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만취
선아와 도진이 네이비 본사에서 나왔을 땐 퇴근 시간이 지난 뒤였다.
점심시간 이후에 회의실에 들어가서 구체적인 내용을 조율하는 데까지 네 시간이 넘게 걸렸다.
긴 회의를 마친 터라 배가 고프기도 했고, 퇴근 시간이라 회사로 복귀하지 않아도 되니 선아가 축배를 들자 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술 먹자, 술!”
“술?”
“응! 쓰고 달고 독하고 시원하고 맛있는 술! 술 먹자!”
해가 제법 길어져서 7시가 다 되어가는데도 하늘에 붉은 기운이 남아 있었다.
아직 해도 지지 않은 시간부터 선아는 술을 외쳐대고 있었다.
“쓰면 썼지, 쓰고 달고 시원하고 맛있다니. 세상에 그런 술이 어딨어?”
“그런 술 있대. 선배, 소토닉이라고 들어봤어?”
“소토닉?”
“소주에 토닉워터!”
“소주에 토닉워터?”
“응응. 요즘 이게 되게 핫하대. 토닉워터는 위스키나 보드카에만 타 먹는 줄 알았잖아? 근데 소주에 타 먹으면 그렇게 맛있다네?”
그녀는 네이비 본사 회의실에서 나올 때부터 이미 신이 나 있었지만, 술 이야기를 하면서는 더더욱 신나 보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학창 시절부터 각종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활달하게 살던 그녀는 결혼과 동시에 사회와 단절됐었다.
재혁이 선아가 사회생활 하는 걸 원치 않아서였다.
다정한 남편을 둔 아내는 육아를 하면서도 종종 콧바람을 쐬고 자기 시간을 갖는다던데, 재혁은 선아에게 육아와 집안일을 맡긴 채 여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바깥일 한다고 큰소리 떵떵 치는 재혁의 옆에서 선아는 장애아를 키운다는 이유로 도리어 더 눈치를 보고 행동을 조심했다.
세빈이를 누군가에게 맡길 수도 없으니 아이를 낳은 후에 술을 마신 기억이 거의 없다.
25세의 겨울에 엄마가 된 선아는 또래 친구들의 근황을 SNS로 보면서 부러워했다.
소주와 토닉워터를 섞어서 만든 소토닉은 사실 흔하디흔한 술이었지만, 그런 것조차도 선아는 마셔본 기억이 없었다.
“나 진짜 소토닉 마셔보고 싶단 말이야.”
“그래. 마시자, 소토닉인가 그거.”
도진과 선아는 네이비 본사 인근에 있는 작은 규모의 이자카야로 향했다.
창가 자리에 앉은 선아는 곧장 메뉴판을 펼쳐 들었다. 메뉴판에 적힌 주류 이름을 읽던 선아는 제일 끝에 적혀있는 소토닉을 발견했다.
“여기 봐봐, 선배. 요즘 소토닉 마시는 사람들 많다더니 진짠가 봐. 소토닉 옆에 인기라고 쓰여있는 거 보이지?”
선아는 ‘인기’라 적힌 작은 글자를 손끝으로 가리켰다.
“선배 소토닉 괜찮지? 이걸로 시킨다?”
“응. 마음대로 해.”
“응응. 그럼 주문할게.”
공중으로 손을 들어 올린 선아는 점원을 부른 후, 메뉴판에 적힌 소토닉 글자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이거 소토닉 세트 하나 주세요.”
“네. 그런데 안주는 뭐로…….”
그제야 선아는 자신이 안주도 정하지 않고 술부터 시켰단 사실을 깨달았다.
애초부터 소토닉을 마시려고 여기에 온 것이었지만, 남이 보면 무척이나 술이 고픈 사람으로 보일 터였다.
“다른 사람들은 소토닉에 뭘 많이 먹어요?”
“사시미 모리아와세를 제일 많이 드시는 거 같아요.”
“모리아와세요?”
“회 세트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참치회를 비롯한 여섯 가지 종류의 숙성 회가 4점씩 구성돼 있고, 초에 절인 문어와 찐 전복, 우니가 함께 나와요.”
직원의 설명을 들은 선아는 맞은편에 앉은 도진을 향해 물었다.
“선배 회 먹어?”
“응.”
도진이 대답하자 선아는 다시 점원을 바라보았다.
“그럼 안주는 모리…… 그걸로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잠시 후, 토닉워터 세 병과 소주 한 병, 얇게 썬 레몬 슬라이스가 안주보다 먼저 서빙됐다.
점원은 작은 접시에 담긴 요리를 두어 개쯤 내어주며 오토시라고 설명해주었다.
