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고드는 밤-75화 (75/85)

75화. 큰 사람

선아는 놀란 눈으로 여탕에 들어온 목욕탕 주인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할머니는 놀랄 거 없다는 듯 손사래를 치고 유리창 너머에서 청소 중인 도진을 바라보았다.

욕실에 물을 뿌리며 세제를 씻어내던 도진은 물바가지로는 성에 차지 않는지 대야로 물을 뿌리며 탕을 씻어내고 있었다.

청소를 마친 그가 바가지와 대야를 제 자리에 정리하고 일어섰다.

유리창 너머 목욕탕 주인 할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도진은 그녀를 향해 고갤 꾸벅 숙여 인사한 후 청소도구를 챙겨 들고 탈의실로 나왔다.

“신랑이 왔구먼. 잘 왔으이. 왔으니 처 좀 데리고 가서 일 좀 못 나오게 혀. 이제는 내가 조마조마해서 일을 못 시키것어.”

그녀는 탈의실 한편의 냉장고에서 초콜릿 우유를 꺼내 선아의 손에 쥐여주었다.

“냉큼 하나 먹어. 미국 거여. 미국 거.”

갈색 토끼가 그러진 우유 팩엔 파란색으로 영어 이름이 쓰여 있었다. 할머니는 영어를 읽지 못했지만, 그녀가 아는 한 미제가 가장 좋은 것이었기에 선아에게는 늘 토끼가 그려진 초콜릿 우유를 내주었다.

초콜릿을 좋아하는 선아는 우유를 받아 맛있게 마셨다.

“미국 걸 먹어야 애가 코쟁이들처럼 크게 자라지. 내가 셋째 가졌을 때 미군 부대에서 나오는 빵이랑 쪼꼬릿을 많이 얻어먹었거든. 그래서인가, 우리 셋째가 미국놈들만치 키가 커.”

할머니는 초콜릿 우유 또 한 팩을 꺼내 도진에게 건네주었다.

“일하는 거 보니까 처자보다야 신랑이 낫구먼. 처자는 배가 남산이 됐으니 쉬고, 일해야 하거들랑 차라리 신랑을 보내. 우리 셋째처럼 키도 크고 일도 시원시원하게 잘하는구먼.”

그러자 초콜릿 우유를 마시던 선아가 정색을 했다.

“할머니. 우리 꽁이 아빠 노는 사람 아니거든요. 제가 저번에 말했잖아요. 컴퓨터로 사람들이 뭘 좋아하는지 알아내는 걸 만들고 있다니까요.”

“신랑이 무당이여? 사람이 속을 들여다보는 걸 어찌 만든다는 거여.”

“그러니까 대단한 거죠. 할머니도 할아버지 학교 졸업할 때까지 자식들 업고 일했다면서요. 저도 우리 신랑 뒷바라지 잘해서 큰 사람 만들 거거든요.”

“그려 알았어. 그래도 이제는 일 나오지 말고 집에서 몸조리 혀.”

그렇게 말하면서 노인은 탈의실 매대 뒤에 숨겨둔 종이봉투 하나를 꺼내왔다.

“속옷 가게에 가서 애 내복 두 벌 샀어. 일부러 풍신한 거로 샀으니까 애 낳으면 접어서 입혀. 세 살까진 입을 수 있을 겨. 양말도 서비스로 넣어달라고 했으니까 애 낳고 두 켤레씩 켜 신고.”

“이런 거 안 주셔도 되는데…….”

“내가 처자 쫓아내는 거 같아서 마음이 불편해서 그래. 출산하고 몸 풀고 다시오면 맨날 나와도 구박 안 할 테니까 그때 다시 와.”

선아는 머뭇거리면서 할머니가 건네주는 걸 받았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안 볼 것도 아닌데 인사말이 왜 그려. 애 낳고 애 키우다 보면 맘이 울적할 때가 있으니까 삼칠일 지나고 애 안고 놀러 와.”

“네. 꼭 아기 안고 놀러 올게요.”

“그려. 그동안 고생했어.”

선아와 도진은 노인에게 허리 숙여 인사한 후 목욕탕을 나왔다. 노인은 두 사람을 배웅하고는 목욕탕에 딸린 살림집에 들어갔다.

목욕탕을 나온 도진은 선아의 손에서 종이가방을 건네받았다. 두 사람은 손을 꼭 잡은 채 인적 없는 새벽길을 걸었다.

“할머니가 허리가 안 좋아서 일 나온 거라면서.”

“허리 아프신 건 진짜거든……. 낼모레 비 소식 있잖아……. 그래서 진짜 아프셨거든…….”

그간 거짓말한 걸 들켜서인가 선아는 얼굴이 벌게진 채 변명을 늘어놓았다.

도진은 선아와 맞잡은 손을 과 잠바 안에 넣었다. 그러곤 선아의 차가운 손끝을 꽉 잡아주었다.

