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고드는 밤-53화 (53/85)

53화. 넝마

“재혁아!”

현숙이 결혼식장을 나가고 나서야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재혁의 부모가 아들에게로 달려갔다.

죄를 지은 자식이지만 부모에게는 아픈 손가락일 따름이었다.

재혁의 어머니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아들의 부풀어 오른 뺨을 연신 매만졌지만, 재혁의 눈에는 가슴 아파하는 부모는 보이지 않았다.

“씨발! 이거 놓으라고! 이거 놔!”

호텔 직원들에게 몸을 제압당한 재혁은 눈을 까뒤집고 미친 사람처럼 몸부림쳤다.

그의 몸부림은 기물파손 신고를 받은 경찰이 출동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

식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신부는 신랑의 뺨을 치고 퇴장했고, 신랑은 긴급 출동한 경찰에 연행되어 갔다. 양가 부모들이 모두 식장을 떠났으며, 단상 위는 깨진 LED 패널로 엉망이 되었다.

우스운 것은 그 와중에도 호텔 직원들은 하객 테이블로 음식을 서빙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예식은 개인당 식대가 15만 원을 호가했다. 결혼식이 망했을지언정 혼주는 식대를 지불해야 했고, 호텔 또한 음식을 제공해야 했다.

미래전략팀 팀원들이 앉은 테이블에도 메인요리인 양갈비 스테이크가 놓였다.

“내가 지금 뭘 본 거지?”

고기라면 사족을 못 쓰는 박 차장은 양갈비 스테이크를 앞에 놓고도 포크를 들지 못했다.

살아생전 이런 막장을 코앞에서 보긴 처음이었다. 박 차장뿐 아니라 그의 옆자리에 앉은 최 과장도 넋이 나간 듯이 말했다.

“이재혁 씨 말이에요. 류 팀장님한테 기둥서방이니, 남의 여자랑 붙어먹느니 하더니만……. 그거 결국 자기가 제 발 저려서 한 소리였네요?”

박 차장의 말에 신 대리가 버럭 성을 냈다.

“이재혁 씨는 무슨 이재혁 씨예요! 가만있는 류 팀장님한테 그 난리를 피우더니, 내가 이럴 줄 알았다! 에이, 더러운 자식. 에이 상종 못 할 놈.”

평소답지 않게 욕설을 뱉은 신 대리는 양손에 각각 포크와 나이프를 쥐고는 양갈비를 무자비하게 썰기 시작했다. 화는 나는데, 임산부이다 보니 앞에 놓인 양갈비의 유혹을 뿌리치기가 어려운 것이다.

섬찟할 정도로 칼질을 해대는 신유미 대리를 보면서 박 차장은 입을 꾹 다물고는 도진이 앉아 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선아가 결혼식장을 박차고 나가는 순간, 도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뒤를 따라 나갔다.

혹시나 이렇게 될 걸 미리 알고 있었나 궁금하기도 했지만, 류도진의 팬을 자청하는 신 대리의 기세가 너무 무서워 입도 열 수 없었다.

“괜히 가만있는 우리 팀장님만 찬물 뒤집어썼잖아요! 팀장님한테 미친 소리 할 때부터 이재혁 인성 알아봤다니까!”

재혁의 흉을 보면서 칼질을 하는 신 대리의 모습은 흡사 살수와 같아 보였다.

“우리도 일단 먹긴 먹자고. 결혼 뒤집혔어도 혼주가 식대는 낼 건데 비싼 음식을 버려서야 쓰겠어…….”

“그쵸……. 음식이 나왔으니까 먹고 가긴 해야죠…….”

박 차장과 최 과장도 포크와 나이프를 집어 들었다.

미래전략팀 테이블뿐 아니라 결혼식장을 채운 테이블 대부분이 비슷한 상황이었다.

결혼식 타임 중에서도 선호도가 가장 높은 점심 프라임 타임 예식이었다.

하객 오백여 명 중 백여 명은 이미 식장을 빠져나갔지만, 하객 대부분이 테이블에 앉아 음식을 먹으며 이 막장 같은 상황에 대한 이야길 나누었다.

이곳저곳에서 신랑이 내연녀와 아주 오래 사귄 듯하단 말과 함께 조상이 도와서 결혼식이 깨진 거란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결혼식장 단상 위에선 호텔 직원들이 깨진 LED 패널 때문에 우왕좌왕하고 있었지만, 테이블에 앉은 하객들은 혼란스러워하면서도 앞에 놓인 음식을 싹 비워가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눈앞에서 본 막장 상황을 이야깃거리 삼아 식장 안은 어느 결혼식보다도 더 시끌벅적하고 화기애애했다.

***

희진은 성구의 손에 이끌려 오피스텔로 끌려왔다. 15평 남짓한 오피스텔엔 아침에 결혼식장으로 가기 위해 준비하던 흔적이 여실했다.