점원이 자리를 뜨자마자 선아는 “오토시?” 하며 점원의 발음을 따라 했다. 앞에 앉은 도진이 오토시가 무언지 설명해주었다.
“기본안주라고 생각하면 돼.”
“아……. 선배는 일본어도 잘 아네.”
“잘 아는 건 아니고 오마카세 같은 데 가면 자주 듣는 단어라서 알아.”
오마카세란 말에 선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마카세 같은 데도 가봤어?”
오마카세란 주방장 특선 메뉴를 선보이는 초밥집이었지만, 현재에는 특급호텔 정도에서나 오마카세를 접할 수 있었다.
8년 후의 세상에는 고가부터 저가까지 오마카세가 여기저기 많았지만, 그보다 훨씬 과거인 현재엔 서울에 오마카세가 몇 안 되었고, 모두 다 고급 요릿집으로 통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일식을 좋아하셔.”
“와, 선배 진짜 사랑받는 막내아들이었구나. 저번에 이사장님이 늦둥이는 품 안에 자식 같다고 하시더니, 그냥 하신 말이 아니었나 봐.”
보통은 1인 30만 원 가량하는 음식을 자식과 함께 먹으러 가지 않는다. 정말 부잣집이면 모르겠으나 선아네 집은 그랬다.
일전에 1인에 20만 원 가량하던 호텔 한정식집에 들렀다가 엄마 얼굴이 파리해진 것만 생각해보아도 선아네 식구들이 오마카세에서 외식을 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선배 있잖아. 내가 얼마 전에 엄마랑 같이 광화문 호텔 한정식집에 갔거든? 그 시청 내려다보이는 거기 있잖아.”
“응.”
“거기가 식재료 좋기로 유명하잖아. 이전 삶에서 주총 끝나고 거기 종종 갔던 게 기억나서 엄마 모시고 간 건데. 메뉴판 보자마자 엄마 얼굴이 희게 질리는 거 있지.”
“그러셨어?”
“응. 내가 낸다는 데도 첨엔 얼마나 탐탁지 않아 했는데. 인제 와서 말하는 거지만, 울 엄마 너무 짠순이야. 전에 나랑 외식할 땐 1인분에 15,000원 하는 갈비만 먹었어. 그래서 어릴 때는 외식 한다고 그러면 무조건 갈비 먹으러 간다는 줄 알았다니까.”
“그랬구나.”
“응. 돈을 싸 들고 죽는 게 아닌데, 우리 엄마는 왜 그렇게 아끼나 몰라. 그럴 때 보면 좀 속상하기도 해.”
“그러게. 속상할 만하네.”
추임새 같은 그 웃음에 선아는 연신 조잘조잘 떠들었다.
이렇게 온전히 이야기에 집중할 수 있는 술자리가 얼마 만인지도 까마득했다. 이전 삶에서 임신과 출산한 기간까지 따지면 8년 만인가.
“어떨 때 보면 나중에 엄마 무지막지한 부자 된다고 말해주고 싶을 지경이야. 엄마 돈 어디 안 가고 여기 있는 류 팀장님이 착실히 불려줄 거라고 말이야. 하기야 내가 구구절절 설명한들 엄마가 믿겠어? 나야말로 지난 삶에서 그렇게 부자가 되었던 게 꿈같은데.”
선아의 푸념에 도진은 낮게 웃으며 소토닉이라는 술을 제조하기 시작했다. 적당히 괜찮다 싶을 비율로 소주와 토닉워터와 섞고 레몬 슬라이스를 띄웠다.
쉴새 없이 떠드는 선아의 앞에 소토닉 한 잔을 내미니 선아의 얼굴이 금세 환해졌다. 그녀는 곧바로 잔을 들어 올렸다.
“선배, 건배하자. 건배.”
도진도 잔을 들었다. 잔이 부딪치자 챙, 맑은 소리가 울렸다.
술은 선아의 예상대로 쓰고 달고 독하고 시원했다. 소주를 탄 건데도 끝 맛이 개운해 한 잔을 단숨에 비웠다.
“대박. 선배 소토닉 마셔본 적 있어?”
“아니.”
“근데 어쩜 이렇게 잘 탔어? 비율을 어떻게 한 건데?”
“소주 1에 토닉워터 3?”
“와. 선배는 뭐든 잘하나 봐.”
선아는 도진의 앞에 놓인 병을 끌어당겼다. 그리곤 도진이 말한 비율대로 술과 토닉워터를 섞었다.
