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고드는 밤-73화 (73/85)

73화. 품 안으로

어쩌다 아내가 목욕탕으로 출근하는 날이면 그곳을 운영하는 노파는 남탕만 청소하고 쉴 수 있다면서 아내를 반긴다고 했다.

반기는 것이 아니라 만삭의 젊은 여자를 측은하게 여기는 게 분명한데도, 아내는 노파와 우정을 쌓고 있다고 믿었고, 그녀가 진심으로 자신을 환영한다고 여기고 있었다.

아내가 험한 일을 하는 게 싫었기에 도진은 더욱더 빅터 프로그램 개발에 열을 올렸다.

모바일 인터넷 시대가 열린 지 1년. 도진은 빅데이터의 가능성을 알아보았고 남들보다 빠르게 빅테이터를 다루는 프로그램 개발을 시작했다.

다행히도 한 홈쇼핑 회사에서 빅데이터의 중요성을 알아챘고, 계약금 1억에 5년간 사용료를 지불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한 달 후가 프로그램 납품 기한이었다.

개발자인 그가 라이센스를 갖고 회사에서 임대 형식으로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계약이었다. 홈쇼핑 회사에 프로그램을 납품이 완료되면 1억 원 남짓한 돈이 생긴다.

그 후로는 프로그램 유지 보수를 위해 5년간 홈쇼핑 회사에 출퇴근하기로 했다.

프로그램 임대료와 더불어 출퇴근 보수를 받을 테니 아내와 아이를 먹여 살리는 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아이 출산까지는 두 달이 남았다.

계약금 1억 원은 방 세 개가 딸린 20평대 빌라의 전세를 얻을 수 있었다.

도진은 아내를 데리고 어서 이 반지하 방을 나가고 싶었다. 홈쇼핑 회사에 프로그램을 납품하고 돈을 받는 대로 전셋집부터 알아볼 생각이었다.

아내는 도진의 기척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음식을 만들고 있었다.

냄비에 든 음식이 보글보글 끓기 시작하면서 달큼한 갈비찜 냄새가 방 안에 찼다.

목욕탕 일을 다녀오는 날이면 아내는 길 건너 새벽시장에 들러 돼지고길 사 오곤 했다.

도진은 부러 문을 소리 나게 닫았다가 다시 열었다. 기척 없이 아내에게 다가갔다가 냄비라도 엎으면 큰일이니 일부러 큰 소릴 낸 것이다.

“꽁이 아빠, 깼어?”

아내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뒤돌아섰다.

“나 큰 소리 안 내려고 했는데.”

자신이 낸 소리 때문에 잠에서 깬 건 줄 아는지 아내는 미안한 기색으로 도진을 바라보았다.

도진은 소리 때문에 깬 게 아니라는 듯 고갤 저었다. 뒤에서 내내 지켜본바, 아내는 국자를 내려놓을 때도, 가스 불을 줄일 때도 소리 나지 않게 하려고 조심하고 있었다.

아내의 앞까지 걸어간 도진은 그녀의 허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아내의 허리를 끌어안고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단단하게 부른 배가 도진의 몸에 닿았다.

“윤선아.”

도진의 가슴께에서 아내가 고갤 들었다.

색 옅은 갈색 눈동자가 거울처럼 도진의 얼굴을 비추었다.

임신으로 인해 피부색이 더욱 창백해진 선아를 볼 적마다 도진은 미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특히나 그녀가 몰래 일을 다녀온 날이면 지금이라도 연을 끊고 지내는 아버지에게 무릎 꿇고 빌고 싶었다.

“목욕탕 일 안 가기로 했잖아.”

선아는 놀란 눈으로 도진을 보았다. 어떻게 알았냐는 눈빛이었다. 그녀는 양팔을 들어 자신의 코앞에 번갈아 대며 살 냄새를 맡았다.

“오늘도 락스 냄새 나? 샤워까지 하고 나온 건데?”

킁킁거리며 살 냄새를 맡은 선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무 냄새도 안 나는 것 같다고 중얼거렸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웃음이 나올 뻔도 했지만, 지금은 웃을 때가 아니었다. 다시는 목욕탕 일을 가지 못하도록 아내를 혼쭐 내놓아야 할 때였다.

도진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선아는 슬금슬금 눈치를 보다가 변명을 늘어놓았다.

“목욕탕 할머니가 요즘 허리가 안 좋으시대.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간 거야. 이웃인데 나 몰라라 할 순 없잖아.”

“그 할머니 허리는 안됐지만, 선아 너는 임산부야. 락스 같은 게 꽁이한테 좋을 리가 없잖아…….”