드레스를 입을 거면서도 희진은 아침부터 이 옷 저 옷 꺼내 입고, 화장에도 공을 들였다.

선아에게 뒤지고 싶지 않은 마음에 그런 것이었지만, 성구의 눈에는 딸이 정신이 빠진 것처럼 보였다.

“너 정신이 있는 애야?”

희진의 뺨으로 손이 날아왔다. 짝 소리와 함께 연달아 맞은 왼쪽 뺨이 부풀어 올랐다.

“아빠!”

희진은 뺨을 맞은 채 상처 입은 눈으로 제 아버지를 보았다.

“이 멍청한 년!”

성구는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예전엔 익숙한 얼굴이었지만 성구가 재혼하면서부터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얼굴이었다.

그는 새 삶을 사는 자신을 보면서 딸에게도 새 삶을 살라 조언했었다.

배우자만 잘 만나도 팔자가 편다고, 학벌은 괜찮으니 좋은 곳에 취업해서 1, 2년만 제대로 버티면 괜찮은 남자를 소개해준다고도 했었다.

“얼빠진 년! 말귀를 못 알아들어도 유분수지!”

또다시 성구의 손이 희진의 얼굴을 향해 날아왔다. 희진은 몸을 웅크려 그의 손을 피했다.

그녀는 임신한 몸이었다. 물론 원치 않았던 임신이었고, 임신 후 재혁에게 외면받은 데다가 오늘은 그로부터 위협까지 당했지만, 어쨌든 홑몸이 아니었다.

“이러지 마, 아빠.”

“뭐? 이러지 마? 이년이 정신이 썩어서는!”

그런 그녀가 가소로웠는지, 성구는 치렁치렁한 희진의 드레스 자락을 찍 찢어버렸다.

“왜 이따위 걸 입고 나와서 웃음거리를 자처하느냔 말이야!”

너풀거리던 드레스 자락이 무릎 언저리에서 뜯어져 나갔다.

“웨딩드레스 입으니 네가 그 새끼랑 결혼할 것처럼 좋디?”

희진은 그게 아니라고, 웨딩드레스를 들러리 드레스로 권한 것은 선아고, 재혁과 먼저 사귄 것은 자신이라고 악다구니가 쓰고 싶었다.

그러나 다음에 따라온 성구의 말 앞에서 그녀는 망연자실한 눈으로 제 아빠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바보 같은 년. 몰래 사귀었으면 지금까지 그랬듯이 들키지나 말 것이지. 등신같이 그것 하나를 못 하고! 정리할 시간을 그만큼이나 줬는데 제 몸뚱이 간수 하나 못 하고!”

“알고…… 있었어, 아빠?”

“이재혁 같은 놈이랑 이어져서 좋을 게 뭐가 있어! 그런 놈이 뭐가 좋아서 목을 매다가 이 사달을 만드느냔 말이야!”

성구가 그들의 연애 사실을 알고 있었단 말에 희진은 하얗게 질렸다.

“알고 있으면서 어떻게 선아랑 재혁 오빠 결혼을 허락할 수가 있어? 나 아빠 딸이잖아. 아빠 딸이 좋아하는 남자를 어떻게…….”

“그런 개차반 떨쳐 낼 기회를 줬으면 알아서 잘했어야지!”

그러고 보면 말이 되지 않았다.

재혁과 자신의 사이를 알고 있었더라면 재혁에게 자신의 학원을 알아 봐주라는 둥 그런 말은 하면 안 되었다.

“어떻게 아빠가…….”

“이 맹추 같은 게.”

“나랑 재혁 오빠 사이 알았으면 아빠가 이렇게 말하면 안 되는 거잖아……. 설마……. 선아랑 재혁 오빠가 다정한 거 보면 내가 상처받고 떨어져 나갈까 봐 일부러 더 그런 거야? 나 상처 주려고……?”

“이 멍청한 게 뭐가 우선인지도 모르고 홀딱 빠져서는….”

“말릴 수도 있었잖아. 다 안다고 그만하라고 했을 수도 있었잖아. 아빠도 모르는 척한 거잖아…….”

“그 새끼 부자 사위 된다고 헤벌쭉하던 걸 봤으면 알아서 몸단속하고 마음잡았어야지!”

“괜히 아는 내색했다가 새 식구들한테 곤란할까 봐 입 다문 거 아니야? 그러면서 나만 잘못했다고 하는 거 아니냐고!”

“이게 어디서 꼬박꼬박 말대꾸야! 멍청하게 남자한테 정신이 팔려서 팔자 말아먹은 주제에. 너 그 새끼 감언이설이 진짜 같든? 선아랑 잠깐 살다 이혼하고 너한테 온다는 말이 진짜 같더냐고! 그거 다 남자들이 이 여자 저 여자 동시에 등쳐먹을 때 쓰는 말이라고! 이 등신 같은 년아!”

