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유산
국물 우동 두 그릇을 주문하자 금세 두 그릇이 서빙돼 나왔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우동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아직까지 바깥 날씨가 서늘한 탓에 뜨끈한 우동의 자태에 입 안에 군침이 돌았다.
“와. 맛있겠다.”
선아가 나무젓가락을 가지런히 모으고 있을 때 도진은 손을 들어 점원을 불렀다.
“계란밥 하나 주시겠어요?”
“네. 바로 준비해드릴게요.”
잠시 후, 밥 반 공기 위에 수란을 올린 계란밥이 나왔다.
입 안에 든 우동을 씹어 삼킨 선아는 테이블에 올라온 계란밥을 보았다.
“계란후라이가 아니라 수란이 올라간 계란밥이네?”
“응.”
도진은 테이블에 비치되어 있던 쯔유 통을 들어 계란 위에 뿌렸다. 까만 소스가 하얀 계란 위에서 미끄러져 밥알을 물들였다.
숟가락으로 수란의 가운데를 툭 터치니 노란 노른자가 흘러나왔다. 갓 지은 뜨거운 밥에 덜 익힌 계란이 몽글몽글 익기 시작했다.
“와, 별거 아닌데도 되게 군침 돈다. 나 한 입만 먹어 봐도 돼?”
“응. 사용 안 한 수저로 비빈 거야. 먹어 봐.”
선아는 새 수저를 꺼내 계란밥을 크게 한 술 펐다. 계란밥을 입에 넣은 선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와, 맛있다! 나 한 입만 더 먹을게!”
“먹어. 마음껏.”
도진은 계란밥을 선아 앞에 밀어 넣은 채 우동의 하얀 면을 집어 입에 넣었다.
선아는 우동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계란밥을 연달아 세 번이나 더 퍼먹었다.
“형제 많은 집에선 이렇게 한 입, 한 입 야금야금 뺏어 먹는 사람이 제일 얄밉다면서?”
“그래?”
“왜 모르는 척이야? 선배도 위로 형이 네 명이나 있다면서.”
“큰형이 나보다 스물두 살이나 많은걸.”
“아, 맞다. 선배가 늦둥이라고 했지?”
“응. 뺏어 먹고 그러기엔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 큰형이 일찍 결혼했으면 나만 한 애가 있을 때 내가 태어난 거니까. 형들이 거의 다 나한테 양보한 거 같아.”
실제로 도진의 첫 컴퓨터도 군의관으로 입대한 형의 컴퓨터를 뺏어서 사용한 것이었다.
그렇게 나이 차이 나는 형들 덕에 어릴 때부터 아이들이 갖기 힘든 것들을 가질 수 있었고, 컴퓨터 활용 능력이나 프로그래밍에 대한 소질도 그때 개발된 것이다.
“와, 근데 계란밥을 쯔유로 비벼 먹는 거 처음인데 정말 맛있다.”
선아는 추가로 주문한 계란밥을 반쯤 비우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으앗, 덜어 먹을 걸 그랬다. 미안, 선배. 나는 누구랑 나눠 먹은 기억이 없어서 그런가, 꼭 이런다니까.”
“괜찮아.”
도진은 그사이 우동을 다 비우고 선아가 남긴 계란밥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오래된 우동집에서는 나무 향이 났다.
면을 익히기 위해 끊임없이 물을 끓이느라 실내는 습도가 높았고, 물먹은 나무 가구는 어디선가 맡아본 적 있을 법한 아련한 향을 자아냈다.
조도 낮은 호박빛 조명 아래, 마주 앉으면 무릎이 닿을 듯 폭이 좁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선아와 도진은 우동을 한 그릇씩 비웠다.
그들 가운데에는 노란 계란의 흔적이 남은 작은 밥 공기가 놓여있었다.
둘이 식사하는 와중에도 의사 가운을 입은 병원 의사 몇이 안으로 들어왔고, 식사를 마친 두 테이블이 자리를 비웠다.
홀을 관리하는 아르바이트생이 앞치마를 입은 채 연신 테이블을 치웠다.
부산스러워서 그런가, 누구도 옆 테이블에 주목하지 않았고, 그랬기에 더욱더 속 이야기를 하기 편한 곳이었다.
“아 참, 선배.”
“응.”
“파혼하고 후처리 있잖아. 진짜 다 선배 말대로 되어가고 있다?”
“법적인 문제? 손해배상 같은 거?”