“마스크에 물안경까지 끼고 한다니까?”

정말로 선아의 얼굴에는 큼지막한 물안경 자국이 나 있었다.

조막만 한 얼굴의 반을 가르는 자국이 귀여워서 도진은 입술이 씰룩거렸지만, 귀엽단 내색을 하면 안 되었다.

선아는 도진에게 있어서만큼은 영악한 구석이 있었다. 그의 감정변화를 기민하게 눈치채고 약점을 파고들어 결국은 쓴소리를 할 수 없게 만드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그랬기에 도진은 억지로 근엄한 척을 했다.

“피부에 흡수되는 건 어쩔 건데. 이거 봐, 손끝 다 해졌잖아.”

얼굴을 보면 자꾸만 웃음이 나오는 까닭에 도진은 선아의 시선을 피했다. 대신 물에 빨갛게 불은 손을 붙잡았다.

중소 엔터테인먼트사의 사장의 외동딸로 고생 한 번 한 적 없는 아내는 저와 결혼한 뒤로 손에서 물 마를 날이 없었다.

“물에 불어서 그런 거야. 금방 원래대로 돌아와. 게다가 어차피 오늘 일이 마지막이었다니까. 진짜야. 이제는 할머니가 나 안 받아 줄 거래. 배가 남산만 해져서 일 시키면서 죄짓는 기분이시라나.”

“그 할머니 진작부터 그럴 것이지.”

“난 아쉬워 죽겠는걸. 딱 두 시간 일하고 3만 원 버는 꿀 알바가 또 어딨어.”

그사이 얇은 스테인리스 냄비 뚜껑이 달그락거리는 소릴 내기 시작했다.

“꽁이 아빠, 나 좀 놔줘. 가스 불 꺼야 해.”

“됐어. 가서 좀 앉아 있어. 밥상은 내가 차릴게.”

“나야말로 됐네요. 우리 꽁이 아빠야말로 1박 2일 동안 방에 틀어박혀서 일만 했잖아.”

선아는 둥글게 나온 배를 내밀며 도진을 세 칸짜리 싱크대에서 몰아냈다. 키 차이가 20cm가 넘게 나는데도 도진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쉽게 떠밀렸다.

선아는 하얀 플라스틱 밥주걱을 들고 압력 기능이 없는 밥솥을 열었다.

압력밥솥처럼 차진 밥이 되는 건 아니었지만, 작은 전기밥솥은 늘 고슬고슬하고 맛있는 밥을 해내었다.

고소한 밥 냄새가 집 안을 가득 채웠다. 도진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꽁이 아빠가 식음을 전폐하고 일만 하길래 내가 과부 되는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 줄 알아?”

선아는 밥을 푸면서도 쉴 새 없이 쫑알거렸다.

“나 맘고생 시켰으니까 아침으로 밥 두 공기 먹어야 해. 내가 꽁이 아빠 주려고 특별히 갈비찜 한 거니까 국물에 밥도 비벼서 싹싹 비우는 거다? 알겠지?”

“알겠어.”

선아의 눈치를 보며 가스레인지 앞으로 간 도진은 가스 레버를 돌려 불을 끄고 냄비를 상 위로 옮겼다.

방 한가운데 작은 상 위에 얇은 스테인리스 냄비를 놓고, 냄비 주변으로 얼갈이김치와 하얀 쌀밥이 놓았다.

단출한 한 상이 차려지자 두 사람은 마주 앉아서 식사를 시작했다.

갈비찜을 퍼 하얀 쌀밥과 함께 비볐다. 갈비찜이라고 부르지만 사실 값비싼 갈비 부위를 살 수가 없어서 뒷다릿살을 잘라서 갈비 양념에 잰 것뿐이었다.

도진은 의대에 가지 않는다는 이유로, 선아는 가난한 남자와 혼전임신을 했다는 이유로 집에서 쫓겨났다.

둘은 돈 한 푼 없이 살림을 차렸고, 어렵게 이 생활을 이어오고 있었지만, 가난할지언정 불행하진 않았다. 아니 더없이 행복하다는 말이 맞았다.

이런 초라한 밥상이지만, 본가에서 먹었던 산해진미가 차려진 식사보다 더 맛있었다.

도진이 한 그릇을 싹 비우자. 선아는 숟가락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꽁이 아빠 한 그릇 더 먹어.”

“많이 먹었어. 진짜야.”

선아는 마지못해 다시 자리에 앉았다.

도진은 좌식 테이블 아래로 손을 집어넣어 선아의 발을 붙잡아 제 앞으로 끌어당겼다.

