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하얀 옷
신유미 대리가 식장 안으로 들어섰다. 먼저 와있던 미래전략팀 팀원 중 박성우 차장이 신유미 대리를 향해 손을 들었다.
“신 대리. 여기야.”
신유미 대리는 팀원들을 향해 고갤 꾸벅 숙여 인사하곤 그들이 앉은 테이블로 갔다.
호텔 결혼식장의 원형 테이블 하나가 미래전략팀에 배정되었고, 박 차장과 최대희 과장, 도진이 도착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신 대리. 혹시 신부대기실에 선아 씨 있어?”
“아뇨. 없던데요.”
신부대기실에 들렀다 온 신 대리가 고갤 저었다.
“윤선아 씨 오다가 사고 난 거 아니야?”
“사고는요. 신부 들러리한테 물어보니까 곧 도착한다고 하던걸요.”
“아 그래? 근데 있잖아. 들러리로 참석한 여자 말이야. 사장님 딸이라면서?”
박 차장의 말에 최 과장이 처음 듣는 소리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요?”
신 대리가 나서서 박 차장의 말에 맞장구쳤다.
“식장 안으로 들어오면서 들었는데, 그렇다던데요?”
그 말에 최 과장이 아쉽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선아 씨 친구인 줄 알고 소개해 달라고 할랬는데…….”
“최 과장 그렇게 안 봤는데 권력욕이 있었네. 사장님 사위 자리를 탐내고 말이야.”
“권력욕은요! 사장님 딸인 거 몰랐다니까요!”
펄쩍 뛰는 최 과장을 향해 신유미 대리가 놀리듯 몰아붙였다.
“최 과장님, 양심도 팔아먹으신 거 같아요. 친구인 줄 알았어도 그렇죠. 과장님이랑 선아 씨가 여덟 살이나 차이 나는데, 어디 선아 씨 친구를…….”
“그러게 말이야. 도둑놈이었어. 도둑놈.”
“아이 진짜. 왜들 이러세요. 들러리 그분 되게 참하게 생겼잖아요. 참하게 생겨서 그냥 한번 생각해 본 거였다고요…….”
“근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결혼식 날 들러리를 너무 화려하게 꾸민 거 아니야? 선아 씨가 신부대기실에 없어서 그런가. 들러리가 꼭 신부 같더라니까.”
“사실 저도 좀 그런 느낌이 없잖아 있긴 했어요.”
그러는 사이에도 시간이 흘러갔다.
박 차장이 재킷 소맷단을 걷고 손목시계를 들여다봤다.
“식 시작하기 2분 전인데. 아직도 선아 씨 안 온 건가? 이러다 난리 나는 거 아니야? 호텔이라 예식 시간도 딱딱 정해져 있을 건데.”
“그러게요. 이틀 전에 죽어라 싸우더니, 설마 결혼 파투 나는 거 아니겠죠?”
박 차장과 최 과장의 말에 신 대리가 얼굴색을 바꾸었다.
“남의 결혼식 와서 그런 말을 뭐 하러 해요.”
화촉점화와 입장을 위해 양가 어머니들과 재혁이 식장 입구에 서 있었지만, 아직까지도 선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결혼식이 시작되는 정각이 되었다.
“잠시 후 이재혁 군과 윤선아 양의 결혼식이 시작될 예정입니다. 장 내외 하객 여러분께서는 식장 안에 착석해주시길 바랍니다.”
사회자의 안내가 들여오자 신 대리가 반색을 했다.
“선아 씨 왔나 봐요.”
박 과장은 자신의 가슴 위에 손을 얹으며 안도한 듯 한숨을 쉬었다.
“휴. 회식 때 그 모습을 봐서 그런가. 결혼 안 하겠다고 할까 봐 내심 조마조마했다고.”
회식 이야기가 나오자 최 과장이 박 차장의 옆구릴 콕 찔렀다.
박 차장은 같은 테이블에 앉은 도진을 의식하며 입을 닫았다.
이 결혼식장엔 도진의 아버지도 현숙의 지인으로서 참석해 있었지만, 도진은 자신의 아버지 곁에 앉지 않고 팀원들과 함께 배석했다.
