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고드는 밤-66화 (66/85)

66화. 남녀 간의 일

“그러면 안 돼. 선배. 이건 정말 말도 안 돼. 나 때문에 선배가 독신으로 사는 거고, 일만 하면서 일벌레 소리를 듣는 거면 나 정말 화가 날 거 같아……. 선배가 남이 아니라서 그래……. 선배가 내가 정말 아끼는 사람이라서 그래.”

“선아야.”

“이건 아니야. 선배…….”

“내가 너한테 바란 건 내 마음을 알아달라는 게 아니야. 네가 좋아하느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대답은 하겠지만, 내가 먼저 네게 좋아한다, 사랑한다 그런 말 하지 않을 거야.”

“…….”

“나는 정말로 네게 바라는 게 아무것도 없어. 우리는 그냥 지금처럼 지내면 돼.”

“그게 더 말이 안 되잖아. 사람이 어떻게 바라는 거 없이 사랑해. 하물며 세빈이를 키울 때 나도 내가 헌신하는 거 자식이 알아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자식이 나만큼 날 사랑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선배가 신이 아닐진대 그런 게 어떻게 가능해……. 설마, 선배가 신이야?”

그 황당한 질문 앞에서 곤란한 얼굴을 하고 있던 도진은 피식 웃고 말았다.

“차라리 나도 내가 신이었으면 좋겠다.”

“정말 아니야?”

선아는 의심스럽다는 눈초리로 그를 보았다.

제 질문이 말도 안 된다는 걸 아는데도, 저나 도진에게 일어났던 일조차도 말이 안 되기에 그런 황당한 의심까지 든 것이다.

“그럴 리가 없잖아. 신이었다면 굳이 이렇게 몇 번씩 살 필요도 없었겠지.”

“그래…… 아니구나, 선배가 신이 아니구나…….”

도진이 신이 아닐까 하는 황당한 의심 덕분에 둘 사이에 흐르던 어색한 공기가 날아갔다.

그가 자신을 좋아한단 사실 때문에 잔뜩 굳어 있던 선아는 이참에 용기를 냈다.

그에게 빚이 있고 그를 진심으로 아끼기에 할 말이 있었다.

“나는 선배…… 어…… 음…… 그러니까, 내가 선배랑 마음이 같지 않은 거 같아.”

도진을 보고 한 번도 설레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테다.

남자로서 그는 완성형에 가까웠고, 인품이면 인품, 능력이면 능력 뭐 하나 부족하지 않았다.

이전 삶과 다르게 이번 삶에선 도진과 더욱 아까워졌고, 그런 과정에서 가슴이 뛴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안되는 건 그가 자신에게 너무 아까운 사람이었고, 그를 선아가 매우 아끼기 때문이기도 했다.

“선배, 지금 내 몸이 미혼의 몸이긴 하지만, 세빈이를 낳은 일이나 이재혁이랑 결혼한 일 같은 걸 없던 일로 할 순 없어. 그 일들이 뇌리에 너무 선명해서 평범한 아가씨들처럼은 살 수가 없거든.”

“…….”

“선배도 마찬가지일 거야. 우리가 잘돼 봤자 선배 머릿속에 8년이나 다른 남자의 아내로 살던 나에 관한 기억이 있을 거고, 내가 아이를 낳고 키운 기억이 있잖아. 게다가 그 모습을 누구보다 옆에서 지켜봤고. 그래서 우린 안 되는 거야.”

도진은 선아의 말을 듣고도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런 그의 태도가 선아에게 조바심을 불러일으켰다.

“있잖아, 선배…… 나도 선배를 진짜 좋아하거든. 물론 방금 말했다시피 남자로서 좋아하는 게 아니라 인간 대 인간으로서 정말 많이 좋아해. 선배한테 정말 감사하고 있기도 하고…… 그래서 말인데, 선배……. 그냥 나 좋아하지 말고 다른 사람 찾아보면 안 돼?”

“…….”

이번에도 역시 도진은 침묵했고, 선아는 또다시 초조함을 이기지 못하고 아무 말이나 뱉기 시작했다.

“이거 진짜 진지하게 하는 말이야. 나랑 잘된다고 해서 선배가 행복할 리가 없어. 음…… 그러니까 결혼은 말이야. 선배가 안 해봐서 하는 말이지만, 그 남녀 간에…….”

