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고드는 밤-54화 (54/85)

54화. 부끄러움

선아는 결혼식장에서 나오자마자 택시를 잡아타고 어디론가로 향하고 있었다.

도진은 차를 끌고 그녀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선아가 멈춰 선 곳은 법은 근처의 법조 빌딩 앞이었다. 그녀가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걸 본 도진은 그 건물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로비로 달려갔다.

선아는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엘리베이터 전광판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앞으로 달려간 도진은 선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넋을 빼고 있던 선아가 고갤 돌려 도진을 바라보았다.

“선배?”

선아가 결혼식장을 아수라장으로 만들고 달려나갔을 때, 식장에 있는 다른 사람들은 그 결혼식을 걱정했지만, 도진만은 선아를 걱정했다.

“너 괜찮아?”

선아는 놀란 표정을 지우곤 도진을 향해 활짝 웃었다.

“나 그러잖아도 오늘 저녁때쯤 선배한테 연락하려고 했는데!”

도진의 염려와 달리 선아의 얼굴엔 근심 걱정 하나 묻어 있지 않았다.

“나한테 연락을 하려 했었다고?”

“응. 내가 꿈을 하나 꿨는데, 그 꿈 이야길 선배에게 해주고 싶었거든.”

말한 그대로였다. 선아는 당장 앞에 있는 일들을 해결하고 도진에게 연락하려고 했었다.

어제 단 하루, 선아는 결혼을 뒤엎고 두 연놈의 잘못을 까발릴 계획을 세우면서 그 바쁜 와중에도 도진을 생각했었다.

지난 삶에서 자신이 죽은 뒤의 일들을 해결해준 게 도진인데도 그 모든 사실을 다 듣고 나서도 고마운 마음보다는 세빈이와 다시는 못 만날 거란 생각에 도망치듯 그를 떠나왔다.

이 모든 일이 끝나고 나면 도진에게만은 모든 이야길 하고 싶었다. 더불어 고맙단 말을 꼭 하고 싶었다.

“그보다 여긴 무슨 일이야?”

도진의 눈이 엘리베이터 옆에 붙은 전단으로 옮겨갔다. ‘이혼소송 전문 변호사’ 같은 글씨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설마 이재혁이랑 혼인신고가 돼 있었어? 혼인 무효나 이혼소송 같은 걸 해야 하는 거야?”

가정 법원 앞 법조 빌딩 대부분에는 이혼소송을 전문으로 하는 변호사 사무실이 입주해 있었다. 선아는 도진의 시선을 따라 전단을 훑다 말고 고갤 저었다.

“그런 건 아니고 걱정되는 것들이 좀 있어서. 오늘 결혼식장에서 오픈한 사진 중 대부분은 희진이 외장하드에서 슬쩍한 거거든.”

오늘 결혼식에 나온 두 사람의 관계 직전 동영상과 녹취는 자신이 직접 수집한 것이지만, 그 직전에 나온 두 사람의 연애 사진은 희진의 클라우드를 바꿔치기해서 얻은 것이었다.

희진이 드레스를 피팅하는 날, 선아는 그녀를 떠보듯 결혼사진을 어디에 저장해두어야 할지 모르겠다고, 너는 사진 같은 걸 어디다 저장해두느냐고 물어보았다.

‘요즘 클라우드 같은 것도 많이 쓴다던데. 인터넷은 왠지 못 믿겠더라고. 희진이 너 혹시 클라우드 써 봤어?’

‘아니, 나는 사진 같은 거 다 외장하드에 저장해놓는데……?’

클라우드 시스템이 보편화되지 않은 시기였기에 희진은 클라우드가 아닌 외장하드에 사진을 저장해두고 있었다.

‘아, 그래? 그럼 나도 외장하드 하나 사서 사진 저장용으로 써야겠다.’

모르는 척 답변했지만, 선아는 희진의 답을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웨딩 숍에 오기 전 시중에 유통되는 외장하드 중 가장 흔한 것들로 서너 가지를 미리 준비해놓았다.

선아는 희진이 드레스를 피팅하는 동안, 그녀의 가방을 뒤졌다.

다행히 희진이 쓰는 외장하드는 자신이 사 온 것 중 하나와 같은 모델이었다. 선아는 희진의 외장하드를 새것과 바꿔치기했다.

