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거짓말
“엄마 지금 결혼식장에서 희진이랑 이재혁 일 터트렸다고 나한테 뭐라고 하는 거야?”
“당연하지. 굳이 이렇게까지 망신당할 일 없이 조용히 파혼할 수도 있었던 거잖아.”
현숙 또래의 어른들은 선아 또래와는 사고하는 방식이 다르다.
잃을 게 많은 나이이다 보니 무슨 일이든 조용히 해결하려 하고, 이목이 집중되는 걸 원치 않는다.
물론 선아도 세빈이가 아니었더라면 엄마가 생각한 방식으로 조용히 재혁을 정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은 건 이전 삶에서 본 희진과 재혁의 태도 때문이었다.
누구 좋으라고 고분고분 파혼을 해줄까.
조용히 파혼을 해줘봤자 금수만도 못한 그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붙어먹을 것이다.
희진과 재혁이 결혼이라도 한다면, 희진의 진면목을 모르는 현숙은 마지못해 재혁을 가족으로 받아들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된다면 그 진절머리 나는 것들과 평생을 가족이라는 울타리로 엮일 수도 있었다.
그랬기에 남들 보는 앞에서 파탄을 낸 것이다.
더불어 선아는 이 파혼의 책임이 자신에게 오지 않게 하고 싶었다.
그들로 인한 오점을 제 인생에 남기고 싶지 않았다. 남편의 외도로 오물을 뒤집어쓴 듯한 기분을 맛본 건 이전 삶으로 충분했다.
“윤선아, 나는 이번에 너한테 정말 실망-”
“엄마, 내 이야기 좀 들어봐. 이재혁이 만나는 사람이 희진이라는 거, 나도 얼마 전에 안 거야.”
희진의 이름이 나오자 말없이 소파에 앉아 있던 성구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선아는 잠깐 성구 쪽으로 시선을 두었다가 제 엄마를 바라보았다.
“일찍 알았더라면 엄마랑 상의했겠지만, 희진이인 걸 확인한 지는 일주일도 안 됐어. 그걸 알게 된 뒤로는 너무 화가 나서 어떤 게 답인지 판단이 서질 않았어.”
현숙은 못 믿겠다는 눈빛으로 선아를 바라보았다.
“희진이한테 웨딩드레스 입힌 건 일부러 그런 게 아니고?”
저를 타박하는 엄마에게 서운했지만, 선아는 침착하게 미리 준비해둔 이야길 했다.
“응. 그때까지만 해도 희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 엄마도 CCTV 봤잖아. 화면 흐릿한 거. 그 흐릿한 화면만 보고 그게 희진이인 줄 어떻게 알아….”
“그러면 그 녹취는! 영상 말고도 말소리도 녹취했잖아!”
“그건 최근에 확실한 증거를 잡으려고 했던 거야.”
이렇게 막힘없이 대답할 수 있었던 것은 도진의 도움이 컸다.
도진은 집으로 가겠단 선아를 붙잡고 해가 지도록 이런 상황에 대한 조언을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선아는 엄마가 무조건 제 편을 들 거라 믿었지만 도진의 생각은 달랐다.
만인 앞에서 딸이 결혼식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고, 딸과 결혼할 사람의 상간녀가 재혼한 남자의 딸이라는 사실이 알려져 곤욕스러울 거라는 게 도진의 예측이었다.
더불어 파혼 방식에 대한 추궁이 따라올 거라는 게 도진의 생각이었는데, 이제 보니 모든 상황이 도진의 예측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솔직히 희진이가 재혁 씨랑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걸 안 뒤에 나도 당황했어.”
도진에게 조언을 듣고 들어온 덕에 선아는 막힘없이 거짓말을 할 수 있었다.
“재혁 씨야 돌아서면 남이지만, 자매라고 믿었던 희진이가 배신한 건 진짜 당혹스러웠다고.”
선아는 속이 상한 듯 고갤 숙였다.
원래 이런 식의 연기엔 익숙하지 않은 편이었지만, 이재혁과 정희진을 3개월이나 상대한 덕분에 저도 모르게 메소드 연기가 나왔다. 심지어 눈물 한 줄기가 볼을 타고 툭 떨어지기까지 했다.
“아니, 이게 왜, 왜 울고 지랄이야!”
그 모습에 현숙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원래도 현숙은 눈물에 약한 사람이었다.
