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고드는 밤-70화 (70/85)

70화. 욕구 해갈 @AW

성구는 택시를 타고 이동하면서 바득바득 이를 갈았다.

“이재혁 이 개자식…….”

제 욕구를 풀기 위해 희진에게 온갖 감언이설을 했을 것이다. 결혼식장 안에서 들었던 녹취 내용만 해도 그랬다.

‘결혼식 날 호텔로 갈게. 내가 진짜 사랑하는 건 너뿐이야. 가난이 싫어서 선아랑 결혼하는 거지, 너랑 나야말로 원앤온리, 유일한 사랑이잖아. 마음 풀어, 희진아. 응? 응?’

진짜 사랑이라느니, 원앤온리, 유일한 사랑이니 별의별 소릴 다 늘어놓았지만, 제 욕구를 해갈하기 위해 희진을 이용하고 헌신짝처럼 버렸다.

사랑하는 여자를 이렇게 잔인하게 버리는 남자는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천하에 몹쓸 놈…….”

택시 유리창에 비친 성구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빨리 좀 갑시다!”

그는 성난 어투로 택시 기사를 채근하기 시작했다.

***

백수가 된 재혁의 일상은 한결같았다.

11시쯤 느지막이 일어나서 핸드폰을 들여다보면서 선아에게 복수할 방법을 찾아본다든가, 아니면 네이비 지식 on에 자기가 겪은 일을 올리고, 거기서 활동하는 변호사에게 답변을 받아보면서 두어 시간을 보냈다.

그리곤 3시쯤 느지막이 한 끼를 먹었다.

자존심이 상해서 집에 오기 싫었던 것과 별개로 막상 집에 오니 여러모로 편안했다. 청소와 빨래도 직접 할 필요가 없었고, 밥과 반찬도 차려 먹기만 하면 되었다.

물론 저를 버러지 취급하는 아버지의 눈치가 보이긴 했지만, 아버지는 평생 이렇게 살았으니 무시하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또 빈둥거리다 보니 오후가 되었다. TV를 보면서 시간을 때우던 재혁은 선아와의 통화내용을 떠올리며 거실 바닥에 던져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 보니까 윤선아가 오늘 뉴스를 보라고 했던 거 같은데.”

잘 먹고 잘살고 있다고 큰소리를 치면서 뉴스를 확인하라 한 거니 무슨 일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방바닥에 드러누운 재혁은 포털 창에 윤선아의 이름을 넣어 검색해보았다.

무슨 일이 있는 건지 궁금했지만 막상 검색하니 그가 궁금했던 것은 나오지 않고 선아와 동명이인 연예인에 관한 기사만 쭈르륵 떴다.

“뭐야, 괜히 한 소리였어?”

재혁은 뒤로 가기 버튼을 누른 후, 이번엔 검색창에 HS 엔터테인먼트라고 적었다.

검색 버튼을 누르자 선아의 이름으로 검색했을 때와 다르게 실시간 뉴스가 여러 개 떴다.

[네이비와 HS 엔터테인먼트 주식 맞교환 성사]

주식 맞교환이 성사됐다는 기사 제목을 보곤 재혁은 누워 있다 말고 몸을 벌떡 일으켰다.

[경쟁력 강화를 위해 손을 맞잡은 네이비와 HS 엔터테인먼트]

네이비와 MOU를 체결한다는 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가 퇴사하기 전 마지막 출근 때 MOU를 체결하기로 구두 약속이 오갔고, 그 때문에 회식을 했었으니까.

자리에 앉은 재혁은 HS 엔터테인먼트에 관한 기사 하나를 클릭했다.

[오늘 낮 2시. 네이비 본사 대회의실에서 네이비와 HS 엔터테인먼트의 MOU 체결식이 열렸다.

눈으로 기사를 쭉 훑어 내리던 그가 멈춘 곳은 기사에 첨부된 사진에서였다.

사진엔 네이비 사장과 류도진이 양사 협력에 관한 양해각서를 나누어 든 채 악수를 하고 있었다.

[HS 엔터테인먼트에서는 류도진 미래전략본부장이 사장 대행으로 참석하여-]

그 아래 적힌 사진에 대한 설명글을 읽은 재혁은 빽 소리를 질렀다.

“뭐? 본부장? 사장 대행? 이런 씨발.”

그 아래 기사 내용엔 1대1의 같은 비율로 양사가 주식을 교환하는데, 네이비의 주식 가치가 HS 엔터보다 다섯 배 이상 높기에 이는 네이비가 HS 엔터테인먼트의 성장 가능성을 크게 평가하고 투자한 거라는 해석이 적혀있었다.

