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고드는 밤-64화 (64/85)

64화. 작은 몸

도진이 대리기사를 호출하자마자 5분도 안 돼 기사가 도착했다. 회식이 많은 동네라 대리기사도 많은 모양이었다.

차 키를 넘긴 도진은 선아를 뒷자리에 앉혔다. 조수석에 가서 앉으려던 도진은 앉은 채 휘청거리는 선아를 보곤 뒷좌석에 올라탔다.

도진이 제 옆에 앉자 선아는 대리기사가 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탄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 술 마시니까 세빈이 보고 싶다.”

“…….”

“있잖아. 세빈이가 왜 그렇게 선배를 따랐는지 알아?”

“……왜?”

“그 애가 그렇게나 아빠 사랑을 원했어. 그런데도 아빠란 놈은 세빈이 한 번도 예뻐한 적 없고……. 심지어는 뭐라는 줄 알아?”

“뭐랬는데?”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 몸도 제대로 못 쓴다고 그러더라……. 그것도 희진이 끌어안고 말이야…….”

어쩌면 이 한탄은 들어주는 이가 있어서 하는 한탄인지도 모른다.

부모가 응석을 받아줘 버릇하면 아이가 응석받이가 되는 것처럼, 제 한탄을 들어주는 도진이 있어서 계속 이렇게 속풀이를 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는데도 나는……. 그 말을 듣고도 나는……. 세빈이한테 아빠를 앗아가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

“…….”

“나는 세빈이가 꼭 나 같다고 생각했는지도 몰라. 내가 아빠가 없이 자랐잖아……. 임신한 엄마를 버린 아빠면 분명 나쁜 놈인데도……. 그런데도 아빠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거든.”

“…….”

“사실 내 친부나 이재혁 같은 아빠라면 좋은 아빠도 아닌데, 내가 아빠, 아니, 남자에 대한 환상이 있었는지도 몰라……. 그래서 조금 잘해준다는 이유로 이재혁한테 홀딱 빠졌었나 봐…….”

응어리. 가슴에 진 응어리는 한 번은 그렇게 풀어야지만 병이 되지 않는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도진이었기에, 남이 듣고 있는 것도 상관하지 않고 선아가 한탄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다.

“아……. 우리 세빈이 보고 싶다. 우리 세빈이 그곳에선 잘살고 있으려나……. 밥 많이 먹고 쑥쑥 크고 있으려나…….”

이곳에서 깨어난 이후 독하게 버틴 선아였지만, 세빈이라는 이름 앞에서는 한없이 약해졌다. 선아는 기어이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도진은 선아에게 어깨를 내어주었다. 선아가 흐느낄 때마다 그녀의 뺨이 닿은 도진의 어깨에 잔떨림이 일었다.

“선아야.”

“…….”

“전에 말한 세빈이가 자란 모습 말이야. 커스터마이징 해봤는데…….”

선아는 도진의 어깨에서 얼굴을 떼고 눈물 가득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정말?”

“응. 보고 싶으면 보여줄게.”

“보고 싶어…….”

도진은 선아의 집으로 향해가던 대리기사에게 목적지를 변경해줄 수 있느냐 물었다.

기사는 내비게이션의 목적지를 한남동에서 반포동으로 변경했다.

***

도진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우유에 탄 코코아를 선아에게 내밀었다. 이제는 선아도 익숙하다는 듯 커다란 코코아 잔을 받아 들었다.

커다란 잔에는 저번과 마찬가지로 별 모양 마시멜로가 둥실 떠 있었다.

커스터마이징 프로그램을 켠 그는 기존에 백업해둔 데이터 사이에서 세빈이의 데이터를 찾았다.

그가 파일을 불러오려는 그 순간,

“선배, 잠깐만.”

선아가 도진을 불렀다.

문득 그녀는 세빈이 모습을 보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변덕 부려서 정말 미안한데……. 커스터마이징 한 세빈이 모습 말이야. 안 봐도 될 것 같아. 안 볼래.”

도진은 마우스에서 손을 떼고 선아를 향해 시선을 두었다. 선아의 말이 진짜인지 진의를 탐색하는 눈빛이었다.