“아…….”

그 순간 희진은 성구의 옛 모습을 떠올렸다.

엄마는 아빠의 잦은 외도에 힘겨워하다가 집을 나갔다. 애초에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기에 엄마가 집을 나가자마자 부모님의 관계는 정리할 것도 없이 파탄이 났다.

그 뒤로도 성구의 여성 편력은 끝나지 않았다.

한 번은 시장 골목에서 막걸릿집을 하는 아줌마와 눈이 맞았다.

아빠가 그녀와 연애를 하던 시절, 중학생이던 희진은 매 저녁을 막걸릿집에 가서 명태전 같은 것을 반찬으로 놓고 해결했다.

언젠가는 아빠가 학원 선생과 사귀어서 고등학교 시절에는 공짜로 학원에 다니기도 했었다.

또 언젠간 강남에 사는 나이 많은 여자를 사귀었었는데, 아빠의 행색이 눈에 띄게 달라졌었다.

그 여자 덕분에 대학 입학 등록금과 비싼 전공 서적들을 마련할 수 있었지만, 할아버지뻘 되는 남자가 집에 들이닥치던 날 그 여자와의 관계도 끝이 났다.

아빠는 나이와 상관없이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얼굴이 그렇게 번듯한 편도 아니었지만, 새엄마와 신혼살림을 하는 모습을 보니 이해가 되기도 했다. 마치 입속에 든 혀처럼 굴며 현숙의 앞에선 쩔쩔매었다.

아빠의 그런 모습이 선아와 연애를 시작할 적의 재혁과 겹쳐 보였다.

재혁 또한 지극히 남에게 무신경하고 이기적인 남자였지만, 한때는 선아에게 다정한 척을 했다.

제게 있어 백마 탄 왕자였던 재혁은 실상 제 아빠 같은 사람이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빠가 새 가정에 매우 만족하고 있듯이, 재혁 또한 금방 이혼하겠단 말로 저를 구슬려놓고는 선아와 백 년, 만 년 결혼 생활을 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아빠의 말대로 자신이 등신이었을지도 모른다.

“다신 이재혁 만날 생각하지 말고 자중하고 있어.”

성구는 희진의 핸드백을 뒤져 현숙이 준 카드를 집어 들었다.

“돈 쓴 내역 남으면 자중하고 있단 핑계도 안 통하니까 당분간은 얌전히 처박혀 있어.”

카드를 들고 주방으로 간 그는 가위를 집어 마그네틱 카드를 잘게 잘랐다.

희진은 그런 제 아빠를 지켜보면서 울먹거리며 입을 열었다.

“아빠가 어떻게……, 어떻게 나한테 이래?”

홱 돌아선 성구는 불이라도 떨어질 듯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밖에서 살림을 차려도 너 키우는 데 소홀한 적 없어. 내가 장가 잘 든 덕에 너까지도 팔자가 폈고.”

틀린 말은 아니었다. 여러 여자를 등쳐먹고 살았지만, 성구는 적어도 희진의 양육 의무를 저버리진 않았다. 그랬기에 희진도 저를 버린 엄마보다는 아빠를 더 소중하게 생각했다.

아니, 애초에 남에게 빌붙는 아빠지만 그런 아빠에게 빌붙지 않으면 이 세상을 살 수 없기에, 그녀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기도 했다.

“쯧쯧, 그런데도 주제를 모르고 경거망동을 하고……. 내가 부르면 집으로 와. 와서 선아 앞에 무릎 꿇고 빌 준비 하고!”

성구는 그 말을 남기고 집을 나섰다. 탕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닫혔다.

홀로 남은 희진은 제가 입고 있는 웨딩드레스를 내려다보았다.

남의 결혼식에 입은 드레스였지만, 오늘 아침에 이 드레스를 입을 때만 하더라도 설렜었다.

아주 잠깐이지만 선아보다 제가 예뻐 보일지도 모른단 생각을 했고, 임신 소식을 들은 이후 연락을 끊은 재혁이 저를 다시 한번 봐줄지도 모른단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찢어진 웨딩드레스처럼 넝마가 되어 있었다.

‘너지! 네가 꾸민 짓이라고 말하라고! 내가 아니라고! 아니라고 말하라고!’

자신의 어깨를 붙잡은 채 앞뒤로 흔들던 재혁을 생각하니 몸의 피가 모두 빠져나가는 듯 한기가 들었다. 제 몸의 혈액이 모두 발끝으로 흘러나가는 듯 기운이 빠졌다.

“아……!”

그 순간 희진은 아릿한 복통을 느꼈다.

그녀는 제 배를 안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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