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마찰음
검정 턱시도를 입은 재혁과 흰 슈트를 입은 윤선아, 두 사람이 긴 버진로드 끝에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선아는 재혁의 눈을 응시한 채로 신부 행진곡의 느린 박자 따위 무시한 채 버진로드 위를 걸었다.
찌르면 피라도 나올 듯 끝이 뾰족한 스텔레토 힐이 버진로드 바닥을 찍었다. 10cm가 넘을 듯 높다란 힐은 선아의 눈높이를 재혁의 눈높이와 똑같이 만들었다.
사람들이 의아한 눈으로 선아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하객석 쪽으론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당당하게 걸었다.
그 모습은 결혼식 신부라기보다는 흡사 개선장군 같았다.
제게로 다가오는 선아를 보면서 재혁은 스스로를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사는 내내 단 한 번도 그는 자신의 성적 취향에 대한 의문을 가진 적이 없었다.
그런데 자신을 또렷이 응시한 채 버진로드 위를 걸어오는 선아를 보면서 몸의 중심에 힘이 몰리는 게 느껴졌다.
선아의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는 신부의 모습이 아니었다.
결혼식 신부 하면 떠올리는 성스럽고 순결한 모습과는 전혀 다른, 반항적으로까지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그 당당함이 재혁을 압도했다.
저 특별한 여자가 제 아내가 된다.
결혼식이 다가올수록 선아를 향한 욕정이 끓어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이 식만 끝나면 드디어 선아를 취할 수 있다.
재혁은 선아가 어서 제 앞에 오길 기다렸다. 선아와 손을 잡고 결혼식을 올리고, 호텔로 가서 그녀를 가질 것이다.
재혁의 얼굴에 승리자의 미소가 걸리고 있을 때, 신부 행진을 따라 시선을 움직이던 하객들의 얼굴은 경악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재혁의 뒤, 단상 뒤에 마련된 대형 LED 스크린이 밝아지고 그곳에 믿을 수 없는 영상이 떴다.
처음 LED 스크린에 불이 들어오고 사진이 떴을 때만 하더라도 신랑 신부의 연애사를 담은 영상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그 영상은 신랑 신부의 영상이 아니었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재혁이 한 여성의 어깨에 팔을 감은 채 그녀의 볼에 입을 맞추고 있었다.
그다음 사진엔 두 사람이 졸업 가운을 입고 학사모를 쓴 채 입 맞추고 있었다.
그 뒤로도 입을 맞추거나 손을 잡은 사진이 연달아 뜨다가 호텔 지하 주차장에서의 두 사람 모습이 스크린을 채웠다.
사진 속 재혁의 옆에 있는 여자는 이 결혼식 들러리처럼 머리를 풀고 있었다.
하객들의 시선이 단상 옆에 선 희진에게로 향했다가 이내 다시 LED 스크린으로 향했다.
LED 스크린에 아파트 거실로 보이는 곳에서 두 남녀가 끌어안고 입맞춤을 나누는 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동영상 상단에 적힌 날짜는 빠른 속도로 바뀌어 갔고, 영상 속의 공간에도 해가 비추었다가 지고 밤이 되었다.
영상 속 시간은 계속해 흘러갔고, 두 남녀의 차림이 계속해 바뀌었지만, 두 남녀는 그 여러 날 동안 그곳에서 스킨십을 가졌다.
영상은 남녀의 결합 직전이나 신체 노출이 있기 전에 끊겼지만, 그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제 등 뒤에서 무슨 영상이 플레이되는지 모르는 재혁은 제 앞에 다다른 선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순간이었다.
손을 공중으로 들어 올린 선아가 그의 뺨을 냅다 후려쳤다.
짝!
마찰음이 울려 퍼짐과 동시에 현악 연주가 멈추었다.
“!”
하객들은 경악에 찬 채 신랑 신부를 바라보았다. 결혼식장에 지독할 정도의 정적이 들어찼다.
재혁은 오른손으로 제 뺨을 감싸 쥐며 선아를 바라보았다.
“왜…….”
재혁은 선아가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재혁의 입에서 왜 이러냔 말이 나오기 전, 정적을 깬 것은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신음이었다.
-흐으, 흐읏.