“이 못난 것아! 네가 뭘 잘못한 게 있다고 울어, 울긴!”
사실 현숙도 파혼은 백번 잘한 거라고 생각했지만 오백여 명의 하객 앞에서 집안 망신을 시켜가면서 파혼한 데 대해선 유감이 컸다.
그에 대해 따지려고 했지만 막상 선아가 눈물을 흘리는 걸 보니 속이 문드러지기 시작했다.
“잘못은 그 연놈들이 한 건데, 네가 왜 바보같이 울어! 등신같이!”
그런데 이상도 하지.
위로도 아닌 엄마의 타박에 이번엔 선아의 눈에서 진짜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선아는 현숙의 앞에서 끅끅 소릴 내며 울었다.
이 모든 게 다 끝났단 생각에 안심이 되어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자신도 제 속을 알 길 없었다.
“희진이랑 이재혁이랑 먼저 사귄 건데, 괜히 내가 끼어들어서 다 파탄 낸 거 같단 생각이 들기도 했고….”
착한 척이 아니라 정말로 그런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지난 삶에서 이번 삶으로 이어지는 100일이 넘는 날 동안 복수의 칼날만을 갈았던 건 아니었다.
남들보다 한 번 더 살고 있다고 하나, 그녀도 평범한 사람인 터라 수없이 자신을 돌아보았다.
혹시나 자신이 눈치 없이 둘 사이에 끼어든 것일까. 그래서 두 사람이 눈치 없는 자신을 참고 참으면서 몰래 사랑을 키운 걸까.
그러나 백번 생각해보아도 그게 사람을 죽일 이유는 되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에 생각을 반복한 결과, 선아는 오늘 결혼식장에서 두 사람의 외도를 폭로했다.
어쩌면 이 눈물은 그동안 고생했다고, 다 끝났다고 자신을 위로하는 눈물일지도 모른다.
“어휴. 내가 너만 보면 속이 문드러져! 진작 나한테 이야기했으면 너 속끓일 일 없이 내가 이재혁 그 자식 가만 안 뒀지! 갱생 불가한 고자로 만들어버렸지!”
현숙이 제 가슴을 퍽퍽 소리 나게 내리쳤다.
“내가 그 자식 콩밥을 먹일 거야! 감방에 보내서 다시는 못 나오게 썩혀버릴 거라고!”
“응?”
선아는 울다 말고 당황스러운 얼굴로 엄마를 보았다.
“너 결혼에 든 돈이 얼마야! 나도 미쳤었지! 나도 안 해본 결혼이라고 네 결혼식에 돈 한 푼 안 아꼈어! 근데 그 돈을 다 허공에 뿌린 거나 마찬가지잖아!”
엄마는 당장이라도 폭발한 기세로 화를 내고 있었다.
“축의금 들어온 것도 다 돌려보내야 할 거고! 밥값은 밥값대로 다 물어야 하고! 꽃값은 꽃값대로 물고!”
생각하면 할수록 열이 더 오르는지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저기, 엄마……?”
“내가 어디 가서 남한테 500원을 안 뜯겨본 사람이야! 근데 이 썩을 놈 때문에 억이 넘는 돈을 날렸다고!”
역시 엄만 엄마였다.
짠순이 엄마는 재혁에 더해 결혼식 비용 때문에 더 열이 뻗친 것이다.
“혼인 빙자에 사기에 하여튼 있는 죄목 없는 죄목 다 끌어다 붙여서 콩밥을 먹여버릴 거야. 개자식. 남의 돈 날리게 하고 저만 편하게 살 줄 알고?”
“엄마, 나도 이재혁이랑 희진이 사생활 유출하고…….”
“그 연놈들이 그 짓거릴 안 했으면 유출할 것도 없었지! 그 개똥만도 못한 연놈들이!”
현숙은 그제야 옆에 있는 성구를 의식하곤 그쪽을 쳐다보았다.
성구는 면목 없다는 듯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저기 엄마…… 나도 사생활 유출이나 그런 걸로 고소당할 수도 있는데…….”
“고소는 무슨!”
현숙은 뒷목을 잡고 빽 소리쳤다.
“여보! 희진이가 선아 고소하게 둘 거예요?”
“고소……?”
