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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고드는 밤-55화 (55/85)

55화. 조롱의 밤

“이 후레자식아! 내가 너 때문에 결혼식장에서 얼마나 망신을 당한 줄 알아?”

재혁은 인상을 구기며 제 아버지를 노려보았다.

아버지는 망신을 당했지만, 자신은 모든 걸 다 잃었다.

“지금 말 다 했어요?”

이 일로 인해 부자인 정혼녀를 잃었을 뿐 아니라 보험처럼 사귀던 희진도 잃었고, 직장에서마저도 해고될 게 분명했다. 자신이 이렇게 곤궁에 처했는데도 아버지란 작자는 자기 체면만 생각하고 있었다.

재혁은 불이라도 튈 듯한 눈으로 제 아버지를 노려보았다.

“근데 이 새끼가 어디서 눈을 부라려!”

“제발! 제발 그만하자!”

어머니가 재혁과 아버지 틈을 파고들었다.

“이렇게 된 상황에 우리까지 재혁이를 몰아붙여야겠어요? 그만 좀 해요”

그녀는 저고리 입은 양팔로 부자 사이를 벌렸다.

재혁은 진저리난다는 듯 제 턱시도 재킷에 닿은 어머니의 손을 털어버렸다.

“호텔 손해 변상해준 건 감사한데요, 당분간은 연락하지 마세요. 제 문제는 알아서 해결하고 연락드릴게요.”

쪽팔려서 한 말이었다.

패잔병처럼 선 자신도 쪽팔렸고, 몸태에 맞지 않는 고급 옷을 입은 채 연극배우들처럼 선 자신의 부모도 창피했다.

제 밑바닥을 보고 있는 기분이라 한시라도 빨리 이 자리를 뜨고 싶었다.

재혁은 부모에게서 등을 돌리고 경찰서 앞 계단을 내려왔다.

“미친놈. 해결 좋아하시네. 직장생활 2년 하고도 돈 한 푼 없어서 지가 사고 친 것도 부모한테 물리는 주제에.”

부끄러워서 도망치는 그의 등 뒤로 아버지의 욕설이 따라왔다.

“내가 너 희진이랑 어울릴 때부터 알아봤다. 그년 아빠가 제비 짓 하면서 시장 골목 여자들 다 후려치더니, 너도 거기 물들 줄 알았다고.”

제 등 뒤로 따라붙는 욕설을 들으며 재혁은 욕설을 읊조렸다.

“젠장, 젠장, 젠장, 젠장.”

한번 사는 인생 폼나게 살고 싶었지만, 말짱 도루묵이 되고 말았다.

재혁은 부모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빠르게 걸었다.

제 아버지의 옆에 서 있으면 저마저도 저런 밑바닥 인생을 살게 될 것만 같아서 걸음이 멈추어지지 않았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경찰서 앞 버스 정류장 앞에 선 재혁은 주머니에 손을 넣어 지갑을 찾았다.

하지만 손에 집히는 건 달랑 차 키뿐이었다.

차는 호텔 지하 주차장에 두어 이곳에 없었다. 당장 어디를 가려고 해도 돈 한 푼이 없으니 경찰서 앞에서 발이 묶였다.

“미치겠네…….”

3월의 찬 바람이 정류장에 선 재혁의 옷 틈을 파고들었다. 재혁은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을 내려다봤다.

그는 아직까지도 턱시도 차림을 하고 있었다.

“아……. 이것도 반납해야 되는데…….”

고급 양복점에서 수제 양복을 맞추었지만, 턱시도 재킷은 대여품이었다. 턱시도도 살까 했지만, 한 번 입는 옷을 굳이 살 필요까진 없을 것 같아서 대여를 했던 것이다.

수제 양복점에서 최신상 턱시도 재킷을 골라서 대여 할 때만 하더라도 이 옷이 자신을 더 높고 좋은 곳으로 보내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모든 꿈이 물거품처럼 꺼져버리고 말았다.

정신이 너무 피로해 턱시도 재킷 반납을 미루고 싶었지만, 신상 재킷을 고른 탓에 바로 반납을 해야 했다. 제때 반납하지 않았다가 위약금 같은 걸 물게 될지도 모른다.

가뜩이나 차 할부금에 돈을 다 꼬라박아서 알거지다시피 했기에 푼돈이라도 벌금을 물 여유가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걸어서 30분이면 양복점에 도착한다는 점이었다.