선아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입술을 움직였다. 자신 때문에 차를 돌려 그의 집으로 오게 되었으니 도진에게 이유를 설명해야 했다.

“실은 말이야. 선배한테 세빈이의 큐브를 받은 그날 밤, 세빈이의 꿈을 꿨어.”

현실보다도 더 생생한 꿈이었다.

눈을 감으면 달맞이꽃밭의 향기, 온도, 햇볕, 그 모든 게 눈 앞에 펼쳐진 것처럼 생생하게 떠오른다.

어찌 생생하지 않을까. 자식과의 이별의 순간인데…….

“난 있잖아. 지난 삶에서 세빈이를 떠나보내고 항상 걱정스러웠다? 선배도 알다시피 세빈이가 원래부터 걷던 아이가 아니었잖아. 그만큼 걷는 데까지 재활치료만 4년이 걸렸어…….”

“알지. 세빈이가 걸으려고 애 많이 쓴 거.”

그 작은 몸을 움직이게 하려고 힘들다는 아이를 닦달하고 혼내면서 재활치료를 받게 했다.

자라면서 또래들과 자신이 다르다는 걸 알게 된 세빈이는 언젠가부터는 선아의 채근 없이도 혼자 노력하기 시작했다.

다섯 살에 불과한 아이가 자신이 남들보다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이를 악물고 몸을 움직였다.

그렇게 노력한 결과, 세빈이는 다섯 살 가을부터 느리게나마 홀로 걸을 수 있게 되었다.

“뛰지도 못하는 아이가 저승길을 혼자 걸어갈 수나 있을까. 거기서도 뒤처지는 게 아닌가……. 힘들면 어쩌나……. 차라리 사고로 나도 같이 죽었으면 우리 세빈이 홀로 그 길 안 가도 되었을 텐데…….“

선아는 도진을 올려다보았다.

술기운 때문일까.

아니면 이야기를 들어주는 이가 도진이기 때문일까.

가슴에 꾹꾹 눌러둔 이야기가 선아의 입을 타고 흘러나왔다.

“세빈이가 죽은 뒤로 나도 쭉 죽고 싶었었나 봐. 선배한테 어떻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이전 삶에서 죽던 그 순간에 난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어. 내 이 두 다리가 말짱하니까 우리 세빈이 등에 업고 저승길 걸어가면 되겠지…….”

“…….”

“근데 눈을 떠보니 저승이 아니라 이 세상이었어. 8년 전으로 돌아온 거야……. 그 뒤로 나는 내가 이 세상에 온 이유가 세빈이를 다시 만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어. 이재혁이 어떤 자식인지 뻔히 알면서도 결혼 준비를 했던 건…… 이재혁이랑 결혼해야지 세빈이를 다시 만날 줄 알고…….”

“…….”

“그래서 난 쭉 내가 아는 미래가 달라질까 봐 두려웠어. 무엇 하나라도 바뀌면 세빈이랑 만나지 못할까 봐……. 결혼도, 잠자리도 과거랑 다 똑같이 해서 세빈이를 다시 만나려고 한 건데…….”

이제 와서 생각하니 얼마나 바보 같았는지…….

세빈이는 엄마가 불행한 삶으로 가는 것을 원할 아이가 아니었다.

“근데 선배 집에서 세빈이 큐브를 발견하고, 과거로 돌아온 게 나만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그 날 꿈을 꿨어.”

황당하게 들릴 거라는 걸 안다.

“꿈에서 나는 세빈이를 업고 얼마인지 알 수 없는 긴 시간 저승길을 걸었어. 걷고, 또 걷고, 또 걸어서 천국의 문턱까지 세빈이를 데려갔는데……. 글쎄…… 천국 문 앞에서 우리 세빈이가 두 발로 뛰어다니는 거야. 그러더니 양손으로 화관을 만들어 내 머리 위에 씌워주더라.”

황당하게 들릴 말인 줄을 알면서도 이 이야길 하는 건 듣는 이가 도진이기 때문이었다.

“세빈이가 내 머리에 화관을 씌워주면서…… 엄마 사랑해…… 엄마 사랑해…… 엄마도 사랑받고 사랑하면서 살다 와…….”

세빈이는 그런 아이였다.

엄마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아이.

