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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고드는 밤-69화 (69/85)

69화. 쉬운 여자

희진은 수술한 지 만 하루가 지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희진이 눈을 끔뻑거리면서 뜬 순간, 성구는 딸을 버럭 소릴 지르고 말았다.

“멍청하게 몸이 이 지경이 되도록 왜 병원을 안 찾아간 거야!”

“아......빠?”

“이 바보 같은 게!”

“으으…….”

희진은 통증을 느낀 것인지 손으로 제 배를 더듬었다.

긴급으로 자궁적출을 해야 했기에 복강경이 아닌 개복수술이 진행되었다.

희진의 배에는 제왕절개를 한 것과 비슷한 크기의 절개 자국이 남았다.

희진은 제 배를 만져보다 말고 ‘아!’ 하는 날카로운 신음을 내질렀다.

희진의 눈에 눈물이 들어찼다. 눈만 깜빡여도 눈물이 줄줄 쏟아질 것 같았다.

“아......빠.”

그녀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성구를 바라보았다.

“나…… 유산한 거지?”

유산이라는 말에 성구는 버럭 화를 냈다.

“자랑이다! 처녀가 애 떨어진 게 자랑이야!”

현숙의 옆에선 다정한 남자로 살고 있지만, 피붙이인 희진에게는 살가운 적이 없던 이가 성구였다. 그의 아빠의 모습이 익숙한 희진은 개의치 않으며 되물었다.

“내 배…… 유산해서 이렇게 된 거지?”

희진은 통증에도 연신 자신의 배를 매만졌다.

하반신을 전혀 움직일 수도 없을 만큼 허리 아래가 아픈데도 제 몸에 일어난 일이 믿기지 않았던 그녀는 계속해서 수술 부위를 더듬었다.

“살 꿰매놓은 델 왜 손으로 만지고 난리야.”

“나…… 아기 잃으면 안 되는데…. 이 아기 낳아서 키워야 하는데…… 그래야 재혁 오빠가…….”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재혁의 찾는 희진에게 성구는 또다시 버럭 소릴 질렀다.

“얌전히 내 말만 잘 따르면 팔자 고치게 해준다고 했었잖아! 제 애 밴 여자도 나 몰라라 하는 그런 녀석 따위가 뭐가 좋다고 그렇게 목을 매! 목을 매긴!”

성구는 미련 맞은 희진의 모습을 두고 볼 수가 없었다.

보면 볼수록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아빠도 엄마랑은 헤어졌어도…… 나는 안 버렸잖아……. 자식은 못 버리는 거라면서….”

희진은 양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린 채 눈물을 흘렸다. 점점 흐느낌이 커졌다.

“너 뚝 안 그쳐? 입 안 닫아? 어디서 그따위 새끼 애가 떨어졌다고 울고 난리야!”

그러자 옆 침대에서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죄송하지만, 두 분 조금만 조용히 해주세요. 여기 다 고위험 산모들이라 안정을 취해야 해서요…….”

결국 화가 난 성구는 병실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희진은 병실에 홀로 남았다.

그녀는 한참 동안 흐느껴 울다가 고개를 들었다.

가습기가 연신 하얀 수증기를 내뿜었지만, 공기가 건조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 목 안이 칼로 쑤신 것처럼 아렸다.

목의 통증보다도 그녈 더욱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하반신에서 이는 통증이었다.

개복수술 때문이 분명한데, 수술한 배뿐만 아니라 허리 아래가 온통 난도질을 당한 것처럼 얼얼했다.

수술 후 감염 예방을 위해 상처를 덮어놓았지만, 제 배에 난 상처가 어색하고 이상한 희진은 계속해서 그 위를 더듬었다.

얼마 전 산부인과에 갔을 때, 의사는 유산 가능성이 커서 누워서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했다. 그날 처음으로 산부인과에 가본 희진은 자신이 그간 자궁선근증을 앓고 있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생리불순도 심했고, 막상 생리를 시작하면 일상생활이 힘들 만큼 피를 많이 흘렸다. 그게 다 자궁선근증 때문이었단다.

의사는 희진에게 입원을 권유했다. 자궁선근증 환자는 임신 확률도 극히 낮을 뿐만 아니라 임신을 하더라도 남들보다 유산 확률이 높다고 했다.

