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상간녀
“그 상간녀를 산부인과에서 본 거 같아.”
“정말요?”
“응. 근데 좀 분위기가 이상했어. 사실 결혼식장에서 봤을 때만 하더라도 되게 화사하다고 생각했었거든. 근데 산부인과에서 본 모습이 좀…… 폐인 같아 보였다고 할까. 머리도 며칠 안 감은 거 같고. 게다가 이재혁이랑 오래 사귄 거 같더니만, 어두운 얼굴로 혼자 산부인과에 왔더라고….”
재혁과 희진이 헤어졌단 이야길 들었는데, 정말로 헤어진 모양이었다.
“혹시라도 이재혁 씨가 싹싹 빌어도 받아주지 말란 뜻에서 하는 이야기야. 결혼까지 생각했을 정도면 선아 씨도 마음이 깊었겠지만…… 내가 살면서 경험해보니까 사람이 쉽게 변하는 게 아니더라.”
“맞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이야기해주셔서 감사해요, 과장님.”
선아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웃어 보이곤 가방을 챙겨 들었다.
“과장님, 그럼 내일 MOU 체결식장에서 뵐게요.”
“응. 담당자가 선아 씨니까 멋지게 차려입고 와.”
신 과장에게 인사하고 나서는 팀장 석으로 향해갔다. 전략팀의 팀장이 된 박 부장이 선아를 향해 고갤 돌렸다.
“이제 나가려고?”
“네. 먼저 가보겠습니다.”
사무실을 나선 선아는 복도를 걸었다.
사무실을 나가자마자 전략본부장으로 승진한 도진의 개인 사무실 명패가 눈에 들어왔다.
[미래전략본부장실]
도진은 본부장으로 승진을 하면서 따로 사무실을 배정받았다.
HS 엔터테인먼트 안에서 개별 사무실을 가진 이는 사장인 엄마와 본부장인 도진 둘뿐이었다.
이번 삶으로 와서 도진은 지난 삶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때보다도 더 많은 성과를 이루어 가고 있었고, 전보다도 더 크게 성과를 인정받고 있었다.
사실 이전 삶에서도 도진은 본부장 직함을 갖고 있었지만, 개별 사무실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사장이었던 재혁이 그를 지독하게도 견제했기 때문이다.
제 사무실이 생긴 것이 아닌데도 선아는 도진의 개인 사무실을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도진은 이제 고마운 지인에서 은인으로 격상이 되었다.
비록 그의 행복한 미래를 위해 요즘 그를 피해 다니고 있긴 했지만, 도진을 축하하는 마음만큼은 진짜였다.
도진의 사무실 앞을 지나쳐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선아는 로비로 내려왔다.
사옥 앞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법률사무소까지 이동할 생각이었다.
카드지갑을 꺼내기 위해 가방에 손을 넣었을 때, 손끝에 닿은 핸드폰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선아는 핸드폰을 꺼내 발신자를 확인하고는 미간을 구겼다. 전화를 건 이는 이재혁이었다.
“미친놈. 정희진이나 찾아갈 것이지, 왜 나한테 전화하고 지랄이야.”
아수라장이 된 결혼식장에서 헤어진 후 그에게서 온 첫 연락이었다.
선아는 인상을 찌푸린 채로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받자마자 핸드폰 너머에서 고함이 들려왔다.
-너 이 씨발, 명예훼손이랑 사생활 침해로 고소할 거야!
고소라는 말 앞에 선아가 조소했다.
“뭐? 고오소오? 너 인터넷 검색 좀 해봤나 보다? 고소니, 명예훼손이니 개소리를 멍멍거리는 거 보니까?”
그가 자기 잘못에 대해 사과할 거라곤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명예훼손이니 고소니 하는 소리를 들으니 헛웃음만 나왔다.
-너? 너어? 너 지금 나한테 너라고 했어? 내가 너보다 세 살이나 더 많은데?
“어. 반말 좀 했다. 넌 인마, 놈이라고 안 해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줄 알아. 어디서 바람피운 놈 주제에 입을 나불거려 나불거리긴!”
-와. 이게 진짜 미쳤네. 내가 이딴 걸 좋다고…….
