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망가지다
“지금 환자가 보이는 반응은 약물을 과도복용했을 때의 전형적인 반응이고 하혈은 다른 이유 때문으로 추측됩니다.”
“하혈은 다른 이유 때문이라고요?”
“네. 자세한 건 검사를 진행해봐야 합니다. 문제는 현재 의식 저하와 함께 경련 반응이 일고 있다는 겁니다. 환자의 혈압으로 보아 약을 복용한 지 상당한 시간이 흐른 듯해요. 위세척의 경우 약물복용 두 시간이 지나면 효과가 떨어져서 한시라도 빨리 위세척을 진행해야 합니다.”
“그럼 피는…….”
“하혈의 원인은 위세척을 하면서 동시에 초음파로 알아보도록 할게요. 보호자께선 잠시만 비켜주시겠습니까.”
비척비척 일어선 성구가 한 발짝 물러서자 응급실 상주 간호사들이 위세척 도구가 든 카트를 끌고 침대 옆으로 다가갔다.
착 소리와 함께 응급실 베드 커튼이 닫혔다.
성구는 응급실 커튼을 멍한 눈으로 응시했다.
커튼 너머로 위 세척액의 용량을 지시하는 의사의 말소리와 함께 처지를 시작하는 이들의 분주한 움직임이 비쳤다.
잠시 후, 또 다른 의료기기 한 대가 커튼 안으로 들어갔다. 의사의 말대로 위세척과 동시에 초음파 검사가 시작되었다.
초조한 시간이 흘렀다.
성구는 응급실 한쪽에 선 채 손을 달달 떨었다.
살아생전 이런 난리를 겪는 것은 처음이었다. 더군다나 자식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줄 몰랐다.
잠시 후, 커튼을 열고 나온 의사가 성구에게 다가갔다.
“아무래도 하혈은 유산에 의한 것으로 보입니다.”
“유산이요?”
“네. 초음파 검사를 진행한 결과 유산이 확실합니다. 태반이 자궁벽에서 박탈되면서 출혈이 인 듯한데…… 문제는 환자의 자궁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자궁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건…….”
“일반적인 하혈량보다 훨씬 많은 양의 피를 흘린 듯 보입니다. 30분 후 위세척이 끝남과 동시에 산부인과 정밀 검진 진행해 보아야 할 것 같아요. 검사 관련한 안내는 간호사가 해드릴 겁니다.”
의사가 다른 환자를 돌보러 가자 대기하고 있던 간호사가 성구에게 다가왔다.
간호사는 위세척 이후에 산부인과 진료실로 희진을 옮겨 그쪽에서 검사와 함께 수술을 진행한다고 알려주었다.
간호사가 물러나자 성구는 옆의 빈 침대를 잡으며 버티고 섰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그런 그의 곁으로 위세척을 보조하던 간호사 중 한 명이 다가왔다.
“환자분이 카디건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나왔어요. 분실 위험 때문에 보호자께서 보관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그렇게 30분이 흐른 후, 희진은 이동 침대에 누운 채 산부인과 진료실로 이동했다.
성구는 희진의 핸드폰을 쥔 채 비척비척 침대 뒤를 따라 걸었다.
침대는 산부인과 진료실 안쪽으로 사라졌다. 복도에 덩그러니 남겨진 성구는 대기 의자에 앉아 희진이 들어간 문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희진의 친모가 집을 나가고 희진을 홀로 키운 시간이 15년, 철없이 산 그에게도 부정이란 것은 존재했다.
이 여자 저 여자를 떠돌며 살았어도 딸아이만은 버리지 않고 성인이 되도록 돌보았다.
세상 물정 모르는 희진이 답답하긴 했지만, 그래도 자식이기에 그 애가 잘되길 바랐다.
그렇게 몇 분의 시간이 흘렀을까. 긴 머리를 질끈 묶은 의사가 진료실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정희진 환자 보호자.”
“네.”
성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의사는 심각한 얼굴을 하고 성구에게 다가왔다.
“환자분 하혈의 원인은 유산으로 보여요. 태아의 크기로 추정하건대 임신 16주 차쯤으로 짐작돼요. 태반이 자궁에서 박리되면서 하혈이 일어났습니다. 문제는 환자분께서 자궁선근증을 앓고 계셨단 건데요…….”
“자궁선근증이요?”