다른 고위험 산모들은 임신 초기부터 병원 생활을 시작하니 희진도 그렇게 하는 편이 좋을 거란 조언이었다.

사실 희진도 입원하고 싶었다.

하지만 새엄마로부터 받은 카드를 아빠가 조각낸 뒤라 당장 병원비를 마련할 길이 없었다.

게다가 재혁과의 일이 만천하에 까발려진 후라 임신을 이유로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었다. 그런 이유로 연락을 한다면 아빠는 아이를 없애라 할 게 분명했다.

그녀에게 남은 희망은 재혁뿐이었다. 재혁이라도 아이에 대해 애정을 가져준다면 어떻게 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이유로 하루하루 절박하게 재혁에게 매달렸지만, 재혁은 끝끝내 연락을 받지 않았고, 결국 아이마저 잃고 말았다.

“미안해…….”

희진은 제 배에 대고 말했다. 아이를 잃을 거라 예상했어도 마음이 헛헛한 것은 막을 수가 없었다.

심신이 지친 희진은 침대에 누운 채 눈을 감았다.

그저 사랑을 했을 뿐인데 왜 이런 불행이 일어나는 걸까.

재혁은 희진이 이 모든 사실을 까발렸다고 믿고 있지만, 맹세코 그녀는 선아와 재혁의 결혼을 깰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희진은 재혁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는 여자였다.

그랬기에 그가 성격이 맞지 않는 선아와 살다가 제게 돌아올 거라는 말도 믿었다.

그렇게라도 자신의 소중함을 깨닫고 돌아오길 바랐고, 아이가 재혁과 자신의 가교역할을 해줄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더 재혁을 닮은 아이를 낳고 싶었다.

아빠가 저를 키웠듯이 자신을 닮은 아이를 보고 나면 마음이 바뀔 것이다.

어쩌면 아이 때문에라도 예상보다 더 일찍 제게 올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렇게나 선아와 재혁의 사정을 배려하고 기다렸는데…….

왜 일이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재혁이 왜 자신을 버린 걸까.

산부인과 병동은 조용했다. 대부분 유산 전의 희진처럼 고위험 산모들은 누운 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조용한 병실 안이 부산스러워진 건 간호사가 들어오면서부터였다.

간호사들은 침대 커튼을 거둬내고 환자 한 명, 한 명의 링거액을 갈고 상태를 물었다.

한 병실에 입원한 세 명의 환자를 살핀 간호사가 마침내 희진의 침대로 왔다.

“정희진 님. 몸은 괜찮으세요? 통증은 좀 어떠세요?”

희진은 눈을 뜨고 간호사 쪽으로 고갤 돌렸다.

“배가 좀 아파요.”

“아마도 절개 때문에 그럴 거예요. 게다가 자궁적출을 해서 장기들이 빈자리로 조금씩 움직일 거거든요. 당분간은 절개로 인한 통증 외에도 배가 쥐어짜지는 듯 아플 수 있으니까요. 심하면 참지 마시고 링거 선에 연결된 버튼을 누르시면-”

“저기요.”

“네?”

“지금 뭐라고 하신 거예요? 제가 자궁적출을 했다고요?”

희진은 자신이 무슨 소릴 들은 건가 싶어 간호사에게 되물었다.

“네. 하혈이 멈추지 않아서 응급으로 자궁적출을…….”

“말도 안 돼…….”

희진은 통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 배 여기저기를 만져보았다.

유산 전에도 납작한 배였지만, 어쩐지 지금은 배가 더욱 홀쭉한 것처럼 느껴졌다.

“상처 부위 그렇게 만지시면-”

간호사가 희진을 저지하려고 손을 뻗었다.

“놔!”

희진은 그녀의 손을 거칠게 털어낸 후 그녀를 힘껏 밀쳤다. 중심을 잃은 간호사가 뒤로 넘어지며 옆 침대에 머리를 찧었다. 그 소란에 휴식을 취하던 산모들이 놀라 비명을 터트렸다.

“누가 남의 몸에 함부로 칼을 대래! 누가! 누가!”