“응. 파혼 당일 날 엄마가 아빠한테 엄포를 놓더라고. 사생활 침해나 명예훼손 같은 걸로 희진이가 나 고소하게 할 거냐고 소리치고 난리도 아니었어.”
“이재혁은?”
“선배가 소개해준 변호사 만나서 고소하고 손해배상 청구해야지. 엄마가 쓰러져서 일단 다 보류 중이긴 한데, 변호사랑 짧게 통화해보니까 이재혁이 돈 때문에라도 나랑 합의 보려고 하지, 고소하면서 맞불 대응은 못 할 거 같대.”
“그 둘은 그렇다 쳐도 정성구 그 사람은-”
“아빠? 아빠가 왜?”
성구의 이름이 나오자 선아가 화들짝 놀랐다.
“정희진 친부잖아. 이재혁과도 한동네 살았었다면서. 그럼 그 사람도 조심해야 하는 거 아니야?”
“아빠는 정희진이랑 이재혁과는 좀 달라. 게다가 내 남편이 아니고 엄마 남편이잖아. 내 문제 때문에 엄마 결혼 생활까지 망가지게 할 순 없지. 두 분 얼마나 잉꼬부부인데. 아빠가 엄마 간호하는 거 보면 선배 깜짝 놀랄 거야.”
“…….”
“솔직히 이전 삶에서…….”
선아는 말하다 말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혹시라도 이전 삶의 일을 이야기하는 걸 남이 들으면 이상하게 생각할까 싶어서였다.
다행히 바로 옆 테이블에서 우동을 먹던 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계산대로 향해가고 있었다.
“이전에……. 엄마랑 아빠랑 너무 일찍 헤어졌잖아. 엄마 돌아가시고 나서 아빠 울던 모습 선배도 봤잖아. 난 엄마 행복을 위해서라도 이번엔 두 분이 오래오래 함께 사셨으면 좋겠어.”
그 말에 도진은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아빠에 관해 이야길 하던 선아는 문득 파혼 후 희진이 사과를 하러 찾아온 날을 떠올렸다.
그날 희진은 하얗다 못해 파랗게 질린 채 울고 있었다. 솔직히 희진에게는 유감이 많았지만, 그 모습이 잔상처럼 뇌리에 남아 선아를 찝찝하게 만들고 있었다.
“선아야. 사장님 생각하는 네 맘은 알겠지만 그래도 남은 남이야. 결국은 자기 자식 편을 들 수밖에 없어.”
“선배. 내가 왜 그렇게나 희진이가 미웠는지 알아?”
“…….”
“단순히 날 속이고 이재혁과 불륜 짓거릴 해서 걔가 싫은 게 아니야. 나는 걔한테 남이 아니잖아. 법적으로 자매는 아니어도 걔랑 나랑은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인데, 걔는 제 옆에 있는 사람들 모두를 속이고 그 짓거릴 한 거야. 자기가 한 짓으로 인해서 원래 가정에도 불화가 생길 거란 것도 생각 안 한 거지.”
“정성구 그 사람이 몰랐을까?”
“아빠 편을 드는 건 아닌데……. 엄마랑 아빠는 진짜 서로 많이 사랑해. 인간 말종들이 벌인 일 때문에 진짜 사랑하는 두 분 사이를 이간질하는 게 맞는 걸까.”
그때였다.
반 접어서 의자에 둔 코트 주머니 안에서 벨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잠깐만, 선배.”
선아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발신자를 확인했다. 전화를 건 이는 엄마였다.
“전화 좀 받을게. 엄마 전화라서.”
선화는 도진에게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건 현숙은 왜 오늘은 병원에 오지 않느냐고,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거냐고 물었다.
선아는 병원 앞에서 저녁을 먹고 있다고, 금방 가겠다고 대단한 후에 전화를 끊었다.
“귀찮다고 오지 말라 할 땐 언제고 엄마가 찾네. 가야겠어. 일어나자, 선배.”
도진은 더 할 말이 있는 듯했지만, 선아는 그의 말을 더 듣고 싶지 않았다.
사실 선아는 도진만큼이나 아빠에게 감사하고 있었다.
아빠는 3년간이나 식물인간으로 있었던 엄마를 제 몸처럼 간호한 분이고, 또 엄마의 죽음 이후 저보다 더 절망한 이였다.
무엇보다도 엄마가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으로 인해 행복해하고 있었다.
“선배, 오늘 운전 연수 정말 고마웠어.”