외장하드는 작은 충격에도 쉽게 고장 나곤 했기에, 희진이 데이터가 날아간 걸 보아도 고장이니 할 거라고 생각했다.

선아는 그렇게 빼돌린 사진에 자신이 수집한 증거를 더해 파혼을 준비했다.

원래 계획대로였다면 세빈이를 얻은 후에 재혁에게서 위자료를 뜯어 알거지로 만들 생각으로 준비한 증거들이었지만, 오늘 결혼식에서 아주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그러나 걱정되는 것도 있었다.

결혼식장 LED 스크린에 뜬 것을 본 희진은 외장하드가 뒤바뀌었다는 사실을 알아챌 것이고 선아를 절도 및 사생활 침해죄로도 고소할 수도 있었다.

선아는 그에 따른 법적인 문제를 미리 준비해놓고자 이곳으로 달려온 것이다.

“인터넷에 뒤져보니까 여기 있는 변호사 중 한 명이 이런 치정 사건 전문이라고 해서 상담받아볼까 하고.”

그 말에 도진은 픽 웃었다.

선아가 재혁의 외도를 알고 절망했을 거로 생각하곤 달려온 것이지만, 생각 외로 선아는 홀가분해 보였다.

“그런 이유라면 여기 있는 변호사를 만날 필요 없어. 전문 변호사 소개해줄게.”

“진짜?”

“응.”

병원 재단 이사장으로 있는 도진 아버지의 인맥은 사회 전반에 걸쳐 넓게 포진돼 있었다.

특히나 사회 고위층일수록 그들의 건강에 대한 사안은 암묵적으로 비밀에 부쳐지기에, 그들의 비밀을 공유하는 병원 재단 이사장과의 커넥션은 더욱 공고하고 끈끈할 수밖에 없었다.

도진을 끔찍이 생각하는 그의 부친이라면 기꺼이 그를 위해 귀찮음을 감수해줄 것이고, 윤현숙에게 빚이 있기에 도움을 줄 것이다.

“그리고 이재혁과 정희진 관련한 일이면 굳이 법적인 자문도 필요 없을 듯한데?”

“응?”

“이재혁이랑 정희진에게 손해배상 청구해. 오늘 결혼식 비용까지 다 해서.”

“아…….”

“내가 보기에 그 작자들이 제일 무서워할 게 돈 같은데.”

도진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재혁의 전 재산은 시간이 지날수록 감가상각이 되는 차 한 대뿐이다. 희진은 오늘 일을 계기로 엄마로부터의 지원이 모두 끊길 것이다.

현재 그들의 능력으로는 식대만 7천만 원이 넘어가는 결혼식에 대한 손해를 감당할 수 없다.

사실 식대만 따졌을 때 7천만 원이지, 결혼에 포함된 부대비용까지 다 하면 1억 원이 넘는 큰 비용이 들어갔다.

회귀한 이후 몇 번이고 결혼식을 축소하고 싶었지만, 결혼을 3개월 앞두곤 취소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었을뿐더러, 이전과 달라 보이면 의심을 살까 봐 그러지도 못했다.

별수 없이 결혼을 강행한 결과, 과거처럼 어마어마한 돈을 쓰고 말았는데, 이제 와 보니 잘된 일이었다.

그걸 빌미로 둘과 법적 분쟁을 하지 않아도 될 테니까.

사실 선아는 그들이 사생활 침해나 명예훼손으로 고소한다고 하면 벌금 한번 물 마음도 있었다. 그렇지만 도진의 이야길 듣고 보니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될 듯했다.

“선밴 진짜 천재인 거 같아.”

선아가 기쁜 듯 웃으며 도진을 바라보았다.

“…….”

함께 기뻐해 줄 줄 알았지만 의외로 도진은 슬픈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선아는 그의 시선을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그가 바라보고 있는 건 선아의 손끝이었다.

결혼식을 아수라장으로 만들 계획을 짜면서 불안한 생각이 들 때마다 손을 깨물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초조한 마음을 누를 길이 없었다.

열심히 깨물어댄 손끝은 빨갛게 해져 속살이 드러났다. 선아는 부끄럽다는 듯이 손을 말아쥐었다.

“아, 내가 손을 깨무는 버릇이 있어서…….”

