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의외의 취향
“그깟 결혼이 뭐가 대수라고. 엎어놓고 흠씬 패주지 그랬어. 술 취해서 주정 부리는 인간은 맞아도 싸.”
선아의 말은 진심이었다. 조각처럼 매끈한 얼굴에 저 때문에 상처가 난 것만 같아서 마음이 아렸다.
도진의 입술을 소독솜으로 닦은 선아는 그의 입술에 연고를 얇게 펴 발랐다.
이렇게 잘생긴 얼굴에 상처를 냈을 뿐만 아니라 모욕적인 언사를 한 재혁에 대한 분노가 멈추어지지 않았다.
세빈이만 아니었다면 이 결혼은 다시 하지 않을 결혼이었다.
그러나 인생 전체를 다 바꾸어도 다시 만나고 싶은 게 세빈이기 때문에 선아는 재혁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랬기에 도진에게 더 미안했다.
지난 삶에서 최악을 본 남자라 머릿속으로는 수십 번도 더 버린 남자였지만, 세빈이를 만나야 한다는 욕심 때문에 결혼까지 인연이 이어지고 있었다.
결국 재혁을 버리지 못하는 자신 때문에 도진까지도 피해를 보고 말았다.
“미안해, 선배.”
“네가 왜 미안해?”
“재혁 씨가 저러는 걸 못 말려서.”
“술 먹으면 부모도 못 알아보는 사람들 있다잖아.”
술을 먹어서가 아니라 그는 원래도 은혜 따위는 모르는 인간이었다. 지난 삶에서 성공한 재혁은 부모를 저버렸다.
물론 모든 부모가 다 자식에게 효도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자식에게 잘못한 부모라면 벌을 받아도 싸단 생각을 하는 선아였지만, 선아가 보기에 재혁의 부모는 그리 못된 부모가 아니었다.
재혁의 부모에게 잘못이 있더라면 가난 정도일까. 그러나 가난은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것이었다.
도리어 그의 부모는 가난한 와중에도 재혁에게 돈을 벌어오라 채근하지 않았고, 학비를 못 대주었어도 그를 대학에 가게 한 사람들이었다.
이전 삶에서 재혁은 부자가 되었지만, 자신의 부모를 저버렸고, 부모를 챙기는 일까지 선아에게 떠넘겼다.
재혁은 술 때문에 이성을 잃고 잘못한 게 아니라 그 인간은 애초부터 잘못된 인간이었다.
“네 말대로 아까 두드려 패서라도 다시는 술을 입에 못 대게 만들어버렸어야 했나?”
선아가 도진을 바라보았다.
“선배가?”
“응. 안 써서 그렇지, 꽤 단단해 보이지 않아?”
그녀의 어두운 얼굴 때문이었을까. 도진은 선아의 앞에 꽉 쥔 주먹을 내보였다.
도진은 평소에 농담 같은 걸 하는 이가 아니었다. 그런 이가 아이처럼 주먹을 꽉 쥔 채 내보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선아가 픽 웃어버리고 말았다.
“저렇게 보여도 재혁 씨 고등학교 때 좀 놀았대. 선배는 의대 간다고 공부만 했잖아. 공부만 한 선배가 동네에서 놀던 사람한테 되겠어?”
“키도 내가 훨씬 더 큰데?”
“키만 큰가. 능력도 선배가 더 좋고, 인성도 선배가 훨씬 좋지. 근데 주먹으로 치고받는 건 재혁 씨한테 안 될 거 같아.”
“결혼할 사람이라고 편드는 거야?”
“아니. 그냥 선배가 안 그랬으면 좋겠어서 하는 말이야.”
“이재혁이 다칠까 봐?”
선아가 고갤 저었다.
“아니, 선배가 다칠까 봐…….”
“…….”
선아는 고개를 숙인 채 오른손으로 왼손의 손끝을 뜯었다.