“한 달만 기다려줘. 한 달 뒤에 꽁이 키울 집도 구하고, 그간 못 먹은 거, 못 산 거 다 사줄게.”

“꽁이 아빠 바보. 내가 못 먹고 못 산 게 어딨냐. 나 목욕탕 일 하면서 출산 준비도 다 해놓은 여자야, 왜 이러셔.”

선아는 도진에게 잡힌 손을 빼고 제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주머니에서 만 원짜리 세 장을 꺼낸 선아는 돈을 공중에 대고 팔랑팔랑 흔들었다.

“이거 봐, 진짜지?”

“잘났어, 아주.”

“그럼. 잘났지. 오늘은 꽁이 아빠가 3천 원 치 몫은 했으니까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3천 원 치 몫이라니. 만 원어치는 했지.”

“3천 원 치 몫이거든.”

“만 원어치.”

“어쨌든 꽁이 아빠. 우리 새벽 시장 가자. 내가 맛있는 거 쏠게. 어제는 돼지고기 먹었으니까 오늘은 닭 사다가 백숙 해 먹자.”

“그래. 그러자.”

두 사람은 손을 잡고 큰 건 건너편에 있는 새벽 시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규모가 작은 시장이었지만, 시장은 새벽부터 활기를 띠고 있었다. 선아는 노란빛 백열등 켜진 길을 신이 난 듯 걸었다.

둘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을 수 없을 만큼 길이 좁았기에 도진은 선아의 뒤를 따라 걸었다.

롱패딩을 입은 만삭의 선아는 그녀가 좋아하는 펭귄 캐릭터 같았다. 아내를 보고 걷는 도진의 눈매가 반달로 둥글게 접혔다.

한참을 걷다가 정육점 앞에서 멈춘 선아는 유리 쇼케이스 안의 커다란 닭을 손으로 가리켰다.

“사장님, 이거요.”

“그건 큰 닭이라 3천 원.”

“2백 원만 깎아주세요.”

“아이고, 아가씨 또 그런다. 3천 원도 거저 주는 거야.”

서로 안면이 있는지, 중년의 정육점 여주인은 익숙하게 선아의 말을 받아쳤다.

“저 단골이잖아요. 어제도 뒷다릿살 사 갔잖아요.”

선아가 만 원을 내밀자, 정육점 주인은 허리에 찬 힙색을 열어 잔돈을 꺼냈다.

“이렇게 팔아서 남는 것도 없다니까 그러네.”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녀는 거스름돈 7천 원에 2백 원을 얹어 선아에게 내밀었다.

“많이 파세요! 내일도 또 올게요.”

“응. 조심히 들어가.”

도진이 생닭이 든 봉투를 받으려 하자, 선아가 냉큼 가로챘다. 그녀는 생닭이 든 까만 봉투를 든 채 총총총 시장길을 걸었다.

다시 시장 입구로 온 선아는 좌판에 앉은 노인에게 양파 두 개와 마늘 한 줌을 샀다. 노인이 양파와 마늘을 까만 봉투에 담아서 건네자 도진이 손을 뻗어 봉투를 받았다.

“꽁이 아빠. 까만 봉투는 나 줘.”

선아가 봉투를 달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됐어. 너야말로 생닭 든 봉투 이리 줘.”

“싫어. 꽁이 아빠는 종이가방 들어. 까만 봉투는 내가 들 거야.”

“됐어.”

그러자 선아가 도진의 손에서 까만 봉투를 빼앗아 갔다.

선아의 고집을 아는 도진은 봉투를 빼앗는 대신 그녀의 손을 잡았다.

“무거우면 말해.”

“무거울 리가 없잖아. 게다가 나는 꽁이 아빠가 까만 봉투 드는 게 싫은걸.”

“너는 들면서 나는 왜?”

“이렇게 잘생겼는데 모양 빠지잖아.”

“뭐래.”

선아가 한 걸음 한 걸음 뗄 때마다 그녀의 손에 들린 가만 봉투가 바스락거렸다.

선아는 부른 배를 앞으로 내민 채 천천히 새벽길을 걸었다. 새벽 2시부터 나와서 일했는데도 그녀의 얼굴엔 피곤한 기색이 하나 없었다.

“나는 우리 꽁이 아빠가 비닐봉지 같은 거 든 모습 말고 서류 가방 들고 정장 입고 출근하는 모습 보고 싶어. 꽁이 아빠는 키도 크고 잘생겨서 정장 입으면 되게 멋있을 거 같단 말이야. 꼭 연예인 같을 거야.”

도진은 선아가 말하는 걸 머릿속에 저장해두었다. 그러면서 취직을 하면 정장을 입고 서류 가방을 들고 다녀야겠다고 생각했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게 남자였다. 도진은 선아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기꺼이 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꽁이 아빠, 나는 있잖아.”

“응.”