남녀 간에 별일이 다 있다는 말까지 하려던 선아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왜 이런 이야기까지 해야 하는지 자괴감이 든 까닭이었다.

“하여튼 그래. 나한텐 선배 마음이 너무 과분하고. 선배란 사람 자체가 나한텐 유니콘이야.”

선아는 황급히 말을 갈무리했다.

“그래서 안 되는 거야. 그러니까 선배도 나 같은 거 다 털어버리고 좋은 사람 만나서 행복해져 봐. 응? 응? 알겠지?”

그는 어떻게든 답을 들으려 하는 선아를 내려다보다가 그녀의 머리를 흩트렸다.

“아이씨. 진짜 농담하는 거 아니라니까.”

선아가 버럭 화를 냈다.

“알아. 농담 아닌 거.”

“그러니까 좀 듣는 시늉이라도 좀!”

“난 내가 알아서 살 테니까 내 걱정은 하지 말고, 선아 너나 세빈이 말대로 잘 살아. 사랑받으면서 살라고 했다면서.”

내 마음은 내 거라면서 벽을 치는 도진의 앞에서 선아는 더는 할 말이 없었다.

좋아해서 무얼 바라는 게 아니라 좋아해도 바라는 게 없다는데, 더 무슨 말을 할까.

“나 이제 술 좀 깬 거 같아.”

선아는 차갑게 식은 코코아를 입에 털어 넣었다.

별 모양 마시멜로를 한입에 넣은 선아는 우걱우걱 마시멜로를 씹어 삼키며 제 짐을 챙겼다.

지금까지의 도진은 넘을 수 없는 벽, 그러니까 넘사벽 같은 존재로 보였다면, 지금의 도진은 그냥 벽 같았다.

말이 통하지 않는 벽 말이다.

짐을 챙긴 선아는 도진이 따라올세라 현관으로 달려갔다.

“배웅해줄 필요 없어. 알아서 잘 갈 테니까 선배는 선배 마음 추스르고! 갈게, 선배! 그리고 진짜 진짜 고마워!”

벽에 세게 머리라도 부딪힌 듯 정신이 혼미한 날이었다.

도진의 앞에서 도망치는 것밖에는 이 혼란스러운 감정을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

선아의 예상대로 도진은 승진했다.

직함은 본부장이었고, 미래전략본부를 맡게 되었다.

TF팀이었던 미래전략팀은 해산하게 되었고, 대신에 미래전략본부라는 이름으로 승격되었다.

빅터 프로그램으로 인해 체결한 계약만 두 건이었고, 무엇보다도 네이비와 주식 맞교환이 성사되면서 임시 조직이 아닌 상시 조직의 필요성이 커졌다.

미래전략본부가 출범하면서 기존의 전략본부에 있었던 홍보팀과 마케팅팀이 미래전략본부 휘하로 편입되었다.

그들은 서버실 공사가 완료됨과 동시에 빅터 프로그램을 가동해 추출한 빅데이터로 전과는 완전히 다른 마케팅과 홍보 전략을 수립하기 시작할 것이다.

기존의 미래전략팀원들은 미래전략본부 아래 전략팀으로 배정되었다.

전략팀은 실상 미래전략본부의 중심부서나 다름없었다.

박성우 차장이 부장으로 승진하면서 전략팀의 장이 되었다.

최대희 과장 또한 차장으로 승진하였고, 신유미 대리는 과장으로, 선아는 대리 직급으로 승진했다.

한시적 조직이었던 미래전략팀에 배치받을 때만 하더라도 승진에서 멀어졌다고 여긴 팀원들은 승진 소식에 매우 기뻐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박성우 부장이 가장 크게 기뻐했다.

박성우 부장은 차장 직급을 단 동기들보다도 이례적으로 빠른 승진을 한 것이었다.

승진을 축하해오는 동기들에게는 그는 자신이 거인의 어깨에 올라탄 덕분에 한 발짝 앞서나가게 되었다고 토로했다.

박 부장이 말하는 거인은 도진이었다.

누구보다도 도진을 경계했던 박 부장은 도진을 찬탄해 마지않는 예찬론자가 되어버렸다.