“퍽이나 좋아했겠다. 날 좋아했단 놈이 정희진이랑 그렇고 그런 짓을 해? 두 번 좋아했다간 아주 살림 차리셨겠어?”
오늘따라 말발이 잘 받는 날인지, 입에서 나오는 한 마디 한 마디가 다 주옥같았다. 그 주옥같은 말 덕분에 재혁은 더욱 열을 올리며 꽥꽥거렸다.
-이게 그래도 반말을 찍찍하네? 윤선아, 너 미쳤어?
“어! 그래, 미쳤다, 왜!”
-와, 이 또라이가……. 너 두고 봐. 내가 너 남의 사생활 함부로 유출하고 명예훼손 한 죄로 감방 보낼 거야!
“네가 훼손될 명예가 어딨냐!”
크으……. 선아는 제가 한 말에 감탄을 뱉었다.
-너 진짜 미쳤구나? 이게 콩밥을 먹어봐야 정신을 차리지.
“능력 있으면 콩밥 먹여보든가.”
-와, 이게 한마디를 안 지네.
재혁이 약 올라 하는 걸 보니 그간 변호사와 열심히 통화한 보람이 있었다.
“네가 고소하면 나야말로 맞고소할 거야, 이 자식아!”
-뭐? 맞고소오?
“그래! 맞고소! 나는 명예훼손으로 벌금 좀 물면 되지만, 너는 사기죄 확정되는 순간에 싹 다 털리는 거야! 나는 형사에 민사소송까지 해서 너 때문에 썼던 결혼 비용 다 받아낼 거거든? 위자료까지 알차게 받을 거다!”
-와, 와, 뭐 이딴 게 다 있어…….
“어디 그뿐인 줄 알아? 아아아아아주 비싼 변호사 써서 변호사 수임료까지 너한테 싹 다 물려버릴 거야. 내가 너였으면 명예훼손이니 지랄 안 하고 싹싹 빌겠다. 그래야 네가 배상해야 할 게 한 푼이라도 줄어들 텐데.”
선아가 따발총처럼 쏘아댔다. 사실 말을 하려고 하면 이보다도 더 길고 장황하게 할 수 있었지만, 정류장에 있는 사람들 시선 때문에 그나마 1절만 하는 것이었다.
“인터넷에서 명예훼손이니 뭐니 찾아보지 말고, 백수 돼서 시간 많을 텐데 무료 법률 상담이라도 받아보지? 그래야 네가 얼마나 가망이 없는지 주제 파악이 좀 될 건데.”
-독한 년. 얼마나 잘 먹고 잘사나 보자.
“어. 나 요즘 되게 잘 먹고 잘살아. 내일 뉴스에도 나올 거니까 보든가. 내가 얼마나 잘사는지.”
-이게 누굴 약 올리나.
“어. 약 올리는 거 맞아. 그럼 경찰서에서 보자?”
-야!
“씨 유 어게인~!”
재혁에게서 다른 말이 따라 나오기 전에 선아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어디 약 좀 올라 봐라.”
전화를 끊자마자 때마침 법률사무소 앞까지 가는 파란색 버스가 정류장으로 들어섰다. 선아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버스에 올라탔다.
“어우,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후련하네.”
그렇게 좋은 기분으로 법률사무소에 도착해서 변호사를 만났다.
“마침 잘 오셨어요. 그러잖아도 이야기해드리고 싶은 게 있었거든요.”
변호사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선아의 앞에 최근에 있었던 재판 결과를 펼쳐놓았다.
“얼마 전에 결혼 사기로 인한 손해배상청구 재판이 끝이 났어요. 이런 경우가 심심찮게 있다 보니까 변호사들끼리도 결과가 어떻게 될지 주목한 재판이었거든요. 윤선아 씨와 마찬가지로 피해자는 혼인을 빙자한 남자에게 사기를 당해서 억대의 비용을 지출한 경우였는데요.”
저와 비슷한 경우라는 말에 선아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변호사의 말을 경청했다.
