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조여들다
월요일. 사내 게시판에 인사공고가 떴다. 재혁의 퇴사에 대한 공고였다.
결혼식장에서 개망신을 당한 직후라 제대로 된 이라면 얼굴을 들고 회사에 다닐 리 없었지만, 정리가 빠른 현숙은 출근하자마자 인사과를 통해 재혁에게 해고 통보를 넣었다.
사내 게시판을 확인한 직원들은 아침부터 삼삼오오 모여 재혁에 관한 이야길 나누었다.
“결혼식 엉망 됐다면서요?”
“사장님 남편이 데리고 온 딸이랑 이재혁 씨랑 그렇고 그런 사이였대. 선아 씨가 결혼식장에서 두 사람 사이 폭로했다던데?”
“대박. 그런 일은 드라마에서나 일어나는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근데 이재혁 그 사람, 진짜 미친놈 아니야? 사장님 남편의 딸이면 윤선아 씨랑은 자매나 다름없잖아. 어떻게 두 여자를 그렇게 후릴 수가 있지?”
“아……. 말만 들어도 너무 더러워요……. 근데 선아 씨는 그걸 어떻게 알았대요?”
“난들 아나. 증거를 아주 악착같이 모아서 터트렸단 말만 들었는데, 본인한테 직접 들은 게 아니니까.”
“이런 걸 두고 조상이 도왔다고 하는 거죠?”
“근데 더 웃긴 게 뭔지 알아?”
“뭔데요?”
“그 여자 말이야, 상간녀. 결혼식장에 웨딩드레스 입고 왔대.”
“와……. 진짜요? 와……. 꼴값을 하네요.”
이야기꽃을 피우는 이들의 뒤로 서류 가방을 든 도진이 출근하고 있었다.
도진은 성과를 중요시하긴 하나 이른 아침에 출근해 자리를 지키는 타입은 아니었다. 도리어 능률을 중요시하다 보니 자기 할 일만 한다면 굳이 사무실에 나오지 않아도 된다는 주의였다.
도진이 이제 막 출근한 그 시간, 미래전략팀 사람들은 모두 출근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다들 일찍 출근했네요.”
“네. 팀장님. 일이 바빠서 그렇죠, 뭐. 하하하…….”
실은 복도에 나가면 여기저기서 선아의 일에 관해 물어볼 테니 움직이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었다.
출근하면서부터 분위기 파악을 마친 선아도 자리에 앉아 일찍부터 업무를 시작했다. 선아는 이럴 때일수록 본분을 지키잔 마음으로 서버실 업무 진행 상황을 리스트업하고 있었다.
때마침 팀장이 출근했으니, 업무 보고를 하고 이번 주 일을 시작할 참이었다. 선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팀장석으로 향해 갈 때였다.
“윤선아 씨! 윤선아 씨!”
사장실 비서가 미래전략팀 파티션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사장님이 쓰러지셨어요!”
“네?”
비서의 말에 선아가 튕기듯 파티션 밖으로 달려 나갔다.
출근해 컴퓨터를 켜던 도진이 그녀의 뒤를 따라나섰다.
***
“엄마는 어디에 계세요?”
“사장실요.”
“앰뷸런스는 불렀어요?”
“네. 지금 오고 있대요.”
사장실 문을 열고 들어간 두 사람은 현숙이 누워 있는 소파로 향해갔다.
현숙은 정신을 잃은 채 소파 위에 누워 있었다. 도진은 곧장 현숙의 호흡과 맥박을 확인했다.
“갑자기 머리가 깨질 것 같다고 통증을 호소하시다가 픽 쓰러지셨어요. 바닥에 그대로 모실 수 없어서 급한 대로 소파에 눕혀드리고 119에 연락하긴 했는데…….”
“잘했어요. 다른 증상은 없으셨어요?”
“두통 느끼시면서 눈앞이 잘 안 보이신다고…….”
“앰뷸런스 오는 중이라고 했죠?”
“네. 곧 도착할 거예요.”
그 순간 현숙이 짧은 비명과 함께 의식을 찾았다. 그녀는 눈도 뜨지 못한 채로 머리를 잡고 신음을 흘렸다.
“나, 으윽, 머리가…….”
“말씀하지 마시고 그대로 계세요. 앰뷸런스 도착할 테니 곧장 병원으로 가야 해요.”
선아는 불안한 눈으로 현숙과 도진을 번갈아 보았다. 그나마도 의학도였던 그가 있어서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엄마가 이렇게까지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처음 봐 두렵고 무서웠다.
