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고드는 밤-74화 (74/85)

74화. 맞닿다

반지하 방 거실 창으로 빛이 새어 들어왔다.

햇볕이 들어오는 게 아니라 날이 밝아지면서 덩달아 집까지 환해진 것이었다.

도진은 창문을 활짝 열어 환기를 하고 좁은 거실 한편에 이불을 깔았다.

창고 같은 방이라도 침실로 쓰면 좋았을 텐데. 선아는 그 방을 도진의 작업실로 내주었다.

프로그래밍 일을 하려면 방해를 받지 말아야 한다고, 자신이 화장실을 들락거리고 주방일을 하면 방해가 될 거라면서 하나밖에 없는 방을 도진에게 내준 것이다.

그 탓에 주방이 딸린 거실을 선아가 쓰게 되었다.

MDF에 필름지를 붙인 싸구려 화장대에 폴리에스터 이불이 가난한 신혼 세간의 전부였지만, 두 사람은 집을 깨끗하게 쓸고 닦으면서 아늑한 보금자리로 만들었다.

좌식 화장대 위에는 도진이 새벽 대리운전을 할 때마다 채워놓은 스킨과 로션, 튼살 크림 같은 것들이 놓여있었다.

서늘한 바람이 음식 냄새를 몰아냈을 즈음. 도진이 이부자리에 누워 옆자릴 토닥였다.

“이리 와. 재워줄게.”

세수를 하고 얼굴에 로션을 바르던 선아가 기다렸다는 듯 도진의 옆에 누웠다.

“근데 나 목욕탕 다녀온 거 어떻게 알았어? 나한테 락스 냄새 많이 났어?”

“아니. 좋은 냄새 났어.”

“거짓말.”

“진짜야. 이렇게 정수리에 코 박고도 잘 수 있어.”

“그러지 마. 락스 냄새 몸에 안 좋다면서.”

도진은 선아의 머리를 흩트렸다.

제 몸엔 락스 냄새가 밸 정도로 일을 해놓고, 정작 도진이 락스 냄새를 맡을까 봐 전전긍긍하는 그녀에게 고맙고 미안해서였다.

“꽁이 아빠, 장난치지 마. 머리 흩트리면 간지럽단 말이야.”

“옛날엔 내가 머리 쓰다듬어주면 좋다고 했으면서.”

“그땐 쓰다듬는 거지 이렇게 흩트리지 않았거든!”

“꽁이 엄마 변했네. 변했어.”

도진은 선아의 머리를 흩트리다 말고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배와 배가 맞닿았다.

선아의 배가 크게 불러 있는 탓에 두 사람 사이에 틈이 생겼다.

도진은 고개를 길게 빼 선아의 입술에 쪽, 입을 맞추었다.

“한 번만 하면 서운해. 뽀뽀 한 번 더 해줘.”

선아가 하라는 대로 한 번 더 입을 맞추었다. 그래도 성에 차지 않는지 선아는 도진의 양 볼을 붙잡고 한 번 더 뽀뽀했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여자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꽁이 아빠, 우리 꽁이 낳고 그거 실컷 하자.”

“그거?”

“그거 있잖아, 그거.”

부끄러운지 선아는 볼을 붉힌 채 도진의 품 안에서 꼼지락거렸다.

도진 또한 그녀 말대로 아이 출산 이후에 열심히 사랑을 나눌 생각이었지만, 짐짓 아닌 척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가 꽁이 생겼잖아. 이제 다시는 안 할 거야.”

“무슨 남자가 그래. 아내가 달려드는데도 거부하는 거야?”

“응. 거부.”

“거부는 무슨! 내가 옷 벗고 달려들면 더 난리를 피울 건데! 내가 우리 꽁이 아빠를 몰라? 하룻밤에 여섯 번도-”

도진은 냉큼 입술을 내밀어 선아의 입을 막았다.

선아의 말이 사실이기는 했다. 점잔을 빼고 있지만, 그도 남자인 터라, 아니, 보통 남자들보다 성욕이 훨씬 강한 터라, 선아가 달려든다면 자신이 더 흥분해 날뛸 것이 뻔했다.

아내의 귀여운 소원처럼 출산 이후에 열심히 사랑을 나누겠지만, 그래도 선아의 못 마친 학업을 위해서 조금은 참아봐야지 하고 생각하는 도진이었다.

“너 복학해서 졸업해야지. 학교 다니다가 임신해서 집에서 쫓겨났잖아.”

선아는 임신 사실을 밝히고 자진해서 집을 나왔다. 제 남자를 하찮게 여기는 엄마와는 못 살겠다는 게 이유였다.

웨딩드레스도 입혀주지 못하는 무능력한 남자의 아이를 가진 걸 선아의 엄마는 못마땅하게 생각했고, 도진에게 폭언을 퍼붓는 걸 목격한 선아는 그대로 집을 나와 다시는 돌아가지 않았다. 그런지가 벌써 반년이 지났다.