계산하고 나온 선아는 우동집 앞에서 도진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아직 운전 감 익히려면 멀었어. 내일도 내 차 타고 퇴근해.”
“그래도 돼?”
“응. 내 차 기어노브가 국산 차랑 방식이 같아서 감 익히기 좋을 거야. 굳이 남한테 운전 연수 받을 필요 없이 그렇게 하자.”
“고마워, 선배.”
선아와 도진은 병원 안에 실외 주차장까지 함께 이동했다.
선아는 주차장 앞에서 도진과 손을 흔들어 작별한 후 병원 정문을 지나 병동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었다.
빠른 걸음으로 로비를 가로지르던 선아의 눈에 들어온 건 로비 카페 앞 쇼케이스를 들여다보는 임산부와 남편의 모습이었다.
“토끼 컵케이크 진짜 예쁘다.”
“하나 먹을래?”
“비쌀 거 같아서 싫어.”
“괜찮아. 우리 아기가 같이 먹잖아.”
다정한 부부의 모습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선아는 그들을 지나쳐 병동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그 순간 문득 잊고 있던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지난 삶에서 희진의 클라우드에서 보았던 임신테스트기 사진이었다.
“아……. 그거…….”
임신테스트기 사진을 떠올린 선아는 엘리베이터에 타는 것도 잊은 채 핸드폰 메모장 앱을 켰다.
이전 삶의 기억을 정리해둔 메모 속엔 임신테스트기 사진에 관한 기록도 남아 있었다.
[결혼식 사진 이전에 임신테스트기 사진이 있었음. 시기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결혼식 이전에 희진이 임신을 했었던 것으로 보임.]
이전 삶에서 희진은 아이를 낳지 않았다.
한 달에 한두 번씩 가진 가족 모임에서 희진이 살찌거나 배 나온 모습을 본 기억이 없으니 출산하지 않은 것은 확실했다.
“설마……. 정희진 혈색이 안 좋았던 게…….”
어쩌면 희진이 이 시기에 유산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뭐…….”
찝찝하긴 했지만, 희진이 유산을 하든 안 하든 자신이 알 바가 아니었다.
“내가 어쩔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선아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
복도에 선 선아는 병실 문을 열고 나오는 남자를 보고 발걸음을 멈추었다.
정장 차림에 스마트한 인상을 주는 남자였다. 남자는 빠른 걸음으로 선아의 옆을 지나쳤다.
선아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다가 병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었다.
병실 안에는 현숙과 성구가 있었다. 리모컨을 들고 TV 채널을 바꾸고 있던 성구가 선아에게 인사를 건네왔다.
“저녁 맛있는 거 먹고 왔어?”
“네. 아빠는 저녁 드셨어요?”
“응. 우린 병원 밥 먹었어.”
선아는 병실 한쪽의 소파에 가방을 내려놓고, 병실 앞에서 마주친 남자에 관해 물었다.
“엄마, 왔다 간 분은 누구야? 서류 가방 들고 가던데. 설마 또 병실에서 일한 거야?”
“회사 일은 아니고, 변호사 불러서 상담 좀 한 거야.”
변호사란 말에 선아가 정색했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한다니까. 파혼 관련한 일은 더는 신경 쓰지 마. 그러잖아도 알아서 잘하고 있어.”
“네가 뭘 알아서 하고 있는데?”
“도진 선배가 변호사 소개해줬어. 변호사 통해서 형사 고소하고 민사까지 가서 손해배상 다 받을 거야. 알아서 준비하고 있으니까 엄만 좀 쉬어.”
“그래?”
“응. 그렇게 할 거니까 걱정하지 마.”
“그래, 뭐. 너는 못 믿어도 류 팀장이 소개해준 사람이라면 확실하겠지. 나도 네 일 때문에 변호사 부른 거 아니야.”
“그럼 변호사가 무슨 일로 온 건데?”
“내가 이렇게 되고 나니까 별의별 생각이 다 들어. 그나마 이번엔 회사에서 쓰러졌으니 바로 병원에 왔지. 만약에 차 운전이라도 하다가 쓰러졌어 봐.”
차 운전이란 말에 선아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지난 삶에서 엄마가 식물인간이 되는 계기는 운전을 하다가 차가 물에 빠져서였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니까 유산상속에 대해서 정해서 공증을 받아놓는 게 어떨까 싶더라고. 다행히 이 사람한테 그 말을 했더니 그러자 해서.”
“아빠가?”
“내가 말했잖아. 우리 성구 씨는 욕심 같은 거 없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