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집착의 끝 @AW
‘세상에서 제일 좋은 우리 엄마. 엄마는 더 살아줘…….’
선아는 세빈이의 말이 저승에서 살라는 게 아니라 이승에서 살라는 말임을 알아챘다.
그녀는 양옆으로 고갤 저었다.
‘세빈이 없이 엄마가 어떻게 살아……. 엄마는 세빈이 옆에 있고 싶어. 엄마는 세빈이가 있어야 행복해.’
세빈이는 양팔을 벌리고 선아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선아도 세빈이를 마주 안았다.
낮달맞이꽃밭 한가운데서의 세빈이는 몸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사랑해, 엄마…….’
‘세빈아, 엄마 불안하게 왜 자꾸 그래, 세빈아…….’
그 순간, 아이의 뒤에 하얗고 커다란 문이 나타났다.
문은 양옆으로 활짝 열려 있었다.
그 열린 문틈으로 해 질 녘 주택가 풍경이 비쳤다.
문 뒤의 풍경은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웠다. 지는 해의 빛을 받아 금빛으로 빛나는 하얀 건물들 사이로 근심 걱정 없어 보이는 이들이 거리를 걷고 있었다.
천국.
선아는 본능적으로 그곳이 어디인지를 알았다. 문 뒤의 세상은 아픔도 없고 고통도 없는 곳이었다.
‘엄마.’
세빈이는 그곳으로 가려 하고 있었다.
‘다음에 만날 땐 내가 엄마를 업어줄게.’
세빈이가 선아의 허리를 놓고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엄마보다 훨씬 크게 자라 있을 테니까 엄마는 나중에 와.’
세빈이를 향해 다가가려고 했지만, 선아는 발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세빈아. 엄마는…….’
안 된다고 너를 홀로 보낼 수 없다고 말해야 하는데, 세빈이의 뒤로 보이는 풍경이 너무도 평안해서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엄마가 업어줘서 여기까지 편안하게 왔어.’
‘세빈아.’
‘나중에 엄마가 여기 올 땐 내가 마중 나갈게.’
‘왜 자꾸 그런 말을 해…….’
‘엄마보다 더 커다랗게 자라서 마중 나갈 테니까 엄마는 꼬부랑 할머니가 돼서 와. 그때는 여기까지 내가 엄마를 업고 올게.’
‘싫어 세빈아. 엄마 꼬부랑 할머니 되기 싫어…. 흐윽……. 네가 엄마를 못 알아보면 어떡해.’
‘엄마는 세빈이가 어른이 되면 몰라볼 거야?’
‘그럴 리가 없잖아.’
‘나도 엄말 못 알아볼 리 없잖아.’
세빈이가 또 한 걸음 뒷걸음쳤다.
열린 문에서 나온 해 질 녘의 노을빛이 아이의 어깨를 노랗게 물들였다.
‘사랑해 엄마.’
‘세빈아…….’
‘내게 준 사랑만큼 엄마도 사랑받고 또 사랑하고……. 그렇게 행복하게 살다가 다시 만나.’
세빈이는 또 한 걸음 뒷걸음질을 치며 손을 흔들었다.
문틈에서 나온 빛에 아이의 머리와 흰옷까지도 온통 금빛으로 물들었다.
선아는 아이를 잡을 수 없었다.
아니, 잡아서는 안 되었다.
저곳에서 세빈이는 아픔도 슬픔도 모르는 채 행복하기만 할 것이다.
저곳이 그곳임을 알기에 선아는 아이를 붙잡아서는 안 되었다.
자식의 행복을 바라는 이가 엄마이기에 선아는 눈물을 훔치며 손을 들었다.
‘밥 잘 먹고 튼튼해져 있어야 해.’
아이를 향해 손바닥을 내보이면서 손을 마주 흔들었다.
‘응.’
‘엄마는 꼬부랑 할머니가 되면 뚱뚱보 할머니가 될 거야. 뚱뚱보 할머니 업어주려면 튼튼한 어른이 돼야 해. 알겠지?’
‘응.’
마지막 순간, 선아는 최선을 다해 웃었다.
꼬부랑 할머니가 되려면 앞으로 50년은 더 살아야 할 건데……. 우는 얼굴로 작별하고 싶지 않았다.
눈물로 얼룩진 눈가와 새빨개진 코끝을 하고도 선아는 활짝 웃었다.
‘사랑해, 세빈아.’
‘사랑해 엄마.’
‘엄마가 세빈이랑 약속 지킬게. 사랑해, 사랑해, 세빈아 사랑해!’