“선배, 엄마가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뇌출혈이 의심돼.”
“뭐? 뇌출혈? 의사는 당분간 괜찮을 거라고…….”
현숙은 머리가 깨질 듯한 통증에 제대로 말도 못 하고 있었다. 선아는 망연자실하게 엄마를 보다가 손을 꽉 잡아주었다.
“아무래도 급성 뇌출혈이 아닐까 싶어.”
“급성 뇌출혈이라니…….”
일전에 건강검진에서 과도한 스트레스가 급성 뇌출혈을 유발할 수 있으니 스트레스 관리에 신경을 써야 한다고 들었다.
엄마가 갑작스럽게 스트레스를 받았을 만한 일은 한 가지, 자신의 파혼뿐이었다.
선아는 사람들의 입에 두고두고 회자될 정도로 파격적으로 결혼을 깼다.
그 파혼을 계기로 엄마는 희진에게 당분간 보지 말자고 선언했을 뿐 아니라 재혁의 퇴사를 진행하고, 파혼 과정에서 생긴 손해에 관한 법률 처리도 직접 하겠다고 나서고 있었다.
이 모든 일이 사흘 안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랬으니 스트레스가 큰 것도 당연했다.
“최대한 빠르게 병원으로 이동해서 치료받아야 할 것 같아.”
죄스러움에 선아는 고개도 들 수 없었다. 심장이 아프게 조여들었다. 그러는 사이 응급구조사들이 도착했다.
뇌출혈의 의심된다는 말에 응급구조사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신속하게 환자 이송을 시작했다.
***
병원에 도착한 현숙은 도진의 예상대로 뇌출혈 진단을 받았다.
문제가 있었던 뇌동맥류가 기어이 파열되어 뇌동맥류 파열에 의한 지주막하 출혈이라는 진단을 받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혈관 내 코일 색전술이 시작되었다.
수술 대기실 화면에 윤현숙의 이름 석 자가 떠 있었다. 그 옆에 〈수술 대기 중〉이란 글자가 〈수술 중〉이라는 글자로 바뀌는 순간, 대기실 안을 초조하게 서성이던 선아가 눈물을 터트렸다.
“괜찮아.”
도진이 불안해하는 선아의 손을 붙잡았다. 도진의 커다란 손안에서도 선아의 손은 달달 떨렸다.
“떨지 않아도 돼. 병원에도 일찍 도착했고, 설명 들었다시피 아주 경미한 출혈이야.”
도진의 말에도 선아는 좀처럼 안정을 찾지 못했다.
“그치만…….”
의사는 선아를 앞에 두고 뇌출혈 이후 발생할 수 있는 합병증에 관해 설명해주었다.
그가 설명하는 합병증 증세 중에는 신체 마비나 언어 장애, 시각 장애 등 듣기만 해도 무서운 증상이 포함돼 있었다.
그중에서도 신체 마비에 대한 설명이 이어질 때 선아는 눈물을 터트리고 말았다.
마비라는 말에 이전 삶에서 죽기 전까지의 엄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엄마는 침대에 누운 채 아무것도 못 하다 눈을 감았다.
몸도 못 쓰고 말도 하지 못한 채 2년을 살다가 돌아가셨는데……. 이번 생에도 엄마가 그렇게 될까 봐 두렵고 무서웠다.
게다가 엄마가 뇌출혈에 이르는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게 자신이었다.
“출혈로 인한 병변 부위도 작았고, 무엇보다도 사장님은 처치가 빠르게 이루어져서 합병증도 없을 거야.”
“그치만 의사 선생님이…….”
“의사는 설명 의무 때문에 최악의 상황까지 설명하는 건데. 어차피 사장님은 해당 사항 없어. 정말이야.”
도진의 시선이 계속해서 떨리는 선아의 손에 닿았다. 그의 손 안에서도 선아의 손은 계속 떨리고 있었고, 앰뷸런스를 타고 병원으로 올 때 깨물었던 손끝은 또 빨갛게 부르터 있었다.
“그러니까 손 깨무는 것도 그만하고. 응?”
아이같이 저를 어르는 목소리에 선아가 고갤 들었다.
“선배, 우리 엄마 진짜 괜찮겠지?”
“당연하지. 쓰러지자마자 발견됐고, 병원에 이송하는 데까지 20분도 안 걸렸어. 게다가 개두 수술도 아니고 코일 색전술이잖아.”
“진짜 괜찮겠지?”
“응. 진짜 괜찮아”
선아는 같은 질문을 여러 번 했고, 그때마다 도진은 같은 설명을 수없이 반복하며 선아를 진정시켰다.