그의 손이 부르튼 것도 아니고, 선아의 손이 부르튼 것인데, 그는 선아보다도 더 아픈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제 손도 깨물지 말고.”

도진이 선아에게로 손을 뻗었다.

내내 선아에게 닿지 않던 그의 손이 이번에는 그녀에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그 순간, 선아는 또 기시감을 느꼈다.

도진이 그녀의 운동화 끈을 묶어주었던 그때처럼, 자신을 보며 아픈 표정을 짓는 도진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듯했다.

대체 이 기시감 무엇일까. 삶을 두 번이나 산 부작용인 걸까.

이번에도 역시 선아는 기시감의 원인을 찾을 수가 없었다.

***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나온 재혁은 허탈하게 웃었다.

호텔 측에서 기물 훼손으로 신고를 넣었고, 피해가 인정되어 기물에 대한 손해배상을 해야 한단다.

게다가 별것 아닌 듯 보였던 LED 스크린 하나에 2천만 원이나 한단다.

결혼식장 단상 위에 있던 LED 스크린이 크긴 컸지만, 그렇게 비싼 줄은 몰랐다.

재혁의 수중에 2천만 원이 있을 턱이 없었다. 그가 가진 것이라고는 독일제 세단 한 대가 전부였다.

그런 데다가 차는 블랙홀처럼 돈을 있는 대로 족족 빨아먹고 있었다.

반전세였던 집의 보증금이 차로 흘러 들어갔고, 월급을 타는 족족 생활비를 제하고 차 할부를 갚았다.

차 살 때 취득세를 냈는데도, 매년 자동차세라는 걸 내고 있었고, 운전면허를 딴 지 얼마 안 된 20대가 고가의 차를 몬다고 해서 보험료도 남들보다 높은 300만 원에 달했다.

그럼에도 차를 유지한 건 선아의 결혼으로 모든 게 다 해결될 것만 같아서였다.

아이를 갖고 가정을 꾸리려면 어차피 차 한 대가 필요할 터였다. 그 핑계로 남은 할부는 선아에게 떠넘기고 내년 즈음에 지금 차보다 더 좋은 차를 한 대 더 장만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결혼이 파투 나고 난 뒤에 보니 남은 건 할부금이 천만 원이나 남은 차 한 대가 전부였다.

결국 손해배상 비용은 경찰서까지 따라온 부모님이 해결하기로 했다.

손해를 배상하겠다는 각서를 쓰면서, 쪽빛 한복을 곱게 입은 어머니는 눈물을 줄줄 흘렸다.

식장에서의 참상을 본 뒤라 그랬을 것이고, 시장에서 채소를 팔아서 든 적금을 깨야 한다는 생각에 더 서러웠을 것이다.

비싼 화장이 번지면서 눈가가 판다처럼 변했는데도 어머니는 눈물을 그치지 못했다.

그런 어머니 옆에서 아버지는 도리어 빽 소리를 치며 성질을 부렸다.

아버지는 원래도 체면이 상하거나 불리할 때마다 큰소리치는 사람이었다. 문제는 분위기 파악을 못 하고 경찰서에 와서까지 그런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피곤한 상황을 마치고 경찰서 밖으로 나오니 그사이 해가 저물고 있었다.

하늘을 물들이는 붉은 빛이 재혁의 턱시도 어깨를 붉은빛으로 물들였다.

그의 어깨에 주름 자글자글한 손이 올라왔다. 어머니의 손이었다.

“재혁아, 집으로 가자.”

어머니의 주름 가득한 손등은 눈물을 훔치면서 녹은 화장품이 묻어 얼룩져 있었다.

결혼식을 위해 맞춘 비싼 한복에 얼룩이 남을까 봐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더니 화장 얼룩으로 새까맣게 변한 것이다.

재혁은 그런 어머니의 손이 부끄러웠다. 아니, 어머니 존재 자체가 부끄러웠다.

더욱이 자존심이 상하는 건 자신이 바닥으로 추락한 순간에 잡을 수 있는 손이 그 손뿐이라는 것이었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하니까 신경 쓰지 마요.”

어머니한테 한 말이었는데 답은 어머니의 옆에 선 아버지에게서 들려왔다.

“여자나 등쳐먹다가 개망신을 당한 주제에 입만 살아서는! 이 후레자식아! 내가 너 때문에 결혼식장에서 얼마나 망신을 당한 줄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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