‘응! 사랑…….’
세빈이의 전신이 황금빛으로 물듦과 동시에 문이 사라졌다.
홀로 남은 선아의 머리가 바람에 흐트러졌다.
연분홍 낮달맞이꽃밭으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눈 점막 아래 맺혀 있던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
또르르 볼을 타고 흐른 눈물이 베갯잇을 적셨다.
볼을 타고 눈물이 흐르는 감각에 선아가 눈을 떴다.
스탠드 조명 불빛에 어둠 속 침대 가만히 노랗게 물들어 있었다.
침대에서 몸을 세워 앉은 선아는 잠옷 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또 세빈이의 꿈을 꾸었다.
아니…….
꿈이 아니었다.
선아를 감싼 기시감이 꿈에서 본 일은 꿈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꿈에서 본 세빈이와 달맞이꽃밭, 하얀 문과 천국의 모습은 그녀의 무의식 깊숙이 자리 잡은 기억이었다.
산 자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기억. 그랬기에 과거로 오면서 선아가 잊을 수밖에 없었던 기억이었다.
눈을 감으면 눈앞에 달맞이꽃밭과 향, 바람의 느낌이 떠오를 만큼 기억은 선명했다.
선아는 온 힘을 다해 세빈이를 천국 문 앞까지 데리고 갔다.
몸이 불편한 아들이 그곳까지 가지 못할까 봐 노심초사한 엄마는 기어이 기적과도 같은 일을 해내었다.
마침내 아이를 천국에 인도한 엄마는, 또 기적처럼 산 자에게 허락되지 않은 그 기억을 떠올렸다.
세빈이는 안식에 이르렀다.
그곳은 몸과 마음의 어떤 제약도 없는 곳이었다.
그곳은 몸이 불편한 사람도 몸을 자유자재로 쓰고, 고통에 허덕이던 이들도 고통을 잊는 곳이었다.
세빈이는 그곳에서 쑥쑥 자라고 있을 터였다.
엄마보다 훌쩍 커서 꼬부랑 할머니가 된 엄마를 마중하러 오겠단 약속을 지키고 있을 터였다.
“세빈아…….”
그제야 아이를 다시 만나야 한다는 생각이 멈춰졌다.
그곳에서 아이가 행복할 것이기에 아이에 대한 집착을 멈추었다.
세빈이가 안식에 이른 걸 깨닫자 선아의 마음은 놀랍도록 평온해졌다.
이불을 거둬내고 침대에서 일어선 선아는 방의 불을 켰다.
화장대 앞에 서서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눈물을 흘려 눈이 충혈돼 있었지만 발그레하고 탄력 있는 뺨은 20대의 모습 그대로였다.
세빈이의 당부는 자신을 다시 태어나게 해달라는 것도, 그 무엇도 아니었다.
‘내게 준 사랑만큼 엄마도 사랑받고 또 사랑하고, 그렇게 행복하게 살다가 만나.’
그저 엄마가 행복하길 바란다는 당부였다.
아이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엄마가 행복한 삶을 살길 바랐다.
그게 아이의 바람이었다.
세빈이의 평안을 위해 세빈이를 놓을 수밖에 없었던 선아처럼 세빈이 또한 엄마가 행복하길 바라며 그녀를 놓아주었다.
“세빈아. 엄마가 약속 지킬게. 엄마가 세빈이랑 한 약속 꼭 지킬게…….”
세빈이와의 당부로 인해 선아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언지를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창밖으로 샛별이 빛나고 있었다. 날이 밝아오면서 또 하루가 시작될 터였다.
오늘은 결혼 하루 전날이었다.
재혁과의 결혼은 선아에게 결코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사랑 없는 남자와 마음에도 없는 육체 행위를 하는 것 또한 자신을 불행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더불어 세빈이를 만나야 한다는 목적이 사라진 지금, 재혁과 결혼하고 그와 섹스할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선아는 거울 앞에 서서 양손으로 짝짝 소리가 나도록 자신의 뺨을 두드렸다.
“정신 차리자. 정신 차리고 힘내자.”
행복에 이르는 길이 보인다.
세빈이의 당부가 떠오름으로 인해 그 길이 더욱 명확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제 삶을 파괴한 이들을 단죄해야 한다.
가정을 파괴하고 자신을 기만하고, 세빈이마저도 보잘것없이 취급한 연놈들에게 복수부터 해야 한다.
그걸 끝내야지만 행복해지기 위한 노력을 시작할 수 있다.