돌이켜보면 지난 삶에서 엄마가 죽던 순간에도, 세빈이를 키우며 힘겹던 순간에도, 세빈이를 떠나보내는 순간에도 도진은 이렇게 그녀의 옆에 있어 주었다.
도진의 옆에만 있으면 꼭 보호받는 아이가 된 기분이 들었다. 도진이 그런 사람이어서였을까.
“선배, 내가 좀 무서운가 봐. 미래를 모르면 괜찮은데, 내 미래가 행복하지 않아서 같은 미래가 반복될까 봐 무섭나 봐.”
선아의 입에서 속내가 흘러나왔다.
도진은 그녀의 속내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따뜻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반복 안 될 거야.”
“반복이……, 안 될까?”
“응. 네가 여기로 온 지 이제 3개월이 지났는데, 그사이에도 많은 걸 바꿨잖아.“
머릿속에 3개월간 있었던 일들이 스쳐 지나갔다.
재혁과 희진에게 속은 이전 삶과 다르게 이번 삶에선 그들을 속이고, 그들의 외도를 폭로했다.
원래대로라면 현재 선아는 재혁의 아내였겠지만, 이제는 재혁과 인연이 끊어졌고, 희진과도 절연했다.
미래전략팀은 순항 중이었고, 빅터 프로그램을 통해 과거보다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자신만 달라진 게 아니었다. 도진의 도움으로 신유미 대리는 아이를 지키게 되었고, 엄마의 뇌동맥류 또한 미리 알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엄마에게 뇌출혈이 일어나긴 했지만, 도진의 말을 듣고 있으면 이보다 더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다.
“선아야.”
다정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선아가 고개를 들었다.
“괜찮아.”
깊이를 알 수 없는 짙은 빛깔의 눈동자, 도진의 눈에 불안한 얼굴의 자신이 비추고 있었다.
“괜찮아, 선아야.”
“진짜 괜찮겠지, 선배?”
“응. 괜찮아.”
괜찮다는 그의 말을 듣고 있자면 정말로 다 괜찮을 것만 같다.
선아는 아직까지도 제 손을 쥐고 있는 도진의 손을 꽉 마주 잡았다.
***
수술을 마친 현숙은 회복실에서 세 시간을 더 있고 난 뒤에야 병실로 올 수 있었다.
허벅다리의 혈관을 통한 뇌수술이었다. 간호사는 앞으로도 몇 시간을 더 허벅다리에 모래주머니를 올려두고 지혈해야 한다고 했다.
1인실에 꼼짝없이 누운 현숙은 푸석푸석한 얼굴로 푸념을 연달아 늘어놓았다.
“어휴, 아침부터 물 한 모금이 안 넘어가서 금식한 게 천만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황천길 갈 뻔했네.”
다행히도 현숙의 의식도 명료했고, 마비 증상 같은 것도 보이지 않았다.
의사의 말대로 수술은 성공적이었지만, 지혈 때문에 움직이지 못하는 현숙은 답답함을 수다로 풀려는 듯 끊임없이 말을 해댔다.
“아까는 갑자기 눈앞이 깜깜해지더니 머리가 깨지는 줄 알았다니까.”
어쩌면 그게 자신이 건재하다는 걸 과시하려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선아는 현숙의 옆에 찰싹 붙어서 그녀의 이야길 들었다.
“지금은 머리 안 아파?”
“지금도 아파 뒈질 지경인데, 어쨌든 수술 성공했다면서.”
“그렇게 많이 아파……?”
“이게 또 왜 눈물을 글썽거려. 죽을 걱정은 없다니까 참을 만해.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잖아. 어쨌든 죽진 않으니까 괜찮아.”
죽지 않고 살았단 말에 선아는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이며 눈물을 훔쳤다.
“이재혁 그놈 자식 몰아낼 생각에 밤새 잠 한숨도 못 자고 물 한 모금을 못 마셨는데, 개똥도 쓸모가 있다더니, 그놈 덕분에 겸사겸사 수술받았네.”
수술을 위해서라면 금식을 해야 했지만, 선아의 파혼 이후로 현숙은 속이 썩어난다면서 밥을 굶었다.
특히 어젯밤부터는 재혁을 회사에서 내쫓고, 변호사를 만나서 손해 본 돈을 되찾아야 한다고 열의를 불태우느라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않았다.
그 덕에 지체 없이 수술을 받은 현숙은 정신을 차리자마자 이를 바득바득 갈며 재혁에 대한 복수를 불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