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고드는 밤-57화 (57/85)

57화. 억지로

이른 아침, 희진이 선아의 집 앞으로 왔다.

선아에게 사과하러 집에 오란 말을 들었을 때만 하더라도 몸이 좋지 않다고 핑계를 대려고 했다.

하지만 해도 뜨지 않은 시간부터 성구가 찾아와 난리를 피우는 터라 집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어젯밤부터 시작된 복통이 점점 더 심해져서 사과는커녕 집 밖으로 걸어 나오는 것도 힘이 들었지만, 성구는 희진을 집 앞까지 억지로 끌고 왔다.

희진은 도어록 비밀번호를 누르는 성구의 손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들어가자마자 네 새엄마 앞에 무릎 꿇고, 선아한테는 무조건 싹싹 빌어.”

비밀번호를 누르면서도 그는 희진을 못 믿겠다는 듯 계속해서 잔소리를 해대었다.

“…….”

“왜 대답이 없어!”

“……알겠어.”

현관문이 열렸다. 희진은 쉬이 발걸음을 뗄 수 없었지만 우악스럽게 등을 떠미는 손길에 집 안으로 떠밀리고 말았다.

거실에선 사람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집안사람들 누구도 일어나지 않은 이른 아침인 까닭이었다.

이 이른 아침부터 성구는 부지런을 떨면서 희진을 앞세워 집으로 왔다.

“여기 꼼짝하지 말고 앉아 있어. 내가 식구들 다 데리고 나올 테니까 찍소리도 내지 말고.”

희진은 소파 끄트머리에 가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러자 성구가 눈을 부라렸다.

“소파 말고 바닥에 무릎 꿇고 앉아 있어야지! 그래야 네가 반성하는 걸로 보일 거 아니야!”

“…….”

희진은 더 대꾸하지 못하고 소파에서 내려와 바닥에 앉았다.

임신 때문인지, 발목부터 허벅지까지 평소보다도 더 퉁퉁 부어 있었다.

그런 다리로 무릎을 꿇고 앉는 게 곤욕이었지만, 그러지 않았다가는 아빠가 자신을 죽이려 들 것만 같아서 하는 수 없이 무릎을 꿇었다.

성구는 희진이 꿇어앉은 걸 보곤 부부 침실로 발걸음을 돌렸다.

잠시 후, 딸각 문소리가 들렸고, 현숙이 거실로 나왔다.

파자마 위에 롱 카디건을 걸친 그녀는 거실에 나오자마자 희진을 발견하고는 놀란 얼굴을 했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담담히 바꾸곤 희진을 향해 물었다.

“너 스스로 무릎 꿇은 거니?”

희진은 아니라고 대답하고 싶었다.

그녀도 자존심이 있는 사람이기에 저 스스로 이렇게 꿇어앉은 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게다가 재혁과의 일이 꼭 저만의 잘못이라고도 보지 않았다.

자신은 원래부터 그랬듯 재혁과 계속 사귄 거뿐이었다.

제 아빠도 재혁과 자신의 사이를 알고 있었으니 따지고 보면 이를 숨긴 아빠의 잘못도 있었다.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희진의 입에선 다른 말이 흘러나왔다. 현숙의 옆에 선 성구가 눈을 부라리고 있어서였다.

“네……. 제가…… 제가 꿇어앉은 거예요.”

현숙이 희진의 쪽으로 다가오는 사이, 성구는 선아를 깨우러 2층으로 향했다.

“네가 꿇어앉은 거라니 일어서란 말은 하지 않겠지만, 나는 너와는 할 말이 없구나.”

현숙은 희진과 시선이 어긋나는 자리로 가 앉았다.

서로 마주치지 않는 소파 자리에 앉은 그녀는 희진에게 아무런 말도 붙이지 않았다.

늦은 나이에 가정을 꾸리면서 희진에게 잘하고자 노력했던 현숙의 모습은 이제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

“…….”

거실엔 침묵이 내려앉았다. 숨소리마저 크게 들릴 듯한 정적이 희진을 더욱 괴롭게 만들었다.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부모는 저를 죄인 취급하면서 이른 아침부터 이 집으로 끌고 와 꿇어앉혔다.