“어차피 우리 엄만 나 없이 못 살아.”

그러면서도 언제나 이렇게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했다.

“6개월이나 나 안 봤으면 우리 엄마도 많이 참은 거야. 이제 연락 올 거야.”

사랑받고 자란 이 특유의 자신감이었다. 선아는 자식 이기는 부모 없을 거라고, 결국은 엄마가 먼저 제게 손을 내밀 거라고 믿고 있었다.

“미안해.”

그랬기에 도진은 더욱 미안했다. 자신이 조금이라도 더 능력이 있었더라면 선아가 집을 나와 이렇게 고생하고 있지는 않을 테니까.

자그마한 머리를 손으로 쓸자 선아는 무슨 소릴 하는 거냐는 듯 도진을 바라보았다.

“뭐가 미안해. 꽁이 아빠 나 때문에 조건 비교도 제대로 못 하고 급하게 프로그램 계약한 거 다 아는데. 꽁이 아빠도 노력 많이 했고, 나도 잘하고 있는 거야. 우리 둘 다 열심히 하고 있잖아.”

“…….”

“꽁이 아빠.”

“응.”

“나 돈 좋아하는 거 알지?”

“응.”

“나중에 돈 많이 벌어서 가져다줘. 그럼 돼. 우리 엄마보다 더 부자 만들어줄 거잖아. 그치?”

“응.”

“그거면 됐어. 두고 보라지. 돈 좋아하는 우리 엄마 나중에 내가 코를 아주 납작하게 해줄 거야. 이런 보배가 어딨냐면서 사위 업고 다닐 날이 분명히 올 거라니까.”

잠이 오는지 선아는 눈을 가물가물하다가 이내 감았다.

도진은 선아가 잠들고 나서도 한참 동안 그녀에게 팔베개를 해주었다.

그렇게 한참 뒤, 날이 완전히 밝고 골목을 지나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울리기 시작했을 때, 도진은 선아의 머리에서 팔을 빼내고 자리에서 일어나 반지하 방의 창문을 닫았다.

혹여나 누가 들어올세라 창문의 잠금장치를 잠그고, TV장을 대신해서 쓰고 있는 플라스틱 장으로 가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서 연고와 펭귄 캐릭터가 그려진 밴드를 꺼냈다.

선아는 물에 불어서 손이 빨개진 거라고 했지만, 물에 분 게 아님을 도진은 알고 있었다.

평생 험한 일이라곤 한 적 없는 선아는 손이 약했다. 설거지만 해도 쉽게 습진이 생겼고, 목욕탕 청소를 하고 온 날이면 손끝이 닳았다.

물 한 방울 묻히지 않았던 여린 손은 몸 사리지 않는 노동에 조금씩 조금씩 해져갔다.

잠든 선아의 옆에 앉은 도진은 그녀의 손을 제 무릎에 올려놓고 조심스레 손끝에 약을 발랐다.

그렇게 손끝 손끝마다 약을 얇게 펴 바르고 펭귄이 그려진 밴드를 손가락에 꼼꼼하게 감았다.

***

컴퓨터 앞에 앉은 도진에게 하루 24시간으로 나누어진 시간의 개념은 무의미했다.

한 달 뒤 프로그램 납품에 맞춰 그는 빅터를 수없이 테스트하고 오류를 고쳐나갔다.

일에 몰두한 그에게 24시간은 너무도 짧았고, 컴퓨터 앞에 앉아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건 이제 일상이 되었다.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지듯 까무룩 잠드는 날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멈출 수 없는 건 두 달 후 태어나는 아기 때문이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선아 때문이었다.

웨딩드레스도 입혀주지 못한 아내의 출산만큼은 제대로 챙겨주고 싶었다.

볕이 잘 드는 집에 좋은 육아용품을 채워주고, 돈 걱정 없이 아이만 돌보게 해주고 싶었다.

몸을 회복하는 대로 선아의 가족과 지인들을 모두 초대해 결혼식도 올리고 싶었다.

드레스를 입은 선아의 모습을 상상하면 그는 힘이 절로 솟았다.

그날도 새벽까지 작업을 마치고 나왔을 때, 선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화장실 문이 조금 열려 있었지만, 불이 켜져 있지 않았다.

불을 켜고 시계를 보니 새벽 3시였다. 현관에는 선아의 신발이 보이지 않았다.

“안 간다더니…….”

분명 어제가 마지막이라 하더니 또 목욕탕 청소를 하러 간 걸 테다.

선아는 도진이 세상모르고 잠이 들었을 때 몰래 일을 나가곤 했다. 그러다 어제처럼 청소 다녀온 걸 들킨 날이면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둘러대곤 했다.

마지막이라는 말을 열 번도 넘게 들었지만, 도진은 언제나 그녀의 말에 속아 넘어갔다.

