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고드는 밤-71화 (71/85)

71화. 호구

“네 발목 잡은 게 왜 희진이야! 희진이가 대체 너한테 뭘 그리 잘못했어!”

성구는 더는 참지 못하고 재혁의 뺨을 날렸다.

재혁의 입에서 튀어나온 핏물이 벽으로 튀었다. 재혁도 지지 않고 대들었다.

“걔가 발목 안 잡았으면 내가 이렇게 됐겠어요?”

“네 발목을 잡은 건 선아지! 너 보니까 선아한테 탈탈 털렸더만!”

“털리긴 누가 털렸다고!”

“안 털렸어? 너 하는 짓 보니까 선아가 완전 손바닥 위에 가둬두고 관찰했던데! 제집에 CCTV가 있는 줄도 모르고 멍청하게 굴더니, 너야말로 사생활 다 털리고 잘하는 짓이다! 너 같은 등신 아니었으면 희진이도 이렇게까진 안 됐어!”

“와, 씨발. 보자 보자 하니까 별소릴 다 듣네?”

“선아가 너 감방에 처넣는다고 준비 많이 하더라. 걔가 결혼 준비에 수억 꼬라박더니 그거 다 너한테 물린단다. 도진이 알지? 들어보니까 도진이 집안도 좋은 게 능력도 좋아서 이번에 본부장까지 승진한 건 알고 있냐? 걔가 선아한테 변호사 소개해줬단다.”

도진의 이름이 나오자 재혁의 얼굴이 무참하게 일그러졌다. 그의 시선이 바닥에 뒹굴고 있는 핸드폰으로 향했다.

전원이 꺼지지 않은 핸드폰엔 아직도 도진의 사진이 떠 있었다. 그걸 본 성구는 재혁을 더욱 약 올리기 시작했다.

“류도진 아버지가 병원 이사장인데 인맥이 얼마나 좋겠어. 변호사 중에서도 치정 사건에 일가견 있는 사람으로 소개해줬다더라. 돈 한 푼 안 깎고 수임 의뢰했다는데, 넌 인생 말아먹은 거야.”

방금까지도 본부장으로 승진한 도진의 기사를 보고 있던 재혁은 도진과 선아의 이야기에 분노를 금할 길이 없었다.

“류도진이 아무 뜻 없이 선아한테 그렇게 마음을 쓰겠어?”

그 말에 재혁의 얼굴은 지금까지 중 가장 형편없게 일그러졌다.

그러고 보니 선아가 변하기 시작한 것은 도진이 제게 설문조사 업무를 맡긴 후 밖으로 돌리면서부터였다.

보란 듯이 선아에게 중요 임무를 맡긴 도진은 둘이서만 회의를 했고, 그 내용을 팀원들과 공유하지 않았다.

둘 사이에 업무 이야기만 오갔을까.

어쩌면 도진이 선아를 꼬드긴 후에 제게서 떼어내기 위해 이 모든 일을 계획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성구는 재혁의 표정이 엉망이 된 걸 보며 더욱 약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 애들 요즘 매일 붙어 다니더라. 퇴근도 도진이 차로 하고, 매일 저녁 같이 먹는대. 막말로 너랑 희진이도 매일 밤 그렇게 붙어먹었는데 걔들이라고 안 그러겠어?”

제게는 그렇게 철벽을 치더니, 도진과는 벌써 그렇고 그런 짓을 했단다.

2주 전까지만 해도 저랑 결혼할 사이였던 선아가 도진의 아래에 깔려 신음을 한다 생각을 하니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서 참을 수가 없었다.

“너야말로 네 인생 불쌍해서 어떡하냐. 설계 당한 줄도 모르고 수억 물어주게 생겼네. 그렇게 잘난 척을 하더니 너야말로 여자도 뺏기고 돈도 뺏기고 호구가 따로 없네. 불쌍해서 어떡하냐.”

성구는 그 마지막 말을 한 뒤 자리를 떴다.

성구가 떠난 뒤에도 재혁은 못 박힌 듯 서서 움직일 수 없었다.

그제야 머릿속에 모든 그림이 짜 맞춰지는 듯했다.

선아가 도진과 별짓을 다 하면서 제게는 철벽을 치며 갖고 논 것이었다. 파혼하면 흉이 될 테니 도진과 짜고 함정을 판 것이었다.

“재혁아, 정 씨 말이 사실이야? 너 설계 당한 거야?”

게다가 설계……. 설계라니…….

설계란 사기꾼들이 누군가의 등을 처먹기 위해 계획을 짜고 돈을 뜯어먹는 걸 이르는 말이었다.

어리숙한 놈들이나 그런데 당하는 줄 알았는데, 자신이 설계를 당했다니…….

