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충만
“말도 안 돼.”
도진의 이야길 들은 선아는 더욱 하얘진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세빈이가 아니라 선배가 내 시간을 돌린 거라고?”
도진의 이야기는 선아에게 절망을 안겨주었다.
“안 돼……. 그러면 안 돼……. 말도 안 돼…….”
지금껏 선아는 세빈이가 자신을 과거로 보낸 거라 믿어왔다.
그 믿음이 그녀를 이 삶에서 살게 했다.
세빈이가 존재하지도 않았던 세상에서 살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럼에도 이 세상에서 최선을 다해 산 것은 과거로 온 이유가 세빈이를 만나기 위해서라고 철석같이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빈이가 아니라 도진 때문에 과거로 온 것이라니…….
그렇다면 다시 세빈이를 만날 수 없다는 이야긴 것일까.
자신의 장례를 치른 후, 세빈이의 유골까지 챙겨 함께 있게 해준 것은 더없이 고마웠지만, 선아는 더는 도진에게 고마워할 수가 없었다.
“난 다시 살고 싶지 않았어. 세빈이가 없는 과거 따위에서 살고 싶지 않았다고……. 선배가 대체 왜 이런 짓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선아는 자신의 얼굴을 움켜쥐었다. 세빈이를 다시 만나지 못할 거란 생각에 숨이 막혀왔다.
이 집에 온 것은 성장한 세빈이의 모습을 커스터마이징해 보기 위해서였지만, 더는 도진과 함께 있을 수가 없었다.
선아는 여기 온 이유마저도 잊은 채 혼비백산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아무래도 집에 가봐야 할 것 같아.”
도진 덕분에 다시 한번 살게 되었으나 그에 대한 고마운 생각 같은 건 들지 않았다.
도리어 세빈이를 따라 저승으로 가지 못하게 한 그가 원망스러웠다.
방을 나서려던 선아는 큐브가 제 손에 들려 있음을 인지하고 멈추어 섰다.
“세빈이 큐브 말이야……. 내가 가져가도 될까?”
“그래.”
선아는 두 손으로 큐브를 감싸 안았다.
커스터마이징을 통해서라도 다시 아이의 얼굴을 볼 수 있게 되었고, 세빈이의 유품도 얻었다.
이 세상에서는 얻을 수 없을 것들을 얻었음에도 그녀는 불안한 얼굴이었다.
이곳에서 눈을 뜬 이유가 세빈이 때문이 아니라 도진 때문이라면 재혁과 잠자리를 한다 해도 세빈이를 만나지 못하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자 난생처음으로 도진이 원망스러웠다.
“택시 잡아줄게.”
“아니, 괜찮아.”
선아는 도진에게서 도망치듯 집을 나왔다.
도진이 왜 이런 무자비한 일을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세빈이를 다시 볼 수 없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나았다.
자신을 여기로 데려올 게 아니라 세빈이 옆에서 안식에 이르도록 해야 했다.
선아는 배웅하는 도진을 돌아보지 않은 채 빠른 걸음으로 돌아섰다.
그녀의 뒤에서 도진은 선아를 향해 뻗어나가는 손을 다시 한번 말아쥐었다.
이번 삶에서도 역시 선아를 향해 손을 내밀지 못했다.
선아에게 회귀의 진실에 대해 털어놓으면서도 그녀에 대한 마음은 일절 내색하지 않았다.
도진의 사랑과 선아의 사랑이 같지 않기에 그는 선아에게 제 마음을 털어놓을 수 없었다.
류도진이 원하는 것은 윤선아였으나 선아가 원하는 것은 세빈이, 그녀의 아들이었다.
‘나 재혁 씨 아이 낳고 싶어.’
이번 삶에서 선아가 말했다.
그날은 재혁과의 결혼을 만류하기 위해 일을 핑계로 그녀의 집에 찾아간 날이었다.
재혁의 아이를 갖고 싶다면서 선아는 또 한마디를 덧붙였다.
‘나 그이 사랑해.’
전자는 진심이지만, 후자는 거짓임을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사랑을 말하는 선아의 눈빛엔 사랑이 담겨 있지 않았다.
사랑을 말하는 그녀의 눈빛이 어떤지, 어떤 빛을 담고 있는지 누구보다도 잘 아는 이가 도진이었다.
사랑에 빠진 선아의 모습을 두 번이나 지켜본 게 그였기에 재혁을 사랑한다는 말이 거짓임을 단번에 알아챘다.
그러나 재혁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이유가 세빈이 때문이기에…….
