가 떠난 지 4년째 되던 날. 스물아홉 살의 도진은 더는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었다.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선아를 다시 보고 싶습니다.’
그렇게 기도했던 것이 첫 번째 삶에서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도진은 제 첫 번째 삶의 마지막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자신이 죽은 것인지, 아니면 영혼만이 과거로 옮겨 온 것인지 모르는 상태로 두 번째 삶이 시작되었다.
본가 자신의 방 침대에서 눈을 떴을 때, 그는 열아홉 살이었다.
두 번째 삶에서의 첫 기억이었다.
처음엔 자신이 죽어 사후세계에 온 게 아닐까 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제게 일어난 일이 설명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눈뜬 세상은 과거 열아홉 살 때의 세상과 모든 것이 같았다.
두 번째 삶에서 도진이 처음으로 한 일은 선아의 본가 인근의 중학교에 찾아간 것이었다.
하교 시간, 교복을 입고 등 가방을 멘 단발머리의 선아가 교문으로 나오고 있었다. 키도 훨씬 작고 앳된 얼굴이지만 선아가 분명했다.
엔터테인먼트사 사장의 외동딸인 선아는 남부러운 것 없는 학창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그와 함께 살 적에 신었던 8천 원짜리 운동화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메이커 운동화를 신고, 브랜드 로고가 큼지막하게 박힌 패딩을 입은 전형적인 중학생의 모습이었다.
첫 번째 삶에서 자신이 선아의 인생에 끼어들지 않았더라면 선아는 내내 그렇게 풍족하게 살았을 것이다.
두 번째 삶에서 선아를 훔쳐보고 돌아온 그 날, 도진은 공대에 진학할 거냐며 화를 내는 아버지에게 의대에 가겠다고 선언했다.
지난 삶, 가족과 절연함으로써 모든 지원이 끊겼다. 아버지가 저를 버렸다 생각했지만 실은 자신이 아버지를 버린 것이었다.
그렇게 제 발로 가난을 자처함으로써 선아는 하지 않아도 됐을 고생을 했다.
그러니 이 삶에서는 시행착오 따위 겪고 싶지 않았다. 이번 삶에서는 누구에게도 가슴 아픈 기억을 남기기 싫었다.
그랬기에 도진은 뜻에도 없는 의대 공부에 매진하면서 다시 빅터 프로그램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지난 삶에서 프로그램 개발과 납품, 유지, 보수에 이르기까지 1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빅터 프로그램을 다루었다.
배부른 아내를 거실에 재우고 창고 방에서 열 오른 컴퓨터를 달래가면서 했던 일이기에, 빅터 프로그램을 다시 만드는 것은 도진에게 쉬운 일이었다.
도진은 밤잠을 줄여가며 학업과 프로그램 개발을 병행했다. 그 결과 첫 번째 삶에서는 스물다섯 살 겨울이 되어서야 완성할 수 있었던 빅터 프로그램을 스물한 살에 완성했다.
프로그램을 완성한 후, 도진은 일반병으로 군대에 자원입대했다. 아버지의 반대가 따라올 줄 알았지만, 이번엔 도진의 뜻대로 하게 내버려 두셨다.
군의관으로 가지 않고 일반병으로 군대에 가는 괴짜가 자기 아들일 줄 몰랐다고 말씀하셨지만, 얼굴은 허허 웃고 계셨다.
아버지를 안심시키기 위해 의대에 입학했고 성적 또한 최상위권으로 유지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실망할 만한 행동을 한 적이 없으니 아버지 또한 그의 모든 행동을 믿어주는 것이었다.
그렇게 군대를 제대한 후, 의대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과정을 마쳤다.
두 번째 삶에서 도진이 의사가 되지 않겠다고 털어놓은 때는 대학교를 졸업하고 나서였다.
역시나 반대가 따라왔지만, 첫 번째 삶에서 의대에 가지 않겠다고 선언했을 때보다도 미약한 반대였다.
도진은 3년 안에 성공하지 못하면 아버지 뜻대로 의사가 되겠노라 약속하고 허락을 받아냈다.
대학을 졸업한 도진은 자신이 개발한 빅터 프로그램을 들고 HS 엔터테인먼트에 찾아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선아와 꼭 닮은 그녀의 어머니를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