회귀한 후 자주 뜯은 손끝이 새빨갛게 부르터 있었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불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선배가 그런 사람이랑 똑같아 보일까 봐. 그래서 안 돼……. 그래서 싫어….”
“…….”
도진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어색함을 느낀 선아는 열어놓은 연고 뚜껑을 돌려서 닫고, 남은 소독약과 함께 약국 봉투에 넣었다.
“내일까진 연고 챙겨 바르란 말 들었지? 입가니까 음식물 묻을 수도 있으니까 연고 바르기 전에 꼭 소독하고.”
선아의 염려 어린 말을 도진이 잘랐다.
“선아야.”
“응.”
“싫으면 이제라도 결혼-”
“선배.”
도진이 할 말이 무언지를 알기에 이번에는 선아가 그의 말을 끊었다.
실은 자신이야말로 이 결혼을 무르고 싶었다. 회귀한 후 몇 번이고 무르고 싶었던 결혼이었다.
어디 결혼뿐인가. 방범용이라는 명목으로 설치한 CCTV를 통해 재혁이 희진과 무슨 짓거릴 하는지 보아 알고 있었다.
솔직히 선아의 비위로는 동시기에 여러 사람과 관계를 갖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니, 이해가 안 되는 정도가 아니라 욕지기가 치밀었다.
“부르고 왜 말이 없어?”
“그 있잖아…….”
“뭐?”
“선배가 만들고 있는 커스터마이징 프로그램 말이야. 그때 우리끼리 그 프로그램에 대해 말했었잖아. 실종아동의 얼굴을 커스터마이징할 때 부모의 사진이 있으면 노화까지 예측해서 더 큰 모습을 만들어 볼 수도 있을 거라고.”
“그랬지.”
“그게 지금도 가능한 거야? 프로그램으로 구현이 됐어?”
도진은 잠시 동안 생각에 잠긴 듯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이내 고갤 끄덕였다.
“아직 연구단계라 아동의 사진에 노화를 예측해 만드는 건 불가능하고 아마도 특정 대상, 그러니까 부모의 사진이 있다면 조합해볼 순 있을 거야.”
도진의 말에 선아의 눈빛에 희망이 어렸다.
지금의 도진에게는 이상해 보일지 모르는 말이지만, 선아는 용기를 내 다음 말을 뱉었다.
“그러면 그때 내가 커스터마이징한 아이 사진에 내 얼굴을 대입해서……. 그 아이가 조금 더 성장한 모습을 만들어 볼 수 있을까……?”
선아는 늘 궁금했었다. 죽지 않고 살았더라면 지금쯤 세빈이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이곳에서 눈을 뜬 지도 어언 2개월 남짓이 흘렀다. 이전의 세상에서 세빈이가 살아 있었더라면 지금쯤 아이는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설레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 것이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세빈이의 모습은 어떨까.
여덟 살이 아니라 열 살이 된 세빈이의 모습은?
사춘기에 든 세빈이는 어떨까. 스무 살이 되고, 서른 살이 되고 어른이 된 세빈이는 어떤 모습일까.
흐릿해서 떠오르지 않는, 혹은 보지 않았기에 알 수 없는 아이의 미래를 상상하면서, 부모는 먼저 떠나보낸 자식이 살지 못한 삶을 대신 산다.
네가 살아 있었더라면 나보다 네가 더 행복한 삶을 살았겠지.
네가 나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았겠지.
그 상상이 아이를 잃은 부모를 지탱하는 힘이다.
세빈이를 다시 만나기 위해 여기까지 왔지만, 선아는 재혁의 망나니 짓거릴 볼 때마다 힘이 빠졌다.
이렇게 해야지만 세빈이를 다시 볼 수 있는데도, 또다시 재혁과 살을 섞어야 한다는 사실이 고통스러웠다.
특히나 오늘은 더했다.
그랬기에 기술의 힘을 빌려서라도 세빈이를 또 보고 싶었다.