엄마가 불행한 길로 다시 가지 않기를 바라는 아이.

“내가 바보였어. 우리 세빈이라면 내가 다시 이재혁이랑 결혼하는 걸 바라지 않을 텐데……. 제 아빠 옆에서 내가 행복하지 않았던 거, 눈치 빠른 그 애가 가장 잘 알 텐데……. 세빈이가 바란 건…… 그저 내 행복뿐이었는데…….”

목이 멘 선아는 한참 동안 제 가슴에 손을 올리고 끅끅 소릴 내며 울음을 삼켰다.

“정신과 의사가 내 이야길 들으면 내 바람이 만들어 낸 환상이라고, 내 바람이 투영된 꿈이라고 말할 거 알아……. 근데 선배. 다른 사람을 몰라도 우린 알잖아. 세상에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있고, 그걸 우리가 겪었잖아.”

“그래……. 우리는 알지.”

“내가 세빈이를 업고 천국 문 앞까지 갔었나 봐. 우리 세빈이가 거기서 나한테 뭐라고 했냐면…… 나보고 늙어서 꼬부랑 할머니가 돼서 오래. 그러면 자기가 어른이 돼서 나를 업어주겠다고……. 나보고…… 나보고…… 꼬부랑 할머니가 돼서 오래…….”

50년이 될지, 70년이 될지 모르는 헤어짐. 그 마지막 순간은 선명하게 선아의 가슴에 남아 있었다.

아이의 그 말이 파혼에 이어 엄마가 수술을 받는 힘겨운 일 와중에도 등대처럼 선아의 앞날을 인도하고 있었다.

감정이 북받친 선아는 그 뒤로도 한참을 오열했다.

한참 뒤, 선아는 눈물 젖은 눈으로 도진을 바라보았다.

“세빈이가 보고 싶다는 건 내가 술에 취해서 헛소릴 한 거야……. 우리 세빈이 천국에서 마음껏 달리고, 아프지도 않고 행복하게 잘 있을 건데, 내가 세빈이 보고 싶다고 울면서 추태를 부리면 안 되잖아. 꼬부랑 할머니가 돼서 다시 만날 건데, 보고 싶어도 그때까지 꾹 참다가 그때 다시 만나야지.”

도진은 알았다는 듯 고갤 끄덕였다.

“그래. 네 말이 맞아. 커스터마이징은 커스터마이징일 뿐이야. 진짜랑 같을 수가 없지.”

도진은 티슈를 두어 장을 포개 접어 선아에게 건네고 다시 마우스를 쥐었다.

“힘내서 살다가 나중에 그곳에서 세빈이 다시 만나면 돼. 잘 생각했어, 선아야.”

컴퓨터 화면을 본 그는 커스터마이징 백업 폴더를 닫으려다가 실수로 파일 하나를 클릭해 열었다.

눈물을 닦던 선아는 컴퓨터 화면을 보곤 놀라 휴지를 떨어트리고 말았다.

“선배…….”

커스터마이징 프로그램에 머리가 하얗게 센 노파의 얼굴이 떠 있었다.

선아는 화면을 가득 채운 여자의 모습과 도진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이게 대체…….”

자신이 할머니가 된다면 이런 모습일까.

세빈이가 말한 꼬부랑 할머니가 된다면 이렇게 하얗게 센 머리를 하고 있을까.

도진은 평소와 달리 눈에 띄게 당황한 모습으로 커스터마이징 프로그램을 종료하려 했다.

선아가 손을 뻗었다. 그녀는 도진의 손을 잡아 프로그램을 종료하지 못하게 했다.

“이거…… 나 아니야?”

“…….”

“나 맞잖아.”

“…….”

“어떻게 된 거야, 선배?”

도진이 자신의 죽음을 가슴 아파했다는 것은 지난번에 들어 알고 있었다.

죽음을 슬퍼하고 추모를 하다가 그도 과거로 오게 되었다고 들었다.

그러나 커스터마이징 프로그램에서 나이 든 제 모습을 본 선아는 그가 제게 전하지 않은 이야기가 있음을 깨달았다.

“선배, 나한테 말 안 한 거 있지?”

도진은 마른 입술을 달싹이다가 자신의 머리를 거칠게 털었다.

말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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