부모란 마땅히 자식의 편이어야 할 텐데, 성구는 오히려 희진을 죄인이라 매도하며 나서고 있었다.

그런 성구와 반대로 현숙은 딸인 선아의 편을 들고 있었다.

다리가 아플 테니 일어나서 기다리라든가, 변명이라도 하면 들어줄 테니 이야기해보란 일언반구도 없었다.

이 침묵은 네 잘못을 네가 아느냔 뜻이었다.

마땅히 부모라면 현숙처럼 자식 편이어야 한다는 게 희진의 생각이었지만, 그래 줘야 할 아빠는 도리어 모녀의 눈치를 보며 사과를 종용하고 있었다.

희진은 이 모든 상황이 절망스러웠고, 죽고 싶을 만큼 수치스러웠다.

그들 눈앞에 무릎 꿇은 자신이 꼭 버러지가 된 것만 같았다.

그렇게 숨도 못 쉴 정도로 희진이 질려갈 때였다.

2층에서부터 발소리가 들려왔다.

성구가 선아를 데리고 내려오는지, 연달아 이어지는 발소리에 희진의 얼굴은 하얗다 못해 파랗게 질려버렸다.

잠시 후, 선아가 희진의 앞에 섰다.

솔직히 말하면 이런 비참한 꼴을 선아에게만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더는 물러설 수도 없었다.

희진은 아무런 능력도 힘도 없었다. 재혁마저도 제게 연락하지 않는 현재, 희진에게 남은 사람은 아빠밖에는 없었다.

아빠가 당장 지원을 끊는다면 살던 곳에서도 쫓겨난다.

임신한 몸으로 나가서 일을 하기도 어려우니 지금은 아빠의 말을 거역할 수가 없었다.

“왜 왔어?”

희진은 억지로 사과의 말을 짜냈다.

“미, 미안해, 선아야…….”

그러자 선아가 차가운 말투로 되물었다.

“뭐가 미안한데?”

“내가 널 속이고…….”

막상 무얼 잘못했는지 나열하려 하자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자신이 잘못한 게 없다 싶어서 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애초에 이 사랑의 시작은 자신이었다.

눈치 없이 끼어든 선아의 죄가 크다면 더 클 텐데, 결국엔 부모 배경도 없고 힘없는 자신이 죄인이 된 것이다.

설움이 북받쳤다. 무언가 말을 뱉기도 힘들었다.

송곳이 제 목을 찌르는 듯 고통스러웠다.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이 한통속이 되어 자신을 죄인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결국 희진은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안으며 울음을 터트렸다.

“왜 울어?”

선아의 물음에도 희진은 엎드린 채 서럽게 울었다.

“왜 우냐니까!”

선아는 희진을 큰 소리로 다그쳤다.

“네가 이재혁이랑 먼저 만나서 도리어 네가 피해자 같아서?”

“흐으윽…….”

희진의 흐느낌이 더욱 커졌다. 선아는 그녀를 한심스럽게 내려다보았다.

선아는 희진의 앞에서는 엄마에게 하듯 착한 가면을 쓰지 않았다.

“희진아. 나는 네가 나한테 사실대로만 말해줬어도 이재혁이랑 만나지 않았을 거야. 왜냐면 고작 남자 하나 때문에 가정의 평화를 망쳐선 안 된다고 생각하거든. 네가 나한테 사실대로만 말해줬어도 나는 결혼 준비 중에라도 이재혁이랑 헤어졌어.”

이 말은 진심이었다.

돌아와서는 세빈이를 만나야 한다는 생각에 이재혁과의 관계를 유지했지만, 이전 삶에서 결혼 전에 사실을 알았더라면 미련 없이 재혁과 헤어졌을 것이다.

왜냐하면 저와 희진, 재혁 셋만이 포함된 관계가 아니기에 더욱 그랬다.

셋 사이에는 부모님까지 끼어 있었다.

재혁을 두고 희진과 갈등한다면 부모님 사이에도 필연적으로 갈등이 생길 것이다.

이재혁을 진심으로 사랑했다고 한들, 선아는 엄마가 꾸린 가정을 망쳐가면서 이재혁과 결혼할 이유는 없었다.