처음 들어보는 병명에 성구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남성분께는 생소한 병명일 텐데요. 비정상적인 자궁내막 조직 때문에 자궁의 크기가 커진 질병이 자궁선근증이에요. 보통 생리불순을 동반하거나 혹은 반대로 생리 과다와 같은 증상이 나타나고요.”
의사는 설명에 성구는 느리게나마 고갤 끄덕였다. 잠시 말을 멈췄던 그녀가 다시 설명을 이어갔다.
“정희진 환자의 경우는 자궁선근증으로 자궁이 부푼 상태에서 유산을 했고, 태반과 함께 탈락한 조직이 크다 보니 하혈량이 많아요. 문제는 하혈이 시작된 지 한참이 된 듯한데 지혈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에요. 지금도 하혈이 계속되고 있고요.”
“지혈이 불가능하다면 피를 흘리다 죽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까?”
“네……. 그래서 적절한 처치가 필요할 듯 보입니다만…….”
의사는 말꼬리를 흐리며 입을 꾹 닫았다. 그녀의 태도에 답답함을 느낀 성구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 적절한 처치가 뭡니까? 그게 뭔데 죽어가는 애를 두고 이렇게 말을 아끼는 겁니까.”
“아무래도 자궁적출을 하고, 수혈을 받아야 할 듯합니다…….”
“자, 자궁적출이요?”
놀라 되묻는 성구를 향해 의사를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환자가 아직 20대 중반밖에 되지 않아서 자궁을 보존하는 쪽으로 치료를 하고 싶어도 상태가 너무 심각해서…….”
“자궁적출을 한다는 건 희진이가 영영 아이를 못 갖는다는 거 아닙니까.”
“네.”
“그거 안 하면 죽는 겁니까?”
“지금 상태로는 하혈의 원인을 제거하는 게 최선입니다.”
성구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재혁과의 일로 오만 정이 다 떨어지긴 했어도 자식은 자식이었다. 스물다섯밖에 안 된 딸이 잘못되길 바라는 부모는 없을 것이다.
“살려만 주십시오. 그거 안 하면 위험하다니 무조건 하겠습니다. 무조건 할 테니, 살려만 주세요. 선생님.”
성구가 의사 앞에 고갤 숙였다.
“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의사도 고개 숙여 인사한 후, 수술 준비를 위해 자리를 떴다.
그렇게 응급으로 자궁적출 수술이 시작되었다.
희진의 수술이 끝나길 기다리면서 대기실 앞을 지키던 성구는 희진의 핸드폰을 움켜쥐었다.
희진이 임신을 했다면 재혁의 애를 가진 것일 테다.
결혼식장의 영상을 통해 재혁과 희진이 하던 짓을 보았기에 재혁의 애일 확률이 높았다. 더군다나 희진은 한 번에 여러 남자를 만날 성격도 아니었다.
“이 개자식…….”
성구는 항상 재혁이 못 미더웠다. 담벼락을 맞댄 옆집에 살았지만, 주제에 맞지 않게 허세가 잔뜩 든 모습이나 어린놈이 콧대를 세우고 잘난 척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재혁에게 딸의 과외를 부탁했었던 것은 그 동네에서 대학을 간 게 재혁뿐이었고, 못 미더운 외형과 달리 꽤 좋은 학교에 갔기 때문이었다.
마침 성구가 생각한 돈보다도 싸게 과외를 해준다고 하니 밑져야 본전인 셈 치고 희진의 과외를 시켰다. 그 결과 희진도 재혁과 같은 대학교에 입학을 하긴 했지만, 그 뒤로 둘의 낌새가 이상했다.
둘의 관계에 대해 언급을 하지 않았던 건 그러다 말겠지 싶은 생각 때문이기도 했고, 재혁을 딸의 남자로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러는 사이, 성구는 늦은 나이에 현숙을 만나 가정에 정착했다. 자신이 만나던 그 어떤 여자들보다도 현숙은 능력이 있었고 매력적이었다.
그녀의 옆에서 안정을 찾은 성구는 딸도 괜찮은 남자를 만나서 저처럼 안락하게 살길 바랐다.
그래서 재혁이 선아와 사귄다는 이야길 들었을 땐 잘됐다고 생각했다.
사랑받고 자란 선아는 매사에 당당했다. 자신이 선아와 꼭 닮은 현숙을 사랑하듯, 재혁도 선아를 사랑할 거라고 믿었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희진과 재혁의 관계도 정리될 것이었다.