도진은 말없이 식장 입구를 바라보았다.
식장 입구엔 재혁이 턱시도를 입은 채 서 있었다.
평소라면 재혁도 도진의 시선을 의식했겠지만, 지금 그의 정신은 온통 식장 바깥으로 향해 있었다.
선아가 아직 식장에 도착하지 않았다. 이제 곧 결혼식이 시작될 텐데, 그녀는 어제부터 연락도 받지 않고 재혁을 피하고 있었다.
메이크업 숍에서 마주치려니 했지만, 아침에 숍에선 더욱 황당한 이야길 들었다. 신부가 메이크업 예약을 취소했단다.
메이크업을 취소하고 어떻게 결혼 준비를 한다는 걸까. 결혼 준비에 관심이 많았으니 그사이 더 나은 메이크업 숍이라도 찾은 건가.
반신반의하며 결혼식 준비를 마치고 식장에 왔더니 아니나 다를까, 결혼 직전이 되도록 선아가 나타나지 않아 재혁의 속은 바짝 타들어 갔다.
그때였다. 식장 안으로 웨딩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뛰어 들어왔다.
결혼식장 안의 하객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응시했지만, 식장에 들어선 이는 선아가 아닌 희진이었다.
“방금 선아한테 연락이 왔어요.”
희진은 하객들의 말대로 신부라고 믿을 만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머메이드라인의 새하얀 드레스는 그녀의 마른 몸을 부각시켰고,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드레스에 장식된 화려한 비즈가 반짝였다.
“엘리베이터 타고 올라오고 있다고, 금방 도착하니까 예정대로 결혼식 시작하래요.”
희진은 선아가 이대로 도망가 결혼식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를 바랐지만, 들러리 역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선아에게 연락을 넣고 동선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때까지도 애를 태우고 있던 재혁은 사회를 맡은 친구에게 눈짓했고, 사회자는 뜻을 알아채고 고갤 끄덕였다.
“지금부터 이재혁 군과 윤선아 양의 결혼식을 시작하겠습니다. 식장 밖에 계신 하객 여러분께서는 자리에 식장 안으로 들어와 정해진 자리에 앉아주시길 바랍니다.”
사회자의 말이 끝나자 하객들은 기대감 어린 눈빛으로 식장 입구를 바라보았다.
버진로드 위 샹들리에에 조명이 들어오며 하얀 카펫 깔린 기다란 길을 비추었다.
“지금부터 성스러운 예식을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양가 어머님께서 두 사람의 앞날을 밝힐 화촉을 점화하겠습니다.”
진달래 빛깔의 한복을 입은 현숙과 쪽빛 한복을 입은 재혁의 엄마가 손을 붙잡았다.
“그럼 입장할까요?”
현숙의 말에 긴장하고 있던 재혁의 어머니가 고갤 끄덕였다.
“양가 어머님께서 입장하겠습니다. 하객 여러분께서는 큰 박수로 환영해주십시오.”
단상 한쪽의 현 악단이 클래식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양가 어머니들은 음악에 맞추어 사뿐사뿐 버진로드 위를 걸었다.
단상 앞에 다다른 두 사람은 마주 서 인사한 후, 단상 위에 올라가 주례석 앞에 놓은 열 개의 촛불에 불을 붙였다.
마지막 촛불에 불이 붙자 하객석에서 우렁찬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사이 희진은 하객석을 돌아 단상의 옆에 와서 섰다.
결혼식에서 들러리로서 신부를 보좌하고, 신부의 가방을 맡아주어야 했지만, 선아가 지각하는 바람에 그녀의 일이 줄어들었다.
남은 일은 선아가 부탁한 일뿐이었다. 결혼식 전날 선아는 희진에게 단상 한쪽에 서서 결혼식 사진을 남겨달라고 했다.
제 남자와 선아의 결혼식 사진 따위를 찍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지만, 들러리를 하게 되면서 코가 꿴 희진은 그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신랑 이재혁 군이 입장하겠습니다.”
사회자의 안내가 끝나자 재혁이 버진로드 위를 걸어 입장했다. 희진은 절절한 마음으로 그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지금 그녀의 배 속엔 재혁의 아이가 자라고 있었다.