“너는 단순히 나 하나만 속였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만 속인 게 아니라 가족 모두의 신뢰를 저버린 거야.”

가족의 신뢰를 저버렸단 말에 희진은 고갤 들고 입술을 뻐끔거렸다.

그 모습이 마치 자신은 그러지 않았다고 항변하는 듯 보였다. 선아는 희진에게 변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네 사랑 하나만이 귀하다 여기고,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기만한 거라고.”

비단 이번 삶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었다.

지난 삶. 선아는 누구보다 희진을 좋아했었다. 희진을 가족이라 생각했기에 그녀와 많은 것을 나누려고 했다.

그런 시간이 10년이 넘었다.

만약 희진도 선아와 같은 마음이었더라면 10년 동안이나 기만하는 짓거리를 못했을 것이다.

세빈이가 태어난 후에라도 재혁과의 관계를 이야기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희진은 계속해서 선아를 기만했고, 끔찍한 선택을 했다.

“네 사랑만 크고 중요한 게 아니야. 너는 이기적이었어. 그렇게 해선 안 됐던 거야.”

희진은 이기적이었고,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선택을 했다. 제 잘못을 감추고자 결국엔 선아마저 죽여버렸다.

“그러니까 희진아. 여기 와서 애처로운 얼굴을 하고 사과할 필요 없어.”

지난 삶에서도 몇 번이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을 기회가 있었음에도 희진은 그러지 않았다.

그랬기에 선아는 희진에게 어떤 기회도 주지 않을 작정이었다.

“나는 너 용서 안 할 거고, 다시는 안 볼 거야.”

선아는 희진의 사과를 받을 마음도, 그녀를 다시 가족 구성원으로 인정할 마음도 없었다.

어차피 희진은 갱생 불가능한 존재였다.

“헛걸음했어. 돌아가.”

희진에게서 돌아선 선아는 2층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성구가 선아를 잡아보려고 했지만, 현숙이 그의 옷깃을 붙잡아 말렸다.

현숙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희진을 내려다보았다.

“애석하게도 선아의 뜻이 그렇다는구나. 당사자의 뜻이 그렇다는데 내가 이래라저래라 간섭할 순 없는 노릇이야.”

현숙은 오열하는 희진을 무감한 눈빛으로 내려다보면서 입술을 움직였다.

“차후에라도 너희끼리 알아서 해결하고, 나랑은 그 뒤에 따로 이야기하자.”

희진에게서 돌아선 그녀는 더 할 말이 없다는 듯이 안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고개를 든 희진은 달칵 소리와 함께 닫히는 문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이제 그녀 앞에 남은 건 경멸 어린 얼굴을 한 성구뿐이었다.

“사과 하나도 제대로 못 하는 멍청한 년.”

성구는 희진에게만 들릴 듯한 작은 소리로 말했다.

저만 그런 게 아니라고, 아빠도 알고 있었다고 외치고 싶었지만, 희진은 허망한 눈으로 성구를 올려다보는 것밖에는 무엇도 할 수 없었다.

“용서해 달라고 바짓가랑이라도 잡고 늘어져야지, 그거 하날 제대로 못 하고.”

급기야 성구는 희진의 몸을 억지로 일으켜 현관으로 끌고 갔다.

몸이 좋지 않았던 희진은 성구의 손에 질질 끌려 현관 앞까지 갔다.

“아빠……. 아빠……. 나 좀 놓아줘……. 아빠…….”

놓아달라고 아프다고 사정을 해도 성구는 기어이 희진을 현관문 밖으로 집어 던졌다.

“당분간 연락도 뭣도 하지 마. 너랑 인연을 안 끊으면 나야말로 설 자리를 잃게 생겼어. 너랑 나랑 연 끊어진 것으로 알고 살자.”

성구는 희진을 문밖으로 내쫓은 채 쾅 소리 나게 현관문을 닫았다.

집 밖으로 쫓겨난 희진은 허망한 얼굴로 주저앉아 한참 동안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왜 나한테만 그래……. 왜 나한테만…….”

그사이에 몸은 더욱 아파져서 무어라 말을 할 수도, 버티고 서 있을 수도 없을 지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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