억지로 둘의 관계를 끊어놓지 않은 건 자신 또한 연애를 많이 해본 데서 기인한 경험이었다.
억지로 끊을수록 더 불타오르는 게 사랑이었다.
그랬기에 선아의 옆에서 신수가 훤해진 재혁을 보면서 희진이 알아서 나가떨어지길 바랐다.
희진은 수더분하고 자신감이 부족했다.
재혼한 가정에 들어와 함께 살자 했을 때도 새엄마의 눈치가 보인다고 들어오지 않은 아이니, 현숙을 꼭 닮은 선아에게 주눅이 들어 재혁을 포기하길 바랐다.
무능력한 아빠 때문에 고생을 한 딸이니 제대로 된 혼처를 구해서 시집보내는 게 성구의 바람이었다.
그래서 재혁과 선아의 파혼 후에 더 독하게 희진을 몰아붙였다. 물론 미운 것도 사실이었지만, 정신을 차리고 돌아온다면 어떻게든 새 사람을 만들어 새 출발을 하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그런데 자궁적출이라니…….
“이 자식은 뭐 하는 새낀데 제 애를 가진 애가 저 지경이 되도록 코빼기를 안 비치는 거야…….”
화가 난 성구는 희진의 핸드폰을 켜고 메시지함으로 들어갔다.
[오빠 나 배가 아파.]
[오빠 왜 연락이 안 돼…….]
[나 한 번만 만나러 와주면 안 돼? 우리 아기가 잘못되려나 봐……. 제발 연락 좀 받아줘…….]
[내가 선아한테 우리 관계 밝힌 거 아니야. 정말이야.]
[믿어줘, 오빠. 내가 잘못했어. 제발 한 번만 연락 좀 해줘.]
희진이 재혁에게 일방적으로 보낸 문자가 2주일간 천여 통에 달했다.
[계속 이렇게 나 몰라라 하면 나 죽을 거야.]
[죽어버린다니까!]
언젠가부터는 희진의 문자 양상이 달라졌다. 희진은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재혁을 협박하기 시작했다.
약을 먹겠다는 둥 협박도 여러 차례 했고, 유산으로 인해 하혈하기 시작했을 땐 자신이 흘린 피를 찍어 사진을 전송하기도 했다.
딸의 행태에 말문이 막히는 와중에도 더욱 기가 막힌 건 재혁의 행태였다.
재혁은 이 모든 메시지를 수신했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의 답장도 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정말로 희진은 죽어가고 있었다.
[보고 싶]
희진이 쓰려다가 멈춘 마지막 메시지는 전송이 되지 않은 채로 메시지함에 남아 있었다.
***
성구는 희진의 병상 옆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현숙에게서 집에 안 들어오냐는 연락이 왔지만, 성구는 친구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장례식장에서 밤을 새운다고 둘러대었다.
딸의 친모가 아니다 보니 현숙에게 희진의 상태를 사실대로 말할 수가 없었다.
4인 병실 안쪽의 창가 자리로 배정받은 희진은 창밖으로 해가 떠오를 때까지도 깨어나지 못했다.
성구는 침침한 눈가를 손등으로 비비며 허리를 폈다.
침대에 누운 희진은 인공호흡기를 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수술 이후 다행히 혈압은 안정을 찾았고, 심장박동 또한 정상으로 돌아왔지만 죽은 사람처럼 혈색이 허여멀갰다.
성구는 제 딸을 향해 손을 뻗다가 공중에서 말아 쥐었다.
파혼 사건이 있고 나서 2주일이 흘렀다. 성구가 희진과 연락하지 않는 동안, 희진의 얼굴은 말도 안 되게 상해버렸다.
원래도 마른 편이었던 아이가 광대가 도드라져 보일 정도로 피골이 메말라 있었다.
그런 희진을 바라보면서 성구는 몇 번이고 어금니를 악물었다.
못 미덥긴 해도 신체 건강하던 딸이었다. 그런 딸이 겨우 2주 사이에 폐인이 되다시피 했다.
어제 그 집에 가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희진은 시체로 발견되었을 것이다.
의사는 위세척을 했음에도 위 점막의 손상이 상당하다고 했다. 게다가 자궁마저도 잃고 말았다.
희진의 몸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