“형사 사건으로 해서 형을 확정한 후에 민사소송을 추가로 진행한 결과, 원고가 주장한 대로 결혼 준비에 쓴 금액들이 모두 재산적 손해로 인정을 받았고, 더불어 위자료까지 받을 수 있었어요. 특히나 이런 재판의 경우 소송 기간이 길어져도 원고가 유리한 게요. 만약에 결혼 준비를 위해 대출을 했다면 소송 기간에 발생한 이자까지 모두 손해로 인정해 배상을 받는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변호사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이건 100% 이기는 싸움이에요.”
그날, 선아는 변호사에게 결혼 사기에 대한 형사고소와 민사소송에 대한 수임을 의뢰했다.
100% 이기는 싸움이 시작되었다.
***
그 시간 성구는 희진의 집 앞에 와 있었다.
희진에게 연락을 해보라는 선아의 말대로 연락을 시도해봤지만, 희진은 단 한 번도 그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미련해서 답답한 딸이긴 했지만, 희진은 성구의 연락을 무시하거나 그의 말을 듣지 않는 딸은 아니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던 성구는 결국 희진의 집 앞까지 왔다.
딩동, 딩동. 현관문 앞에 선 성구는 초인종을 눌렀다. 여러 번 초인종을 눌러보았지만, 안에서는 답을 하지 않았다.
“이게 뭘 하느라고…….”
딸의 프라이버시를 위해 초인종을 누른 것이지만 답이 돌아오지 않자 성구는 도어록의 비밀번호를 누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맞는 비밀번호를 눌렀음에도 잠긴 문은 열리지 않았다. 성구가 두 번 세 번 문을 열기 위해 시도해도 마찬가지였다.
비밀번호로 문을 여는 걸 포기한 성구는 핸드폰을 들고 희진에게 전화를 했다.
그러자 문 안쪽에서 벨 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안에 있으면서도 문 잠가놓은 거야?”
성구는 주먹으로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핸드폰이 집 안에 있으니 희진도 집 안에 있을 확률이 높은데도, 안쪽에서는 여전히 답이 없었다.
“정희진! 정희진! 이 문 안 열어? 정희진!”
5분이 넘도록 문을 두드려도 답이 없자 성구는 결국 열쇠공을 호출했다.
5분여 만에 인근 상가에서 열쇠공이 달려왔다. 커다란 공구함을 들고 온 그는 5분도 되지 않아 도어록을 해체하고 문을 열었다.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던 성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정희진, 이 자식이 왜 전화를 안 받…….”
그렇게 씩씩거리며 방 안으로 들어서던 성구는 현관 앞에서 다리가 풀린 채 주저앉고 말았다.
방 안에 피 웅덩이가 고여 있었다.
희진은 그 피 웅덩이 한가운데 의식을 잃은 채 누워 있었다.
“희, 희진아? 희진아!”
바닥을 짚고 일어선 성구가 희진에게 달려갔다.
“희진아. 너 왜 이래, 희진아, 이 녀석아. 너 왜 이러냐고!”
희진을 비스듬히 안고 손바닥으로 뺨을 쳐봤지만, 정신이 들 기미가 없었다.
“희진아, 일어나 봐. 정신 차려봐, 희진아.”
재차 부르는데도 희진이 의식을 차리지 못하자 성구는 재킷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응급차를 호출했다.
그사이에도 피 웅덩이는 점점 커져만 갔다. 하혈했다고 보기에는 이상하리만큼 많은 혈액량이었다.
***
희진은 이동식 침대에 누운 채 구급차로 이송되어 인근 대학병원의 응급실 침대로 옮겨졌다.
희진에게로 달려와 생체반응을 확인한 의사는 성구를 붙잡고 급박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살 기도를 한 듯합니다. 약물을 과다 복용했어요. 동공 반응이 없고, 혈압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위세척이 시급해요.”
“자, 자살 기도요?”
성구는 또 한 번 다리가 풀려 응급실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자살 기도라니…….
희진의 방에서 본 혈흔을 떠올린 성구는 황급히 의사의 바짓가랑이를 잡았다.
“선생님. 약을 먹은 건 아닐 거예요. 제 딸아이 치마 좀 보세요. 다리 사이에서 피가 흐르고 있어요. 제가 보기엔 다른 문제가 있는 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