“미친 거 아니야? 우리나라에 엔터테인먼트사가 얼마나 많은데, 고작 HS 엔터테인먼트에?”

배알이 꼴려서 하는 말이었다. 이런 기사가 한번 뜨고 나면 HS의 주가가 수직으로 상승할 것이고, 저야말로 수중에 돈이 있었다면 당장 HS 엔터테인먼트 주식을 매입했을 것이다.

“씨발년. 잘 먹고 잘산다고 하더니…….”

재혁은 며칠째 감지 않은 머리를 벅벅 긁다 말고 이를 부드득 갈았다.

선아는 그녀 말대로 잘 먹고 잘살고 있는 듯한데 제 처지는 곤두박질쳤다.

당장 내일모레 자동차 할부금도 내야 하는데, 회사를 잘리고 나니 할부금 낼 돈이 없었다.

퇴직금으로 받은 건 꼴랑 2백만 원 정도가 다인데, 그마저도 엄마한테 빼앗겼다. 호텔에 손해를 배상하느라 적금을 깼다면서 어찌나 악착같이 털어가는지 빼앗기지 않고 배길 수가 없었다.

“잘 먹고 잘산다고 큰소리치더니 너 잘났다. 쌍년아.”

배가 아파서 욕이 절로 나왔다.

그때였다.

재혁의 집 낡은 현관문이 쾅쾅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재혁은 세모눈을 하고 현관문을 노려보았다.

“기분도 더러운데 낮부터 어떤 새끼가. 넌 뒤졌다.”

팔을 걷어붙이고 현관문으로 다가간 재혁은 문을 벌컥 열었다. 백수로 노는 동네 친구가 찾아왔겠거니 한 것이었다.

“아니, 왜 대낮부터 남의 집 대문을 두드리고 지랄……?”

하지만 집을 찾아온 이는 그의 친구가 아니었다.

재혁과 눈이 마주친 이는 성구였다. 성구는 손을 뻗어 재혁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왜, 왜 이러세요.”

“너 잘 만났다. 이 불한당 같은 놈!”

멱살 잡힌 채 뒷걸음치던 재혁은 현관 문턱에 걸려 뒤로 나자빠졌다. 성구는 그대로 재혁의 배에 올라타 주먹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아, 왜! 윽, 이러지, 아악, 이러지 마세요!”

재혁은 제압당한 채 성구에게 속수무책으로 맞았다. 성구가 주먹을 날릴 때마다 재혁의 입술과 코에서 피가 터져 흘러나왔다.

“악, 아악!”

재혁의 비명은 열린 현관문 밖으로 새어 나갔고 때마침 담배를 사러 동네 편의점을 다녀오던 재혁의 아버지 귀에까지 흘러 들어갔다.

놀라 집 안에 들어온 그는 재혁을 두드려 패는 의문의 남자를 보곤 신발을 신은 채 거실로 뛰어들었다.

“뭐야! 누구야! 왜 갑자기 사람을 패고 난리야!”

재혁의 아버지는 성구를 등 뒤에서 잡아 결박했다. 아버지의 만류로 간신히 성구에게서 벗어난 재혁은 손등으로 맞은 부분을 거칠게 쓸었다.

손등에 빨간 코피가 묻어났다.

“씨발!”

재혁은 제 아버지에게 어깨가 잡힌 채 제압당한 성구에게 달려들었다. 퍽 소리와 함께 성구의 얼굴이 오른쪽으로 돌아갔다.

“내가 파혼당하고 회사까지 잘렸다고 물로 보이나 본데!”

재혁의 행동에 놀란 이는 그의 아버지였다. 그는 화들짝 놀라며 성구를 놓았다.

그러곤 재혁과 성구 사이를 가로막았다.

“이 자식아! 우리 집 이제 합의금 물어줄 돈 없어! 그마안!”

성구는 주먹 한 방에 터진 입술을 훔치며 재혁을 노려보았다.

“설마설마했더니 너 진짜 개차반이구나? 이젠 위아래도 안 보이지?”

재혁의 아버지는 남자를 향해 고갤 들렸다.

“정, 정 씨?”

의문의 남자가 성구임을 확인한 재혁의 아버지는 화들짝 놀랐다.

“이 형. 재혁이 하는 꼴 좀 보세요. 내가 진짜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옵니다.”

두 가족은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담장을 맞대고 옆집에 살았었다. 재혁의 아버지와 성구는 서로를 하찮게 보며 우습게 여겼지만, 겉으로는 사이좋은 이웃이었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정 씨. 대낮에 남의 집에 쳐들어와서 가만있는 애 낯짝을 이렇게 만들어 놓으면 어떡해. 얘 새 직장도 구해야 하고 면접도 보러 다녀야 하는데 꼴이 이렇게 돼서 어떻게 다녀?”