어찌 안 그럴 수가 있을까.

상상도 하지 못한 네이비와의 MOU 성사가 목전으로 다가왔고, TF팀은 팀이 아닌 본부로 승격되었다. 이 모든 게 스물아홉 살밖에 되지 않은 도진이 이룬 성과였다.

축제 같은 분위기 속에서 네이비와의 MOU 체결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선아는 자리에 앉은 채 주인이 바뀐 팀장 자리를 바라보았다.

도진이 앉던 자리엔 부장으로 승진한 박 부장이 앉아 있었다.

박 부장만이 자리 배치가 달라졌고, 팀원 전원이 전략팀으로 배치된 까닭에 이동 없이 원래 자리를 쓰게 되었다.

퇴사한 재혁을 대신해 신입사원 두 명을 공개모집으로 채용하기로 했고, 이제 갓 대리 직급을 맡은 선아가 그들의 교육을 맡게 되었다.

똑똑 책상을 두드리는 소리에 선아가 옆자리에 앉은 신유미 과장을 바라보았다.

“우리 뚜뚜 자세가 좀 그래서 성별 보기가 힘들었다 그랬잖아. 탯줄이 다리 사이를 감고 있어서 아들인지 딸인지 분간이 안 된다고.”

“아. 네. 그랬죠.”

신 과장이 선아의 책상 위에 초음파 사진 한 장을 올려두었다.

흑백의 초음파 사진 안에는 의사가 표시한 듯한 하얀 화살표 두어 개가 보였다.

화살표로 표시된 곳을 유심히 본 선아가 기쁜 듯이 외쳤다.

“아들이네요!”

선아가 곧바로 성별을 맞추자 신 과장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떻게 알았어?”

“여기 보니까 뚜뚜가 자기 존재감을 확실하게 과시하고 있잖아요.”

선아는 의사가 초음파에 표시해둔 화살표의 바로 윗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래? 나는 봐도 봐도 아들인지 딸인지 구분이 안 되는데…….”

“구분이 안 되긴요. 누가 봐도 아들인데.”

신 과장은 선아를 보며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난 가끔 보면 선아 씨가 아가씨 같지 않다니까. 시댁 이야기하면 내 친구들보다도 더 맞장구를 잘 치지, 임신 증상도 나보다 잘 알지. 어떨 때 보면 선아 씨는 인생 두 번 사는 아줌마 같아.”

인생 두 번째란 말에 선아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떻게 아셨어요? 저 진짜로 인생 두 번째 살고 있는데.”

“또, 또 이런다. 임산부 놀려먹는 거 아니거든.”

이제는 팀원들과 농담을 주고받을 만큼 친해졌다.

팀원들과 학창 시절 친구들만큼이나 편안하게 이야길 나눌 수 있게 된 뒤로는 회사에 나오는 것이 더욱 즐거워졌다.

“그나저나 이제부터 뚜뚜 태동 시작하겠네요!”

“또 또, 이거 봐. 어째 나보다 선아 씨가 임신 증상을 더 잘 안다니까?”

“첫 번째 삶에서 애 낳아봤나 보죠!”

“자꾸 나 놀릴 거야?”

선아는 뚜뚜의 초음파 사진을 들어 한 번 더 바라보았다.

사진을 보고 있으니 세빈이를 가졌을 때의 기억이 마음을 뭉클하게 했다.

“그나저나 과장님, 저 오늘 반차 냈어요.”

“반차?”

“네.”

“왜?”

“변호사와 상담이 있어서요.”

“아, 사장님 편찮으셔서 이재혁 씨랑 아직 일 마무리 못 했구나. 나 그러잖아도 이재혁 씨 관련해서 선아 씨한테 할 말이 있었어.”

신 과장은 주변을 살펴보다가 선아의 옆으로 의자를 가까이 붙여 앉았다.

“실은 말이야. 이번에 산부인과에 정기검진 갔다가 이재혁 씨 상간녀 있잖아. 사장님 남편분 딸이라는…….”

신 과장은 희진을 언급하면서 선아의 자매라는 호칭을 쓰지 않았다. 선아와 정희진이 한통속으로 엮이는 것 같아 불쾌해서였다.

“그 상간녀를 산부인과에서 본 거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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