동영상은 두 남녀가 끌어안은 상태에서 멈추어 있었지만, 그들이 내는 듯한 마찰음과 비음이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점점 더 커져 마침내에는 예식장을 가득 채웠다.
“이게 무슨…….”
그제야 이상함을 느낀 재혁은 선아에게 맞은 뺨을 쥔 채 뒤돌아섰다.
“!”
등 뒤의 LED 스크린을 본 재혁은 눈을 부릅떴다.
화면은 재혁과 희진이 서로의 몸을 끌어안은 채 멈추어 있었다.
-철퍽, 철퍽, 철퍽.
옷을 탈의하기 직전에 끊어 신체가 노출되거나 야한 장면은 나오지 않았지만, 영상과 달리 소리는 계속해서 재생되고 있었다.
-아으, 희진아, 선아, 선아 흉내 좀 내줘.
-흐으, 조금 더, 재혁 씨, 조금 더 깊게.
-아아, 선아야, 제기랄, 나올 것 같아.
-안에, 안에 해도 돼. 재혁 씨, 안에…….
그 소리에 재혁은 다리가 풀려 휘청거렸다.
“이…… 이게 무슨…….”
정신을 차린 그는 선아의 손을 붙잡으며 고갤 저었다.
“아니야. 선아야. 이거 아니야. 이거 누가 꾸민 짓이야. 이거 나 아니야. 정말 아니라고.”
재혁의 말소리에 스피커에서 나오는 말소리가 겹쳐졌다. 희진의 목소리였다.
-결혼식 날 말이야……. 선아랑 호텔에서 묵을 거라고 했잖아. 나도 그 호텔에 방 잡을 테니까 잠깐이라도 나한테 왔다 가면 안 돼? 솔직히 난 두 사람 결혼식도 탐탁지 않단 말이야. 꼭 선아한테 오빨 빼앗기는 거 같고…….
-빼앗기긴 뭘 빼앗겨. 잠깐 사는 거라니까.
선아가 제 손을 잡은 재혁의 손을 떨쳐내며 말했다.
“잠깐 살 걸 나랑 결혼을 왜 해? 네가 진짜 사랑하는 원앤온리, 유일한 사랑 정희진이랑 결혼하지?”
또다시 스피커에서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번엔 재혁의 목소리였다.
-결혼식 날 호텔로 갈게. 내가 진짜 사랑하는 건 너뿐이야. 가난이 싫어서 선아랑 결혼하는 거지, 너랑 나야말로 원앤온리, 유일한 사랑이잖아. 마음 풀어, 희진아. 응? 응?
재혁은 사색이 된 채 자신의 말을 부정하기 시작했다.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이거 다 누가 꾸며낸 짓이야. 그게 아니라니까-”
선아는 그의 말을 듣는 체도 하지 않고 그대로 돌아서 버진로드를 따라 식장을 나가버렸다.
“선아야, 선아야!”
선아를 뒤를 따라가던 재혁은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거센 마찰음을 의식하며 뒤돌아섰다.
듣기에도 민망한 철퍽이는 소음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자신의 성행위 소리를 듣는 것도 끔찍하지만, 선아를 부정하면서 희진과 나누었던 말들이 식장 안 하객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되고 있었다.
“뭐야……. 신랑이 바람피웠나 봐……. 그것도 신부 자매랑…….”
“저기 웨딩드레스 같은 들러리 드레스 입은 여자가 화면에 나오는 여자 맞지?”
“아니, 사람이 아무리 개념이 없어도 그렇지, 어떻게 한 집안의 두 여자랑 그럴 수가 있어. 징그럽게 흉내를 내달라는 건 또 뭐고…….”
선아를 붙잡으려던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저거부터 꺼야 해……. 저거부터…….”
재혁은 선아를 따라 나가는 걸 포기하고 단상 위로 올라갔다.
“젠장. 누가 이 이따위 걸…….”
결혼식장을 채운 오백여 명의 하객이 모두 그를 보고 있었지만, 혼이 빠진 재혁은 그런 시선조차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단상 위에는 양가 어머니들이 켜놓은 화촉이 타오르고 있었다. 재혁은 다섯 개의 양초가 꽂힌 은촛대를 집어 들었다.
촛대를 든 그는 대형 LED 스크린을 촛대로 내리쳤다.