“이 형 아들은 면접도 보러 다닐 수 있고, 재시작할 수 있는지 몰라도 내 딸은 인생이 완전히 망가졌어요.”

희진의 인생이 망가졌다는 말 앞에서 재혁은 입을 꾹 닫았다. 지은 죄가 있으니 할 말이 없는 것이었다.

“정 씨, 그렇게 말할 거 없어. 희진이는 정 씨 안사람한테 잘 말해서 가족끼리 용서하고 해결하면 되겠지만, 우리 집은 정말 난리가 났어.”

“…….”

“결혼할 여자 두고 바람피웠다고 하객들 앞에서 망신을 당하고, 재혁이는 잘 다니던 회사까지 잘렸어. 퇴직금이라고 받은 게 2백만 원 꼴랑인데, 결혼식 날 기물 파손했다고 2천만 원이나 물어줬어. 게다가 우리 집 돈 없다고 정씨 안사람이 식대도 내주기로 했었잖아. 근데 결혼 파투 나고 식대 안 내준다고 해서 식대만 2천 7백만 원을 물게 생겼어…….”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못난 자식이어도 자식이었기에 재혁의 아버지는 제 아들 편을 들었다.

“말은 안 해도 재혁이 얘도 죽을 맛일 거야. 희진이나 재혁이나 이제 서로 정리하고 각자 갈 길 가야지, 여기 와서 이런다고 달라질 게 뭐가 있어.”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성구는 코웃음을 쳤다.

각자 갈 길을 가?

재혁은 제 갈 길을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애초부터 희진이에게 마음이 없었고, 제 욕구를 푸는 대상으로만 삼은 거니까.

그러나 재혁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희진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버렸다.

자살 기도로 위 내벽 손상이 심했고, 자궁도 적출 했다. 이 모든 일이 재혁의 따뜻한 한마디만 있어도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었다.

“우리 희진이는…….”

순간 울컥 눈물이 나올 뻔했지만, 성구는 이를 악물었다.

“우리 희진이는 저 자식 애를 갖고 유산까지 했어.”

유산이라는 말에 재혁의 아버지가 헛숨을 들이켰다.

“그, 그게 정말이니 재혁아? 너는 알고 있었고?”

사실을 알고 있던 재혁은 아무 소리 하지 않은 채 아버지의 시선을 피했다.

“너 정말이구나……. 아이고, 이 자식아. 아무리 궁지에 몰렸어도 그렇지, 네 애 가진 애를 나 몰라라 하면 어떡해! 애는 둘이 같이 만들어 놓고!”

재혁의 아버지는 돈이 없지, 체면이 없는 남자는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돈이 없기에 바깥에서 체면을 더 세우는 사람이었다.

“당장 사과드려! 당장 희진이 찾아가서 빌고!”

재혁의 등으로 매서운 손이 날아들었다.

“아이씨, 왜 때리고 지랄인데!”

제 아버지에게도 지랄이니 하면서 화를 버럭 내는 재혁을 보면서 성구는 쯧 혀를 찼다.

희진이 아무리 보는 눈이 없어도 그렇지, 저런 놈이 뭐가 좋다고 제 목숨까지 버리려고 했을까.

이제는 재혁이 찾아와 희진에게 빈다고 해도 성구가 사양하고 싶었다.

저런 놈과 인연이 이어진다 한들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나중에 가서도 사고를 치고 문제를 만들 놈이 저런 놈이었다.

성구의 속을 모르는 재혁의 아버지는 연신 재혁의 등을 때리며 사과하라 목소릴 높이고 있었다.

“이재혁! 내가 널 그렇게 키웠어! 얼른 사과 안 드리고 뭐 해!”

성구가 고갤 저었다. 사과 따위는 받지 않겠다고, 그런 거 다 필요 없으니까 다시는 희진이 앞에 얼씬도 하지 말라고 말하려고 하려던 순간이었다.

“내가 왜 사과를 해! 내 인생 더럽게 꼬이게 만든 게 정희진인데!”

“!”

“그년이야말로 나한테 사과해야지! 그년이 선아한테 고자질해서 결혼도 다 파투났다고! 좋다고 다리 벌릴 땐 언제고! 차라리 날 협박했으면 이렇게까지 쫄딱 망하진 않았을 텐데, 망할 계집애가 임신으로 사람 협박이나 하더니, 제 말 안 들어준다고 사람을 끌어내려도 유분수지! 그 개 같은 년이 내 인생 다 망쳤어! 그년 짓거리라고!”

그 말에 성구의 식어가던 분노가 다시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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