어차피 차를 찾으러 가기 위해서라도 걸어야 했다. 재혁은 주머니에 손을 놓은 채 터덜터덜 걷기 시작했다.

대로변의 사람들이 턱시도를 입은 채 걷는 그를 희한하단 눈으로 바라보았다.

저를 바라보는 이들에게 욕이라고 해주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걸으면 걸을수록 그런 사람들이 늘어갔고, 언제부턴가 재혁은 어깨를 굽힌 채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며 걷고 있었다.

세상 사람들이 그가 저지른 일을 알고, 그를 조롱하는 눈빛으로 보는 것 같았다.

아침에 이 옷을 입을 때만 하더라도 당당하기만 했던 그의 모습은 불에 덴 플라스틱처럼 볼품없어져 버렸다.

그렇게 한참 만에 양복점에 도착했다.

보통은 호텔 직원이나 웨딩 도우미가 턱시도를 반납하러 왔지, 결혼식 당일에 옷을 입은 채 반납하는 신랑은 없다시피 했다.

더군다나 재혁의 얼굴은 새신랑답지 않게 피로로 거뭇거뭇해져 있었고, 웃음기를 찾아볼 수도 없었다.

턱시도를 반납하고 숍을 나가는 그를 직원은 말없이 배웅했다.

재혁은 또다시 호텔로 발걸음을 옮겼다.

핸드폰과 지갑을 호텔에 있는 차 안에 두고 와서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할 수도 없었다. 호텔까지 걸어가는 방법밖에는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3월, 한낮 기온은 10도 가까이 올라갔지만, 해가 지면서는 기온이 영하권으로 떨어졌다.

턱시도 재킷을 반납하고 난 후라 드레스 셔츠와 정장 바지가 그가 입은 옷 전부였다.

휘잉, 바람이 불 때마다 얇은 천 속으로 초봄의 한기가 스며들었다. 재혁은 제 양쪽 팔을 교차해 끌어안고는 진저리를 쳤다.

“어우우, 더럽게 춥네.”

거의 한 시간가량을 걸어서야 호텔에 도착한 그는 주차장으로 내려가 차 앞에 섰다.

“아…….”

하얀 세단은 연분홍색 커다란 리본을 단 채 웨딩카로 변해 있었다.

“씨발, 진짜…….”

한 번뿐인 결혼식, 남들이 하는 건 다 하고 싶었던 그는 이벤트 업체에 웨딩카 세팅을 의뢰했고, 결혼식이 진행되는 동안에 업체 직원들이 차의 외양을 화려하게 꾸며놓았다.

결혼식을 제대로 치렀다면 이 차에 올라 행복한 미소를 띤 채 선아와 첫날밤을 보낼 호텔로 향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차마저도 자신을 조롱하는 듯이 보였다.

“씨발. 씨발! 씨발!”

재혁은 거친 손길로 차에 달린 리본을 떼어냈다.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꾸미는 데 들어간 비용만 50만 원이었다. 써보지도 못할 장식 따위에 피 같은 돈 50만 원을 지출한 것이다.

결혼식 전에야 50만 원이 껌값처럼 느껴졌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았다.

200만 원이 조금 넘는 월급 중 차에 들어가는 돈과 고정비를 빼고 나면 50만 원은 그의 한 달 생활비나 다름없었다.

차의 장식을 아무렇게나 떼어내 호텔 주차장 바닥에 던져 버렸다.

“씨바아아알! 누굴 놀리나!”

차에 시동을 걸고 호텔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그사이 해가 완전히 저물었고, 그의 차 보닛 위로 도시의 불빛이 내려앉았다. 아름답고 휘황찬란한 빛이었다.

하지만 이 아름답고 휘황찬란한 도시 속에 재혁의 자리는 없었다.

외투도 없이 추위에 노출되었던 몸은 차의 히터 바람을 맞으면서도 녹지 않았다.

정신이 고되고 몸이 피로했다.

너무 많은 사람을 만났고, 그들 앞에서 망신을 당했다.

어서 집에 돌아가 따뜻한 물에 몸을 녹이고 침대에 눕고 싶었다.

그러나 집 앞에 도착한 재혁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파트 현관문 앞에 쌓인 그의 짐이었다.