퍽! 퍼억! 퍽! 퍽!
대형 패널에 금이 갔다.
재혁의 손등으로 촛농이 뚝뚝 떨어졌지만 뜨거움조차도 느껴지지 않았다.
“누가 이따위 짓을, 누가 감히 이따위 짓을…….”
계속되는 파찰음 속에 LED 스크린이 깨지고 마침내 영상이 꺼졌지만…….
-다리 좀 모아봐. 조금만 더 조여줘, 으, 싸, 싼다!
그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왔다.
“왜! 왜 안 꺼지는 거야!”
LED 패널이 고장 난 것과 별개로 결혼식장 천장에 설치된 스피커에서는 계속해서 소리가 들려왔다.
“이거 당장 안 꺼? 씨발! 이거 안 끄냐고!”
그의 절규에도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절망스러운 얼굴이 된 재혁은 소리가 흘러나오는 곳을 바라보았다.
단상 위 천장에서, 홀의 끝에서. 단상의 오른쪽과 왼쪽에서, 수도 없이 많은 곳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그의 목소리가 재생되고 있었다.
“아악! 아니야! 이건 내가 아니라고!”
천장 스피커를 향해 촛대를 집어 던졌지만, 촛대는 천장에 닿지 않지 않고 벽을 맞고 튕겨 나왔다.
절망스러운 눈으로 스피커를 올려다보던 재혁은 희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너……. 너…….”
신부가 입을 법한 드레스를 입고 서 있는 희진과 그녀가 보내온 임신테스트기 사진이 겹쳐 보였다.
재혁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희진에게로 달려갔다.
“너지!”
재혁은 희진의 양쪽 어깨를 붙잡은 채 앞뒤로 흔들며 발악하듯 소리쳤다.
“네가 꾸민 짓이라고 말하라고! 내가 아니라고! 내가 아니라 너 혼자 꾸민 짓이라고 말해!”
하얗게 질린 그녀는 재혁이 흔드는 대로 종잇장처럼 흔들렸다.
“이, 이러지 마. 이러지 말라고…….”
가느다란 체구의 희진은 재혁을 떨쳐내려 발버둥 쳤지만 역부족이었다. 이미 이성이 사라진 재혁은 희진을 목이라도 조를 듯한 기세로 몰아붙이고 있었다.
하객들과 호텔 직원이 재혁을 만류하기 위해 달려왔다.
“그만하세요!”
“놔! 이거 놓으라고!”
세 명의 사람이 달려들고 나서야 희진에게서 재혁을 떼어낼 수 있었다.
“이 씨발, 저년이! 저년이 다 망쳤어! 저년이!”
재혁은 사람들에게 붙잡힌 채 몸부림쳤다. 그는 팔다리를 휘두르며 희진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이 개 같은 년! 남의 팔자를 망쳐도 유분수지! 이 개 같은 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감히 이따위 짓을 해? 이 쌍년아!”
눈을 까뒤집으며 제게 욕설을 뱉는 재혁을 보면서 희진은 양쪽 귀를 틀어막았다.
“아니야……. 나는 아니라고……. 내가 그런 게 아니야…….”
연신 고개를 흔들며 부정하는 희진의 앞을 성구가 막아섰다. 희진은 제 앞에 드리운 그림자를 공포 어린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정희진! 너……. 이게 대체……!”
결혼식장에서 일어난 일을 빠짐없이 지켜본 성구는 분노로 부들부들 떨다가 희진의 뺨을 내리쳤다.
짝 소리와 함께 그녀의 고개가 오른쪽으로 돌아갔다.
“집안 망신 그만 시키고 당장 따라 나와!”
성구가 희진의 팔목을 잡아 결혼식장 밖으로 끌어냈고, 재혁은 그녀의 등 뒤에 욕설을 끊임없이 퍼부었다.
그의 입을 다물게 한 것은 현숙이었다. 재혁의 앞에 선 그녀는 들고 있던 한복 클러치로 그의 머리를 내리쳤다.
“이 쓰레기 같은 새끼가…….”
한 대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는 듯 현숙은 연달아 서너 대를 더 후려쳤다.
“다시는 내 딸 앞에 낯짝 디밀지 마. 더러운 자식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