“재혁아, 말 좀 해보라니까. 소송인가 뭔가 하면 선아가 결혼 준비한 데 쓴 돈까지 네가 다 물어줘야 하는 거야? 아이고 이를 어쩐다냐! 이 집 전세금을 다 빼도 억이 안 될 건데. 집에 있는 거 다 팔아도 억이 안 될 건데. 어떡하냐. 아이고, 아이고.”

평생 돈 한 푼 벌어본 적 없는 재혁의 아빠는 본 적도 없는 큰돈을 뺏기게 생겼다는 말에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다.

“우리 집 쫄딱 망하게 생겼구나……. 이를 어쩌냐……. 원통하고 분통해서 이를 어쩌냐…….”

재혁은 이미 바닥까지 떨어진 상황이었다.

“이 개 같은 년……. 누굴 호구로 보고…….”

더는 떨어질 바닥도 없던 그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집을 뛰쳐나갔다.

***

그 시간, 전략팀 사람들은 회식 장소로 이동하고 있었다.

네이비와 MOU 체결을 자축하기 위해 회식이 예정돼 있었다.

오늘 회식 장소는 인근의 숙성 회 전문점이었다. 이 근방에서 회식 장소로 가장 높게 치는 곳이었고 그만큼 음식값도 비쌌다.

“와, 우리 본부장님, 오늘 MOU 기사 뜬 거 보니까 아주 신수가 훤합니다! 나는 본부장님 사진 보고 연예인인 줄 알았어요!”

박 부장은 더는 도진에게 말을 놓지 않았다.

도진 덕에 동기 중 가장 빠른 승진을 한 만큼, 도진의 라인에 서기로 확신을 굳힌 것이다. 비단 박 부장만이 그리 결정한 게 아니었다.

“그러잖아도 여기 기사에 뜬 댓글 좀 보세요.”

박 부장의 얼굴 앞으로 핸드폰을 들이민 최 차장은 제 목소리가 아닌 다른 사람 목소리를 흉내 내며 댓글을 읽기 시작했다.

“미래전략본부장이란 사람 배우인 줄. 외모 ㅆㅅㅌㅊ……. ㅆㅅㅌㅊ, 이게 뭐지……?”

“크으! 어쨌든 좋다는 뜻이겠지! 거봐, 내가 우리 본부장님 사진빨 잘 받는다고 했잖아!”

“에이. 부장님. 사진빨이 잘 받긴요. 실물이 잘생긴 거지!”

박 부장과 최 차장은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도진을 치켜세웠다. 그들을 보면서 선아는 혀를 내둘렀다.

언제는 사람이 칼 같다느니, 얄짤이 없다니 하더니만 사람이 이렇게 간사하다.

“그나저나 사장님까지 회식에 참석하실 거라니. 이런 적 거의 없으셨잖아?”

이번엔 현숙이 회식에 참석하겠다고 통보를 해왔다.

현숙은 회사 직원들과의 회식엔 참석하지 않는 편이었다. 외부에서의 미팅과 접대 자리가 많다 보니 그 자릴 다니기도 몸이 모자랄 만큼 바빠서였다.

“금일봉이라도 들고 오시려는 걸까요? 하긴, 금일봉 주실 만하죠! 내일이면 우리 회사 주가가 빡 올라갈 텐데.”

선아는 설마 하며 고갤 저었다.

얼마 전 호텔에서 식사할 때 월급이 자기 주머니에서 나오는 돈이라며 큰소릴 떵떵 쳤던 게 엄마였다. 그런 사람이 직원들에게 금일봉 같은 걸 나눠줄 리가 없었다.

제 엄마 성격을 너무도 잘 알아서 팀원들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던 선아는 걸음을 빨리해 제일 앞에 걷던 도진의 옆으로 갔다.

“본부장님.”

선아는 도진을 그렇게 부를 때마다 마음이 흡족해졌다.

이전 삶과 달리 그가 인정을 받는 과정에 자신이 함께했기에 그 호칭이 더욱 좋은 것이다.

“?”

도진은 대답하지 않은 채 선아 쪽으로 고갤 돌렸다.

“오늘도 소토닉 한번 달릴까요?”

“좋을 대로.”

“네. 그럼 오늘은 박 부장님표 소맥에 소토닉까지 달리자고 해야겠어요.”

선아는 부러 더 밝게 말했다.

사실 선아는 도진의 고백 이후 은근히 그를 피해왔다. 인간 대 인간으로 그를 아낀다고 큰소리를 떵떵 쳐놨지만, 그의 감정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고민하면서 저도 모르는 사이에 거리를 두게 된 것이다.

그녀와 달리 도진은 내내 아무렇지 않게 행동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는 그의 말은 진심이었다.

제게 바라는 게 없다는 이에게 혼자 거릴 뒀던 선아는 마음을 놓았다.