해가 떠오르지 않은 이른 새벽이었지만 선아는 곧장 욕실로 가서 샤워를 했다.
몸을 깨끗이 닦고, 긴 머리를 감고, 단정한 옷을 차려입었다.
잘못된 것을 하나하나 바로잡기 위해서 오늘은 허투루 쓸 수 없었다.
날이 밝자마자 선아는 집을 나섰다.
그녀가 제일 먼저 향한 곳은 웨딩드레스를 예약해놓은 드레스 숍이었다.
***
강남의 호텔 연회장으로 화환이 줄지어 배달되고 있었다.
연회장 입구에서부터 복도에 늘어설 정도로 각계각층에서 축하 화환을 보내왔다.
[이재혁 군과 윤선아 양의 결혼을 축하합니다.]
엔터테인먼트사 사장 딸의 결혼식이기에 관계사뿐 아니라 연예인과 방송국 관계자들 또한 자신들의 이름을 걸고 화환을 보냈다.
“윤현숙 사장님, 축하드려요.”
“바쁘신 와중에 결혼식 참석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른 새벽부터 머리를 올리고 곱게 단장한 현숙은 진달래 빛깔의 신부 엄마 한복을 차려입었다.
그녀의 가슴엔 자줏빛 호접란꽃이 달려 있었다.
늦사랑을 시작해 부부의 삶을 살고 있지만, 현숙은 결혼식을 올린 적이 없었다. 그랬기에 딸의 결혼식만큼은 최고로 치르게 해주고 싶었다.
평소엔 돈 한 푼을 아끼는 짠돌이 엄마고 재혁과 선아에게 사내 연애를 티 내지 말라 못 박은 엄마였지만, 딸의 결혼식 날만큼은 돈을 아끼지 않았다.
현숙과 같은 꽃을 가슴에 단 성구는 남색 정장을 입고, 자줏빛 넥타이를 매었다. 이날을 위해 현숙과 심사숙고해 고른 차림이었다.
자식의 결혼식 날 두 사람은 결혼식 당사자만큼이나 들뜬 얼굴이었다.
그들뿐 아니라 재혁의 부모 또한 이날을 위해 차려입은 모습으로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재혁 또한 이날을 위해 특별 제작한 턱시도를 입은 채 늠름한 모습으로 식장 앞에 서 있었다.
먼저 온 손님이 식장 안으로 들어가고, 또 다른 손님이 현숙과 성구 앞으로 다가왔다.
“결혼 축하드려요.”
“제가 결혼하나요. 우리 선아가 결혼하는 거죠.”
“그런 것치곤 윤 사장님이 엄청 곱게 차려입으셨는걸요.”
“개혼이잖아요. 선아 결혼식 잘 치러야 그다음 식도 잘 치르죠.”
다음 식이란 희진의 결혼을 두고 한 말이었다.
현숙이 미혼모로 살다가 뒤늦게 좋은 남자를 만나 결혼 생활을 시작했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녀가 한때 반짝스타로 시대를 풍미했었기에 감추려야 감출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둘째 따님도 참 아름답더라고요.”
손님으로 참석한 이의 말에 현숙은 빙그레 웃음을 띠어 보였다.
“우리 희진이요?”
현숙은 신부 대기실에서 선아의 들러리로 대기 중인 희진을 떠올렸다.
“사실은 그 애가 선아보다도 생일이 빨라요. 선아가 결혼을 서두르는 바람에 순서가 바뀐 거죠.”
현숙은 이번 결혼을 치르면서 선아가 철이 들었다고 생각했다.
선아가 기특한 생각을 했다. 희진에게 들러리를 부탁하고 신부 못지않게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게 한 것이다.
결혼식 날 가장 아름다워 보이고 싶은 게 신부의 마음일 텐데도, 희진을 저와 못지않게 꾸미며 단란한 가족의 모습을 보이고자 한 것이다.
현숙은 선아의 생각이 기특할 뿐 아니라 고맙기까지 했다.
“요즘 먼저 가고 늦게 가는 게 무슨 의미인가요. 결혼해서 잘 살기만 하면 되는 거죠.”
“그럼요.”
“그럼 식장 안에서 뵐게요. 윤 사장님, 다시 한번 축하드려요.”
“감사합니다.”
손님을 결혼식장 안으로 들여보낸 현숙은 한복 저고리 소매를 걷고 시간을 확인했다.
“그나저나 얘가 왜 이리 늦는담.”
식장 앞은 여느 결혼식장과 마찬가지인 풍경이었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결혼 30분 전이었지만 신부가 식장에 도착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