“꽁이 아빠가 두 번 묶어줘서 꽉 묶인 운동화 신고 이 길 걷는 게 참 좋다? 운동화가 내 발등을 꽉 쥐고 있는 게 되게 든든한 느낌이 들거든.”

새벽길에 선아의 말소리는 마치 배경음악 같았다.

“난 있잖아. 목욕탕 일 다녔던 것도, 시장에서 돼지 뒷다릿살 사서 갈비 양념에 재 먹었던 것도, 8천 원짜리 하얀 운동화 신고 이 길 다니던 것도 오래오래 기억하고 싶어.”

홀로 걸을 땐 아무 생각이 들지 않던 이 길이 그녀의 말소리 덕분에 아름다워 보이기 시작했다.

“나중에 꽁이한테도 말해줘야지. 꽁이야. 아빠랑 엄마랑 이렇게 행복하게 살았었다? 하면서.”

선아가 키득거리면서 웃었다. 그녀의 웃음소리가 도진의 마음을 간지럽혔다.

집 가까이에 다다랐을 때였다. 혼자 중얼중얼 이야길 하던 선아가 도진에게 질문을 했다.

“꽁이 아빠, 꽁이 태어나면 이름 뭘로 지을까?”

“뭘로 짓고 싶은데?”

“세빈이 어때?”

“세빈이? 너무 여자애 같지 않아?”

“그래? 나는 중성적인 이름이라고 생각했는데.”

“류세빈…… 류세빈…….”

도진은 선아가 지은 꽁이의 이름을 발음해보았다.

“음……. 막상 발음해보니까 좋은 것 같기도 하고.”

“그치? 그럼 세빈이 할까?”

“그래. 세빈이 하자.”

걸음을 멈춘 선아는 크게 부른 배 위에 손을 얹었다. 배를 내려다보는 그녀의 눈에 애정이 뚝뚝 떨어졌다.

“꽁이야. 네 이름 말이야. 세빈이로 정했어. 너도 맘에 들지? 어? 꽁이 아빠.”

선아는 깍지 껴 잡은 도진의 손을 가져다가 제 배 위에 올려놓았다.

“세빈이라 그러니까 갑자기 막 신이 나서 태동한다? 우와, 신기해. 꽁이가 우리 말 알아듣나 봐.”

선아의 말대로 패딩 겉으로도 느껴질 정도로 아이가 힘차게 태동을 했다.

부른 배를 바라보는 도진의 눈빛도 선아의 눈빛처럼 따스한 빛깔로 물들었다.

***

한 달이 지났다.

빅터 프로그램을 수없이 테스트하고 오류를 수정한 결과, 납품 기일 안에 프로그램 시연을 마친 도진이 회사 건물 밖으로 나왔다.

그간 조금씩 생활비를 모았던 선아는 이날을 위해 아웃렛에서 정장을 장만했다. 도진은 길이 수선도 하지 않은 아웃렛 정장을 모델처럼 소화했다.

방금 프로그램 납품 계약서 최종본에 사인을 한 도진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버스 정류장 앞에 섰다.

빅터 시연은 성공적이었다.

이 소식을 제일 먼저 선아에게 알려주고 싶었지만, 오늘 아침 선아는 계부의 연락을 받고 집을 나섰다.

다정한 성격이라는 선아의 계부는 선아의 어머니를 대신해 선아에게 연락을 해왔다. 그녀가 자존심 때문에 선아에게 먼저 연락하지 못한다고, 선아가 먼저 손 내밀어 줄 수 있느냔 연락이었다.

선아는 마지못해 수락하는 척 계부의 제안을 받아들였지만, 집을 나서는 그녀의 얼굴엔 오랜만에 엄마를 만난다는 설렘이 묻어 있었다.

오늘 빅터 시연을 성공적으로 마쳤단 이야길 들으면 선아가 제일 기뻐할 것이다.

거기에 더해 선아가 기뻐할 만한 또 다른 소식을 전하고 싶었던 도진은 버스를 타고 서울의 한 상급병원으로 향했다.

그가 찾아간 곳은 아버지가 이사장으로 있는 병원이었다. 곧장 이사장실로 찾아간 그는 이사장실 앞 복도에서 6년 만에 아버지를 만났다.

점심시간이 끝나가던 시간이었다.

“아버지.”

“밥은 먹었냐.”

도진의 아버지는 6년 만에 만난 아들에게 밥을 먹었는지부터 물었다.

“안 먹었습니다.”

“옷만 빼입는다고 자신이 생기는 게 아니야. 모름지기 남자는 밥심이다. 밥 굶고 다니면 어딜 가나 주눅 들어 보여. 2시에 회의라 제대로 된 건 못 먹겠지만 이 앞에 가서 우동이라도 먹자.”

6년 만에 만났어도 부모는 부모였다. 점심때 돌아다니는 아들이 끼니를 걸렀을지가 걱정된 것이다.

도진의 아버지는 오랜만에 만난 아들을 데리고 병원 앞에 있는 수타 우동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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