그사이 테이블 가운데 회가 놓였다. 대나무 접시 위에 대나무 잎을 깔고 채소와 함께 낸 모둠회는 그림을 그려놓은 것처럼 색이 조화롭고 예뻤다.
선아는 냉큼 소토닉 한 잔을 제조해 도진의 앞에 놓았다. 그리곤 제 잔을 들어 올리며 외쳤다.
“짠!”
또 한 잔의 술을 비운 선아는 연분홍 참치살을 겨자를 탄 간장에 찍어 입에 넣었다.
참치살의 기름기가 입에서 톡 터졌다. 씹을수록 고소한 맛이 술을 불렀다.
“선배. 선배는 나한테는 마법 램프고 지니다.”
“지니?”
“응. 도지니?”
“…….”
“썰렁했지. 미안 미안.”
제가 말하고도 웃긴지 선아는 입술을 가린 채 키득키득 웃었다.
“있잖아, 선배. 아까 말했던 대로 난 지난 삶에서 내가 그렇게 부자가 되었던 게 실감이 잘 안 나. 어떨 때 생각하면 꿈같기도 하고 기적 같기도 하거든.”
“그 돈 다 놓고 왔잖아. 안 아까워?”
“선배가 여기 없었으면 두고두고 아까웠을 건데, 근데 선배도 지금 여기 있잖아. 그래서 하나도 안 아까워. 어쩐지 선배가 또 그렇게 해줄 것 같아서.”
“꼭 돈 맡겨놓은 사람처럼 말하네?”
“그런가? 내가 너무 양심이 없었나?”
어쩌면 정말 자신이 양심이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미래를 살아본 도진이 더 나은 미래를 찾아서 제 곁을 떠날 수도 있는 것인데, 그가 또 자신을, 아니, 엄마를 부자로 만들어줄 거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는 사이 테이블 위에 술이 한 병, 두 병 쌓였다.
소주를 토닉워터에 희석해 마시니 테이블 위의 빈 병들이 훅훅 늘어났다.
모둠회의 절반이 비워졌을 즈음엔 선아의 말꼬리가 길게 늘어지기 시작했다.
“나 오늘 엄마 병원 가야 하는 데에 하루만 빠져야겠다. 아빠가 있으니까 괜찮겠지이.”
“전화라도 해드려.”
“안 돼. 지금 드라마 있잖아. 그 빨간 문신한 여자 나오는 거. 제목이 뭐였더라……. 아! 부부의 시간.”
선아는 제목을 맞춰 기쁘다는 듯 손뼉을 짝 부딪치곤 또다시 수다를 늘어놓았다.
“요즘 엄마가 그 막장 드라마에 푹 빠졌어. 드라마 시간에 전화하면 막 승질 낸다니까아?”
“그래도 전화해야지. 내일 퇴원 아니셔?”
“몰라아.”
도진은 손을 뻗어 선아의 앞에 놓인 유리잔을 뒤집어놓았다.
“왜 이러셔!”
그러자 선아가 빽 소리 질렀다.
“나 더 마실 거야!”
술 취하면 애가 된다더니 술을 더 못 먹게 하자 심통이 난 것이다.
“내일 사장님 퇴원 날이야. 이만 일어나는 게 나을 거 같아.”
“싫어.”
“어쭈.”
선아가 떼를 쓰고 있는데도 도진은 들은 척도 하지 않으며 테이블 위에 계산서를 들고 일어났다.
“얼른 일어나. 술 더 먹겠다고 떼쓰는 거 보니까 너 만취야.”
“치이. 나 이렇게 사석에서 술 먹는 거 8년 만이란 말이야아. 선배가 가정주부로 8년을 집에서 살림만 했어 봐. 술이 얼마나 먹고 싶은가.”
모르는 이가 보아도 선아가 만취한 걸로 보일 만한 풍경이었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아가씨가 가정주부로 8년을 살았다고 푸념을 늘어놓고 있으니 말이다.
“울 엄마가 젤 걱정한 게 뭔지 알아? 딸은 엄마 팔자 따라간다는 말이었거든.”
그러나 이미 취한 선아는 다른 사람의 시선 따위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근데 그런 게 진짜 있긴 있나 봐. 이제 와 하는 말이지만 사실 세빈이는 나 혼자 키우다시피 한 거다?”
선아가 일어날 기미가 없자 도진은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선아를 부축해 일으켰다.
자신이 취한 걸 인지는 하고 있는지, 선아는 그의 부축을 마다하지 않았다.
최근 나흘 동안 도진의 차로 퇴근을 하면서 심리적 거리를 급속히 좁혀서인가, 그의 부축이 불편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