도진은 트레이닝복 위에 두꺼운 과 잠바를 찾아 입었다.

바깥으로 나오니 호박빛 가로등만이 어스름한 골목길을 비추고 있었다.

도진은 새벽길을 걸어 목욕탕으로 향했다. 골목 어귀의 길고양이들이 이따금 도진을 경계하는 듯이 울었다.

낡은 건물 2층에 목욕탕 카운터에 가니 사람은 없고 대신에 여탕과 남탕의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선아가 오는 날이면 목욕탕 주인 할머니는 선아에게 여탕 청소를 맡기고 자신은 남탕을 청소한다고 했다.

도진은 여탕 문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발걸음을 들여놓았다.

이미 탈의실은 청소가 끝난 것인지, 드라이기와 빗은 제 자리에 가지런히 놓여있었고, 바닥도 머리카락 한 올 없이 깨끗했다.

일회용 목욕용품과 음료를 쌓아놓은 판매대로 가니 새 수건이 높게 쌓여 있었다.

도진은 탈의실 안쪽에 놓인 평상 옆에 서서 여탕 안을 바라보았다.

유리창 너머 여탕 안에선 선아가 물이 다 빠진 탕에 들어가 이물질을 거둬내고 있었다.

둥글게 말린 등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아렸다. 임신이 아니었더라면 지금쯤 새 학기를 준비하고 있을 아내다.

예쁜 옷을 입고 친구들과 어울려 캠퍼스를 누빌 아내가 이런 곳에서 고생을 하고 있었다.

도진은 선아 대신 청소할 생각으로 여탕 입구로 향해갔다.

그가 여탕 입구를 지나려는 그 순간 선아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허리를 젖히며 심호흡을 했다.

만삭의 몸으로 목욕탕 청소일을 하는 게 쉽지 않았을 것이다. 선아는 허리를 뒤로 젖히면서 몸을 쫙 폈다.

“아구구, 허리 아프다.”

한참 그렇게 기지개를 켜던 선아는 흠칫 놀라며 제 배를 내려다봤다.

“우리 꽁이 태동해쩌요? 너도 힘들구나? 조금만 참아. 엄마 곧 일 끝나. 일 끝나면 맛있는 고기랑 채소 사 가서 아빠랑 같이 밥 먹자.”

두 겹을 겹쳐 쓴 마스크 안에 땀이 찬 건지, 선아는 어깻죽지를 움직여 마스크 위를 쓱쓱 문지르곤 다시 쪼그려 앉아 청소하기 시작했다.

“선아야.”

도진은 그녀가 놀랄세라 기척을 내며 여탕 안으로 들어갔다.

“꽁이 아빠?”

탕 속에 이물질을 제거하던 선아가 고갤 돌려 그를 보았다.

“왜 왔어? 집에서 쉬지.”

도진은 선아가 움직이기 전, 빠른 걸음으로 탕 앞까지 다가갔다.

“뭐 하면 돼? 여기 머리카락이랑 때 다 거둬내고 락스 뿌리고 솔질하면 되는 거야?”

“아냐. 아냐. 꽁이 아빠가 할 일 아니야. 금방 끝나니까 평상에 가서 앉아 있어. 온종일 일했잖아.”

도진은 고개를 젓고 선아의 손에 들린 수세미를 받아 들었다.

“그러지 마.”

선아는 때와 머리카락이 달라붙은 수세미를 도진의 손에서 뺏으려 했다. 그러자 도진이 수세미를 등 뒤로 감추었다.

“고무장갑 하나 더 있어?”

“없어.”

“그럼 네가 쓰던 거 빼서 나 주고 평상에 가서 앉아 있어. 그렇게 일하면 꽁이한테도 안 좋아.”

“괜찮아. 운동 삼아서 하는 거라 하나도 안 힘들단 말야.”

“알아. 나도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가 운동 삼아서 하려고 하는 거니까 주고 나가.”

“꽁이 아빠 화났어?”

선아는 물안경 낀 눈으로 도진의 안색을 살폈다.

“꽁이 아빠 화난 거야?”

도진은 선아의 손에서 고무장갑을 빼내었다.

“화 안 났어.”

선아에게가 아니라 자신에게 화가 났다. 선아를 사랑했다면 그녀가 혼전 임신하게 하지 않았어야 한다.

실수를 했다 치더라도 제게 돈이 생긴 1년 뒤였어야 했다.

선아가 고무장갑을 내주지 않자 도진은 기어이 선아를 내보내고 맨손으로 선아가 하던 청소를 이어갔다. 여탕 바닥의 이물질을 거둬내고 락스를 뿌린 후에 솔질을 했다.

탕 안 구석구석을 닦고 물바가지에 물을 퍼서 락스를 닦아 냈다.

촤아아, 촤아아아. 여탕 안에 물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때마침 남탕 청소를 마친 주인 할머니가 여탕에 탈의실에 들어서다가 두 사람의 모습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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