그에게 거릴 두었단 사실을 그가 아는지는 모르지만, 경계심을 허물고 그의 좋은 지인이 되어줄 참이었다.

그사이 하늘에 해가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졌다. 퇴근 시간인데도 제법 길이 환했다.

선두에 걷던 두 사람이 횡단보도 앞에 도착했을 때. 보행 신호가 파란 불로 바뀌었다.

선아가 제일 먼저 도로에 발을 들였다.

그 순간이었다.

“선아 씨!”

선아의 등 뒤로 신 과장의 비명 같은 외침이 들려왔다.

놀란 선아가 고갤 돌리는 그 순간, 그녀의 왼쪽에서 하얀 세단이 엄청난 속도로 횡단보도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

다음 순간 퍽 소리와 함께 선아의 몸이 횡단보도 위로 쓰러졌다.

“어떡해!”

순식간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아스팔트 바닥을 뒹군 선아는 신음 같은 소릴 흘리며 몸을 일으켰다.

바닥에 넘어지면서 살이 쓸린 건지 손바닥과 무릎에서 통증이 일었지만, 그럼에도 선아는 제 몸 살필 겨를 없이 고갤 들었다.

“어, 어…….”

퍽 하는 충격음은 선아의 몸에서 난 소리가 아니었다.

차가 덮쳐오는 그 순간 옆에 있던 도진이 선아의 몸을 잡아채 밀어버린 것이다.

“선배, 선배!”

그녀 대신 차에 치인 건 도진이었다. 도진은 차에 치인 채 5m 이상을 끌려갔다.

사고를 낸 차는 교차로에 이르러 멈추어 서 있었다. 차 앞으로 십자 도로의 좌에서 우로 다른 차들이 쌩쌩 달리고 있었다.

“서, 선, 선배애애!”

선아가 도진을 향해 달려갔다.

“본부장님!”

전략팀 팀원들이 그녀 뒤를 따라 달렸다.

5m를 달려 하얀 세단 앞에 이른 선아는 차 보닛 아래 쓰러진 도진을 보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선배…… 선배……!”

도진은 의식을 잃은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와 바닥을 적신 핏물만이 점점 더 범위를 넓히고 있었고, 그 가운데 놓은 도진은 숨도 쉬지 않는 것 같았다.

“선배, 정신 좀 차려봐. 선배. 눈 좀 떠봐!”

선아가 달려가 도진의 머리를 안아 들었다. 사고의 충격으로 인해 머리카락을 타고 피가 뚝뚝 떨어졌다.

“선배. 제발 정신 좀 차려봐. 선배, 제바알…….”

선아는 도진의 머리를 안았다.

“선아 씨, 머리 들면 안 돼, 본부장님 그대로 눕혀!”

최 차장이 달려와 도진의 옆에 무릎 꿇고 앉았다. 그는 도진의 코에 귀를 가져다 대고 호흡을 확인하고 가슴에 귀를 대고 심박 음을 확인했다.

“수, 숨을 안 쉬는 거 같아요. 맥박도 좀 이상해요!”

인파에 섞여 있던 신유미 대리가 탄식 같은 비명을 지르며 전화기에 대고 애원했다.

“제발, 제발 빨리 좀 와주세요. 사고가 났는데 숨을 안 쉬어요. 제발 여기로 빨리 좀……!”

잠시 후, 전화를 끊은 신유미 대리가 최 차장을 바라보았다.

“차장님, 혹시 심폐소생술 같은 거 할 수 있으세요? 119에서 심장이 멈추면 안 된다고, 하고 있으라고…….”

“군대에서 배웠는데, 일단 해볼게요.”

최 차장은 도진을 도로 위에 반듯하게 눕힌 후, 양손을 포개 도진의 심장께에 올려놓고 체중을 실어 심폐소생술을 시도했다.

그가 가슴 압박을 하는 동안 도진의 몸은 나무토막처럼 흔들렸다.

“선배…… 선배…….”

선아는 그의 손을 붙잡은 채 기도했다.

제발 도진 선배를 살려주세요.

이번 삶에서는 누군가 죽는 걸 보고 싶지 않아요.

제발 선배를 살려주세요.

그러는 와중에 누군가 가해 차량의 운전석 유리창을 두드렸다.

박 부장이었다.

“너! 너! 이 새끼! 당장 차에서 안 내려?”

사고를 낸 운전자는 사고가 난 사람의 상태를 확인할 의무가 있었다. 그런데도 차에서 내리지 않는 운전자를 이상하게 생각한 박 부장이 운전석을 유심히 보다가 차의 주인이 누군지를 확인하고는 경악하며 운전석의 문고리를 미친 듯이 잡아당겼다.

“이재혁 너 이 자식! 일부러 사고 냈지! 당장 내려! 당장 차에서 내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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