목욕탕 청소일을 하고 난 후면 선아는 발이 퉁퉁 붓곤 했기에 마사지를 해줄 생각이었다.

“발 주물러 줄게.”

차마 마사지 유혹은 거절하지 못하겠는지 선아는 도진을 만류하지 않았다.

“발 많이 부었다.”

“가끔 그래. 괜찮아.”

“뭘 가끔 그래. 청소일 다녀올 때마다 그렇지.”

“자고 일어나면 원래대로 돌아와.”

배가 불러오기 시작하면서 소화 기능이 약해진 선아는 평소보다도 밥을 느리게 먹었다.

밥 먹을 땐 잔소리하는 게 아니라고 배웠지만, 도진은 선아의 발을 주무르면서 잔소릴 시작했다.

“선아야. 네가 목욕탕 일 다녀올 때마다 빅터 프로그램 따위 집어치우고 당장이라도 나가서 게임 회사에라도 취직하고 싶어져.”

그러자 선아는 입에 물고 있던 숟가락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꽁이 아빠.”

“응.”

“나한테 거짓말한 거 있지?”

“내가?”

“빅터 프로그램 말이야. 빅데이터에서 ‘빅’ 자랑 ‘터’ 자를 따와서 생각 없이 지은 거라고 그랬잖아. 근데 사실은 빅토리(Victory, 승리)에서 따온 거잖아. 그치? 내가 꽁이 아빠가 낙서해놓은 거 봤거든?”

“…….”

“꽁이 아빠, 빅터 프로그램 잘 만들어서 꽁이 아빠 쫓아낸 아버님께 꽁이 아빠 능력을 증명해야지. 그리고 꽁이 아빠가 빅터 만들면서 생각한 것도 다 이루어야지.”

선아는 소화가 잘 안 되는 듯 가슴을 두드렸다. 도진이 냉큼 일어나 냉장고에서 생수를 가져와 물컵에 따라 주었다.

선아는 도진이 따라준 물을 벌컥벌컥 들이마시곤 다시 진지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 고생은 아무것도 아니야. 목욕탕 할머니가 그랬어. 할머니도 막내 갖고도 목욕탕 일 했다고. 그땐 지금보다 세제가 더 독했는데도 할머니네 막내딸 건강하게 자라서 애도 셋이나 낳았대. 그러니까 우리 꽁이도 건강하게 태어날 거야. 게다가 엄마가 스물한 살인데, 건강하지 않을 턱이 있어?”

“꽁이 걱정 때문이 아니야. 네가 무거운 몸으로 일하는 게 싫어. 내가 어떻게든 돈 구해올 테니까.”

“꽁이 아빠.”

선아가 도진의 말을 잘랐다.

“나는 아직 젊잖아. 젊고 살 날도 많잖아. 꽁이 아빠가 빅터 완성하면 그 뒤로는 쭉 사모님으로 살 건데 지금 고생 좀 하면 어때. 이런 거 하나도 힘들지 않아. 오히려 꽁이 아빠가 나 때문에 위축되는 거, 그게 더 싫어.”

“…….”

“절대로 아주버님들한테도 손 벌리지 말고 아버님께도 고개 숙이지 마. 나 때문에 꽁이 아빠가 고개 숙이면 나야말로 자괴감 들 것 같아. 숙이고 들어가지 말고 꽁이 아빠 실력으로 인정받아. 지금 하는 일 이루어서 그 성과가 크든 작든 간에 성과로 증명해드려.”

선아는 올곧은 눈빛으로 도진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이 내가 손에 물 안 묻히는 날이야. 꽁이 아빠 성공하고 나면 사모님으로 떵떵거리고 살 거니까, 그러니까 지금은 괜찮아.”

선아의 말 한마디에 도진은 오늘도 의지를 다질 수 있었다.

힘이 났다. 세상에 저를 믿는 아내만 있다면 못 할 것이 없을 것만 같았다.

반지하의 투룸, 볕도 들지 않고 바람도 들지 않아 사계절 내내 눅눅한 반지하 방이지만, 선아의 가슴에 뜬 소망이 도진을 내내 비추어주었다.

밥을 다 먹은 선아는 끙 소리를 내며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도진이 냉큼 일어나 좌식 테이블을 들어 싱크대 앞으로 옮겼다.

갈비찜을 덜어 먹은 국자와 작은 앞접시 두 개, 밥그릇 두 개, 수저 두 벌. 단출한 살림이지만, 20대의 부부는 이만큼을 갖추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야만 했다.

물론 힘들기만 한 건 아니었다. 천원숍에 가서 가장 싼 식기를 고르던 시간마저도 두 사람의 마음은 행복으로 충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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