캐리어 두 개에 그의 옷이며 살림살이들이 꽉꽉 채워져 있었다.

캐리어에 미처 담기지 않았던 것인지 편수 냄비 하나는 바닥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이…….”

황급히 도어록 비밀번호를 눌러보았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몇 번을 계속 시도해봤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꽉 닫힌 문이 마치 파혼을 당한 주제에 왜 이곳으로 왔냐며 조롱하는 듯 보였다.

“윤선아, 이 독한 년!”

선아가 제게 이럴 줄은 몰랐다.

아니, 세상 모든 여자가 그에게 가혹하지 않았기에 이런 최악의 상황이 올 거라고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그가 아무리 큰 잘못을 해도 해결해주었고, 희진도 그의 외도를 덮어주고 모든 행실을 다 이해해주었다. 희진이 몰래 만난 여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자신과 가족이 될 선아도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선아 명의의 집이긴 했지만, 이렇게 금방 집에서 쫓겨날 줄 몰랐다.

재혁은 이성을 상실한 채 현관문을 발로 차기 시작했다.

“이런 씨바아알!”

그때 비상구 쪽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

화들짝 정신이 났다.

난동을 부리다 또 경찰서에 가게 될지도 몰랐다. 온종일 당한 망신만으로도 정신이 너덜너덜해졌는데, 더는 논란거릴 만들고 싶지 않았다.

재혁은 자신의 짐을 챙겨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양쪽 손에 캐리어를 들고 편수 냄비를 겨드랑이에 낀 채였다.

버리고 갈 수도 있는 걸 왜 겨드랑이에 끼고 갈까 싶다가도, 그만큼 제 멘탈이 온전치 못한 걸 깨닫고는 눈물을 줄줄 흘리기 시작했다.

짐을 바리바리 싸 들고 주차된 차로 간 그는 뒷좌석에 짐을 쑤셔 넣었다.

이 휘황찬란한 아파트가 자신의 집이라고 생각했기에 억울하게 쫓겨나는 것만 같아 억장이 무너졌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

지금 그가 가진 것이라곤 이 차가 전부였다.

차에서 잠을 자자니 날씨도 걱정이고 제 몸도 걱정이 되었다.

차에 시동을 켠 재혁은 결국 부모님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가자는 어머니에게 당분간 연락하지 말라고 큰소릴 쳤지만, 그곳밖에는 갈 곳이 없었다.

그렇게 10분쯤 달렸을 때, 계기판에 주유 등이 들어왔다.

“너까지 왜 그러냐 진짜…….”

제게 남은 건 이 차가 전부인데, 차마저도 기름이 없다고 울고 있었다.

“다들 나한테만 왜 이러는데……. 씨바알…….”

비가 오지 않는데도 시야가 뿌예지기 시작했다.

제 처지가 처량해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나왔다.

***

“다녀왔습니다.”

선아가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갔다.

집 안은 고요했지만, 비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현숙이 소파의 상석에 앉아 있었고, 그 옆자리에 성구가 앉아 있었다.

소파에 앉은 현숙은 머리 한쪽을 꾹 누른 채 말이 없었다. 성구는 염려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엄마, 아빠. 저 왔어요.”

선아는 소파 근처로 향했다. 정신을 빼고 있던 현숙은 그제야 선아가 온 걸 알아차렸다.

“선아야, 잠깐 이야기 좀 하자.”

현숙의 입가가 한 차례 바르르 떨렸다. 화를 억지로 억누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

“너 희진이랑 재혁이가 그런 사이인 거 언제 알았어?”

둘의 관계를 알게 된 것은 이 세상에서 눈을 뜬 3개월 전이었지만 선아는 거짓말을 했다.

“입주 한 달 앞두고 신혼집에 재혁 씨가 먼저 입주했어. 그때 홈 CCTV를 보고 알았어.”

“그랬으면 나한테 먼저 이야길 했어야지!”

엄마가 이런 반응을 할 줄 알기에 거짓말을 한 것이다.

“엄마한테 이야기했으면 뭐가 달라졌는데?”

“뭐가 달라졌긴! 그럼 결혼식 날까지 미룰 것도 없이 그때 결혼 파투냈겠지!”

선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엄마, 지금 결혼식장에서 희진이랑 이재혁 일 터트렸다고 나한테 뭐라고 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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