“선아가 사생활 유출했다고 고소하게 둘 거냐고요! 내가 당신 얼굴 봐서 희진이 흉은 안 보겠는데, 솔직히 이건 아니지! 둘이 사귀었으면 선아랑 재혁이랑 사귄단 말, 아니 결혼 이야기 오갈 때쯤 나한테라도 언질을 했어야지! 결혼 이야기가 하루 이틀 오간 것도 아니고, 6개월 전부터 결혼 이야길 했는데 희진이가 이렇게 내 뒤통수를 쳐도 되냐고!”
현숙의 분노 앞에서 성구는 볼품없이 쪼그라들었다.
“희, 희진이도 많이 반성하고 있어. 아까 이야기 나눠보니까 자기도 왜 그런지 모르겠다고 선아한테 사과하러 오겠다고 …….”
“그럼! 당연히 사과를 해야지! 식구들이랑 안 보고 살 것도 아니면 잘못했다고 사과하고 그 개차반 같은 놈이랑 헤어져야지! 어쨌든 희진이도 잘한 거 없으니 고소고 뭐고 다 놔두라고 해요! 그 짓거리 하는 순간 나도 가만 안 있을 거니까!”
“알겠어…….”
선아는 놀란 눈으로 따발총처럼 말을 쏘는 엄마를 바라보았다.
여장부 소리를 듣는 엄마여도 선아의 눈엔 그저 목소리가 큰 엄마에 불과했는데, 오늘 보니 기선제압이 보통이 아니었다.
단번에 성구의 기를 눌러버린 현숙은 그러고도 속이 풀리지 않는다는 듯 제 가슴을 퍽퍽 내리쳤다.
“어디서 저런 답답이가 태어났는지! 지가 당해놓고도 고소당할까 봐 벌벌 떠는 맹물 같은 게 어떻게 내 속에서 나왔냐고!”
“저기…… 엄마 내가 벌벌 떨진 않았거든?”
화가 머리끝까지 난 현숙에겐 선아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나 없었으면 저 순진한 게 맹추같이 당하고 있었을 거 아니야! 아이고, 속이 다 문드러지네…. 아이고 저 등신 같은 것…….”
“…….”
“윤선아! 넌 아무 생각하지 말고 방에 올라가서 푹 자! 괜히 쓸데없는 걱정 한다고 몸 축내지 말고 올라가서 아무 생각 말고 눈붙이라고!”
“어…….”
선아는 엄마의 등쌀에 못 이겨 2층 계단으로 향했다.
지금까지도 엄마는 세상에서 제일 든든한 엄마였지만, 오늘의 엄마는 정말이지 최고였다.
“아 참, 선아야.”
저를 부르는 소리에 선아가 계단 앞에서 뒤돌아섰다.
“응?”
“너 손 왜 그래?”
선아는 제 손끝을 내려다봤다.
집에 오기 전, 선아는 도진의 권유로 병원에 가서 손가락 치료를 받았다. 의사는 손끝에 거즈를 덧댄 후 반창고를 돌돌 말아주었다. 그렇게 치료받은 손끝이 엄마의 눈에 띈 것이었다.
“그것도 이재혁이 그런 거야?”
“아니? 그냥 내가 깨물어서…?”
물론 원인제공은 이재혁이었지만, 직접적으로 손가락을 망가트린 건 자신의 초조함이었다. 거사를 앞두고 초조한 나머지 제 손을 무참히도 뜯은 것이니까.
“그래? 그건 다행이네. 그 새끼 짓이었으면, 당장 가서 그 새끼, 손가락 마디마디를 반대로 꺾어버릴까 했는데…….”
역시나 엄마는 엄마였다.
이렇게 든든한 엄마가 제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었다. 저보다 더 화를 내는 엄마를 보면서 위로를 받은 듯 마음이 후련해졌다.
“고마워, 엄마.”
“고맙기는! 빨리 올라가서 자빠져서 자!”
“응!”
선아는 한결 가벼워진 얼굴로 2층에 있는 제 방으로 향했다.
2층으로 향하는 선아의 등 뒤로 현숙의 푸념 같은 한숨이 따라왔다.
“이 잡것들. 감히 어디 할 짓거리들이 없어서……. 내가 이것들을 아주 요절을 내버리든가 해야지…….”
길길이 날뛴 덕에 속이 좀 풀린 것인지, 성구를 의식한 현숙은 ‘이것들’을 ‘이재혁’으로 슬쩍 변경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