세빈이는 자신이 무얼 해도 선아에게 줄 수 없는 아이이기에…….
도진은 또다시 선아에게로 향하는 마음을 누를 수밖에 없었다.
너와 나는 이번 생에서조차도 닿지 못하는구나.
도진은 먹먹한 눈으로 선아가 올라탄 엘리베이터를 바라보았다.
고층에서부터 내려간 엘리베이터가 1층에 닿았다.
***
“선아야, 왔니? 오늘 회식은 어땠어? 팀원들 분위기 좋았지?”
늦은 시간의 귀가였지만 현숙은 자지 않고 선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네이비와의 협약에 대해 더 묻고 싶기도 했을 것이고, 결혼을 앞둔 선아와도 할 말이 있는 듯 보였다.
그러나 선아는 엄마와 이야기를 할 만한 정신이 아니었다.
“엄마 내가 술을 좀 많이 마셔서…….”
선아는 엄마에게 자신의 상태를 변명했다. 세빈이를 만나지 못할 거란 충격 때문에 선아의 얼굴은 희게 질려 있었다.
“네이비랑 일이 잘돼서 기분이 좋아도 그렇지, 결혼 앞둔 애가 그렇게 음주를 하면 어떡해. 결혼 앞두곤 일주일부터 마사지하면서 부기 관리한다던데, 너는 어떻게 된 게…….”
현숙의 잔소리가 따라올 것 같자 선아는 그녀의 말을 잘랐다.
“엄마, 나 피곤해.”
머릿속이 복잡해서 어떤 말도 들리지 않을 것 같았다.
말을 자르는 선아의 반응에 현숙은 서운하다는 듯한 얼굴을 했지만, 이내 표정을 바꾸고 2층으로 올라가라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그래, 알았어. 얼른 올라가서 쉬어. 내일 아침에 해장국 준비해놓을 테니까 이야긴 내일 아침에 하자.”
“응. 미안해, 엄마.”
“미안하긴 뭘.”
현숙은 2층으로 향해가는 딸의 등을 쓸었다.
딸이 곧 시집간단 생각 때문이었을까. 등을 어르는 현숙의 손길에는 진득한 아쉬움이 묻어 있었다.
엄마의 마음에 호응하지 못하는 게 미안하긴 했지만, 선아는 엄마와 이야기할 만한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자신 또한 엄마였었기에 자식과 관련된 일 앞에서는 평정심을 유지할 수 없었다.
방으로 올라온 선아는 곧장 욕실로 향했다.
늦겨울임에도 그녀는 찬물로 머리를 감고 샤워를 했다.
넋이 반쯤 나가 있었기에 그렇게 해서라도 정신을 차리고 싶었다.
무슨 정신으로 씻었는지도 모르게 씻고, 곧장 침대에 누웠다.
심신이 지친 까닭일까. 복잡한 머리와 달리 눈꺼풀은 무겁게 내려앉고 있었다.
잠을 자지 않고 생각을 정리하려고 했지만, 수마가 선아를 덮쳐왔다.
그녀는 속수무책으로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꿈을 꾸었다.
‘엄마.’
이번 꿈에서도 선아는 세빈이를 업고 걷고 있었다.
달맞이꽃이 가득 핀 능선을 넘어 또 다른 능선에 발을 디뎠을 때 발길을 비추던 샛별이 지고 하늘에 하얀 해가 떠올랐다.
밤에는 노란 달맞이꽃이 피었던 동산이 낮이 되면서 연분홍 낮달맞이꽃 동산으로 바뀌었다.
꽃이 흐드러지게 핀 동산을 선아는 세빈이를 업고 걷고 또 걸었다.
그사이 밤낮이 일곱 번이 바뀌었다.
물집이 잡혀 터지고 헤진 발에선 어느 순간부터 통각이 일지 않았다.
발이 마비된 것이 아니라, 애초에 이곳에선 통각 따위 존재하지 않았다.
‘엄마. 나 내려서 쉬고 싶어.’
지난 꿈과 달리 이번 꿈에서 선아는 세빈이를 업은 채 조바심하지 않았다.
발의 통증이 사라진 것처럼 조바심 또한 선아의 머리에서 사라졌다.
‘그럼 잠깐만 쉬었다 갈까?’
‘응!’
세빈이를 바닥에 내려주자 아이는 저 멀리 연분홍 꽃밭 사이로 달려갔다.
선아는 놀란 눈으로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세빈아. 너……?’
세빈이가 양팔을 휘저으면서 두 다리로 달리고 있었다.