희진이 난동을 피우기 시작했다. 손목의 링거 바늘이 뜯겨나가고 침대가 들썩거렸다.

“위험한 상황이었어요! 보호자께서 동의하셨고요!”

“누가 그 사람이 내 보호자래! 내 보호자는 이재혁이야! 내 보호자는 이재혁이라고!”

간호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희진을 말려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소란을 들은 병동 간호사들과 보안요원들이 병실로 뛰어 들어왔다.

“아악! 아아악!”

희진은 미친 사람처럼 비명을 지르며 울기 시작했다.

아이를 유산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억울하고 분통했는데, 자궁적출을 했단 말을 들은 후로는 화가 나서 미칠 것만 같았다.

“왜 다들 나한테 이러는데! 내가 뭘 잘못했는데! 아악! 아아아악!”

간호사 몇 명이 달려들어 희진의 몸을 붙잡았다.

“담당 선생님 연락해. 진정제 처방이 가능한지 확인하고, 보호자 연락해서 동의하는 대로 환자를 결박해야 할 거라고 알려!”

수간호사의 지시에 맞춰 일사불란하게 한 명의 간호사가 병실 바깥으로 뛰어나가고, 나머지는 여전히 울부짖으며 난동을 부리는 희진을 붙잡았다.

“놔! 놓으라고!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이러시면 안 됩니다. 수술 봉합이 터질 수도 있어요! 진정하세요!”

잠시 후, 진정제 주사 사용에 대한 허락이 떨어지자 어린 간호사 한 명이 주사와 주사약이 든 트레이를 들고 병실로 들어왔다.

희진은 제 몸에 투여되는 약을 바라보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

잠시 후, 진정제의 효과로 희진의 몸과 정신이 무기력해지기 시작했다. 몸이 축 늘어지고 난동을 피울 의지가 사라졌다.

그럼에도 간호사들은 희진의 팔과 다리를 침대에 고정하고, 손등 혈관에 다시 링거액을 놓았다.

뚝뚝, 한 방울씩 떨어지는 링거액처럼 희진의 눈에서도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희진의 소원은 재혁과 단란한 가정을 꾸리는 것이었다.

재혁은 가난이 싫다고 했지만,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던 희진은 사랑하는 그와 함께라면 가난마저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가 자신의 첫사랑이고 마지막 사랑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진심으로 재혁을 사랑했다.

상간녀여도 제 사랑이 진짜이기에 아무렇지 않았다. 그를 위해서라면 무엇도 할 수 있었고, 무엇이든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제가 이 모양이 되도록 재혁은 제게로 오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희진은 아이도 잃고, 자궁도 잃었다.

어쩌면 이제 그는 영영 오지 않을 것이다.

그가 자신을 떠났다고 생각하니 모든 게 명확해졌다.

재혁은 필요에 따라 사람을 만나고 필요에 따라 사람을 버린다.

그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그를 위해선 죽는시늉도 할 수 있었지만, 이제 와 여기서 죽는다고 해도 그는 눈 한 번 깜빡하지 않을 몹쓸 이였다.

자신은 그에게 욕구를 풀기 쉬운 상대일 뿐이었다. 자위하는 것보다도 더 짜릿하게 욕구를 해갈할 도구 말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자신이 만든 허구의 이재혁을 사랑하고 있었다.

덧없고 또 덧없다.

세상의 전부라 믿었던 사랑이 사실은 다 허상이었다.

***

그 시각, 택시를 타고 이동하던 성구는 병원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고 분노에 치를 떨었다.

‘정희진 환자분이 자궁 적출한 사실을 간호사를 통해 알게 되었나 봐요. 지금 흥분해 난동을 피우고 있어서 환자 회복을 위해서라도 진정제 투여와 결박이 불가피할 것 같아요. 입원 전 동의서 작성하셨지만, 확인차 한 번 더 전화 드려요.’

성구는 진정제 투여와 결박에 동의한다고 이야기한 후에 전화를 끊었다.

2주 전만 하더라도 말짱한 딸이었다. 그런 딸이 임신을 한 데 이어 유산을 하고, 자살 기도를 한 데 이어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날뛰고 있단다.

그의 분노는 재혁에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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