제 아이 아빠가 다른 여자와 결혼하러 식장에 들어서는데, 속이 괜찮다면 그건 지독한 위선일 것이다.
아이가 생기면 재혁을 잡을 수 있을까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막상 임신을 하니 두렵고 무서웠다.
임신을 알게 된 날, 재혁에게 임신 사실을 털어놓았지만, 그때부터 지금까지 재혁은 희진을 피하고 있었다.
결혼식장에 와서 재혁을 마주쳤지만, 그는 경멸 어린 눈으로 희진을 보다가 고갤 돌려버렸다.
임신은 둘이 한 것인데도, 재혁은 마치 그녀가 자신의 발목을 잡기 위해 일이라도 꾸민 것처럼 바라보았다.
그런 재혁의 태도가 희진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선아가 부탁해 들러리를 한 것이고, 이 결혼식장에서 예쁘단 칭찬을 많이 받았지만, 그 말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저를 혐오스러운 눈으로 보는 재혁의 앞에서, 그녀는 정말로 자신이 혐오스러운 사람이 된 듯이 느껴졌다.
단상에 이른 재혁이 돌아섰다. 잠시 희진과 눈이 마주치는 듯했지만 그는 곧장 하객 쪽을 향해 돌아서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커다란 박수 소리가 장내를 가득 채웠다. 고개를 든 재혁은 당당한 얼굴로 정면을 바라보고 섰다.
희진은 애끓는 마음으로 재혁의 일거수일투족을 눈에 담았다.
턱시도를 입고 어깨를 쫙 펼친 그는 정말로 멋있었다.
평소에 유들유들한 이미지를 사라지고, 강단 있는 모습이 된 그는 여전히 희진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오빠…….’
희진은 언제나 이런 장면을 상상해왔다. 그가 신랑이 되고, 자신이 신부가 되어 결혼식장에 서는 상상 말이다.
그렇지만 이 결혼은 자신의 결혼식이 아니었다.
이 결혼식장의 혼주도 제 아빠였고, 이 결혼식의 신랑도 제 남자지만, 신부는 자신이 아닌 선아였다.
“잠시 후, 신부 입장이 있겠습니다. 신부가 입장할 땐 하객 여러분께서 큰 박수로 환영해주십시오.”
희진은 결혼식장 입구를 향해 고갤 돌렸다.
단상 위에 재혁도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결혼식장에 선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
식장에 모습을 드러낸 선아를 본 순간 재혁도, 희진도, 그리고 장내 모든 사람도 얼어붙었다.
“어어…….”
개중엔 당황한 나머지 침음을 뱉는 이도 있었다.
“신부 차림이…….”
결혼식장 입구에 선 선아는 드레스 차림이 아니었다.
선아는 위아래로 온통 하얀 슈트를 입고 등장했다.
“아니……. 부케는 어디에다 두고…….”
슈트 차림의 선아는 머리를 높게 올려 질끈 묶고 있었고 부케도 들고 있지 않았다. 신부의 모습이라기보다는 흡사 전사와 같아 보이는 모습이었다.
“저런 옷을 입은 신부는 처음 보는데…….”
하객석 이곳저곳에서 탄식인지 감탄인지 모를 말이 터져 나왔다.
해외토픽에 종종 웨딩드레스 대신 하얀 바지 정장을 입고 결혼하는 신부가 등장하곤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해외 이야기였다.
더군다나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사업가 집안의 딸이 상식 밖의 모습을 식장에서 드러낼 거라 생각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역시나 현숙도 선아를 보며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아니, 쟤가 왜 저런…….”
고집스러운 딸이긴 했지만, 사회적 통념에 벗어나는 딸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선아의 모습은 하얀 옷을 입었다 뿐이지 결혼식의 신부로 보이지 않았다.
현악단마저도 당황한 나머지 신부 행진곡 연주를 잊고 말았다. 선아는 신부 행진곡 따위는 개의치 않고 버진로드를 걷기 시작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현악단이 연주를 시작했다. 딴 딴따란, 딴 딴따란. 익숙한 선율이 결혼식장에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