세빈이의 모습에 놀란 선아와 달리, 아이는 원래부터 그랬다는 듯 자연스럽게 몸을 움직였다.
가벼운 몸짓으로 꽃밭 사이를 헤치고 들어갔다.
세빈이의 키만큼 크게 자란 꽃밭 사이로 아이의 모습이 사라졌다.
‘세빈아?’
선아는 낮 달맞이꽃 줄기를 양손으로 헤치며 꽃밭으로 들어갔다.
연분홍 꽃 무리 속, 세빈이는 줄기가 억센 낮달맞이꽃을 뚝 뚝 꺾고 있었다.
오른손으로 줄기를 잡고 왼손으로 뚝 뚝 꽃을 꺾는 모습을 선아는 말없이 지켜보았다.
낮달맞이꽃을 한 움큼 꺾은 세빈이는 동산 한가운데 주저앉아 꽃줄기를 땋기 시작했다.
오른손과 왼손을 자유자재로 쓰는 세빈이의 손 안에서 낮달맞이꽃은 연분홍 화관으로 변해갔다.
‘세빈아. 너 손이랑 다리가…….’
꽃 사이를 헤치고 세빈이 바로 앞까지 간 선아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아이의 오른손과 오른 다리를 연신 매만졌다.
‘다리 불편하지 않아? 오른손이 움직여?’
아이를 만지는 선아의 손끝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이 화관 정말로 네가 만든 거야?’
눈으로 보고 있음에도 믿기지 않는 모습이었다.
살아생전 엄마의 말이라면 잔소리 하나도 허투루 듣지 않았던 세빈이는 선아의 질문이 나올 때마다 고개를 위아래로 크게 흔들었다.
‘너 정말……. 정말 괜찮은 거야? 우리 세빈이 정말 몸이 괜찮아진 거야?’
‘응. 정말로 괜찮아.’
세빈이는 고사리손으로 선아의 양손을 붙잡았다. 그러곤 엄마에게 확신을 심어주는 양 선아의 눈을 마주 보았다.
‘엄마.’
저를 닮아 옅은 빛깔의 눈. 세빈이의 눈 속에 선아가 담기고 연분홍 꽃밭이 담겼다.
아이의 눈 속에 아름다운 세상이 있었다.
‘엄마. 여기는 몸이 불편한 사람도 하나 없고, 마음이 불행한 사람도 하나도 없어. 여기선 원래 다 이렇게 편안하고 행복한 거야.’
‘그렇지만……. 우리 세빈이 엄마랑 헤어지기 전에 사고를 당해서 많이 아파하다가…….’
‘여기선 엄마, 걷지 못하는 사람도 달리고, 말 못 하는 사람도 말하고, 듣지 못하는 사람들도 들어. 여기선 다들 그래.’
아이는 원래부터 이곳 사람인 양 말하고 있었다.
세빈이는 선아의 손을 놓고, 까치발을 했다. 오른손에 들고 있던 화관을 엄마의 머리를 향해 들어 올렸다.
아이가 몸을 낮추어 달라 말한 것도 아닌데 선아는 아이의 움직임에 맞추어 고개를 숙였다.
엄마란 그랬다.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아이의 행동, 아이의 눈빛 하나만으로도 아이가 무얼 하려는지 알아채는 게 엄마였다.
세빈이가 선아의 머리에 연분홍 꽃 화관을 씌웠다.
간지러운 아이의 웃음이 선아의 정수리에 닿았다.
‘엄마 예쁘다.’
‘정말?’
그제야 허리를 편 선아는 제 머리 위의 화관을 손으로 매만졌다.
‘응. 최고야. 엄마가 최고로 예뻐.’
선아는 화관을 쓴 채 세빈이를 향해 활짝 웃어 보였다. 그러자 아이의 입매도 선아를 따라 둥글게 휘었다.
모자는 꽃밭 한가운데 선 채 서로를 향해 닮은 미소를 지었다.
‘엄마.’
‘응, 아가.’
일곱 살이 되도록 선아는 세빈이에게 아가라는 애칭을 썼다. 한결같이 사랑스럽고, 한결같이 예뻐서 아가라는 그 애칭 외엔 다른 애칭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세빈이의 엄마로 산 7년 가까운 세월. 고된 적은 있지만, 마음이 빈한 적은 없었다.
마음은 늘 충만했고, 사랑이 넘치는 세월이었다.
선아를 바라보고 있던 세빈이가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세상에서 제일 좋은 우리 엄마. 엄마는 더 살아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