세빈이를 본다면 그 고통을 감내할 힘이 다시 솟아날 테니까.
“아이 얼굴에 네 얼굴을 조합하는 거야 어렵지 않지.”
도진의 말에 선아의 눈이 희망으로 반짝였다.
“정말? 어렵지 않은 일이야?”
“응. 어렵지 않아.”
확답을 들은 선아는 도진의 손에 들려주었던 약국 봉지를 빼앗아 들었다.
“선배, 일어나자.”
그녀는 도진의 앞에 서서 주차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공원을 올 때와 달리 발걸음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얼른 가자. 얼른.”
재차 채근하며 걷는 선아를 보면서 도진은 안도한 듯 미소 지었다.
“잠깐만 선아야.”
도진은 선아를 붙잡아 세웠다. 선아가 멈추지 않자 보폭을 빨리해 그녀 앞으로 가 길을 막았다.
“응?”
선아가 의아한 듯한 얼굴로 멈추어 서자 그는 선아의 발치를 내려다보았다.
“운동화 끈 풀렸잖아. 그러다 넘어질라.”
“아…….”
발바닥에 유리가 박혔던 일이 있은 뒤로 구두 대신 운동화를 신고 다니고 있었다.
발을 내려다보자 그의 말대로 한쪽 운동화의 끈이 풀려 있었다.
“언제 이런 걸 다 봤대.”
선아가 자리에 앉아 운동화 끈을 묶으려 하자, 도진이 그녀보다 더 빨리 움직였다.
선아의 발치에 무릎 꿇어앉은 도진은 운동화 끈을 단단하게 여며주었다.
리본을 묶은 뒤, 풀리지 않도록 리본끼리 한 번 더 단단하게 묶는 방식이 신기했던 선아는 도진이 끈을 묶는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한 번도 이런 식으로 운동화 끈을 맨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이상하리만큼 도진의 방식이 익숙했다.
도진은 리본의 양옆을 잡아당겨 단단하게 묶은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선배 끈 묶는 방식 특이하다. 원래 이렇게 묶었어?”
“아니.”
“그런 거치고는 익숙하게 묶던데.”
“풀리지 말라고 꽉 묶은 거야.”
“아, 그래?”
도진은 선아의 손에 들린 약국 봉투를 앗아가서 든 후 선아를 앞질러 걸었다.
이전 삶에서도 이번 삶에서도 도진과는 단둘만의 접점이 거의 없었다.
이전 삶에서는 세빈이가 태어난 이후에나 도진과 왕래를 하기 시작했고 이번 삶에선 함께 일한 것 빼곤 감정 교류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운동화 끈을 묶어주고 제 손에서 봉투를 앗아가는 그 느낌이 너무도 익숙했다.
선아는 그의 뒤를 따라가면서 언젠가 그런 일이 있겠거니 생각했다.
남들과 달리 두 번을 살았으니 기억 못 하는 일 하나쯤은 있는 게 당연하겠지. 그렇게 생각할 따름이었다.
***
집에 도착하자마자 주방으로 간 도진은 뜨거운 코코아를 타서 선아에게 내밀었다.
“일단 마시고 있어.”
커다란 사이즈의 머그잔 안엔 진하게 탄 코코아가 가득했다.
코코아 위에 뜬 별 모양 마시멜로를 본 선아는 픽 웃고 말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도진과 코코아, 마시멜로 같은 게 어울리지 않아서였다.
커피를 마셔도 쓰디쓴 에스프레소만 마실 법한 사람이 이런 사랑스러운 코코아라니…….
“선배, 코코아가 취향일 줄 몰랐네.”
“구비만 해둔 거지, 마신 적은 없어.”
“그런 것치곤 엄청 잘 탔는데 뭘.”
정말로 도진이 타준 코코아는 말도 못 할 정도로 맛있었고, 술 때문에 아리던 속이 단번에 진정되었다.
선아는 코코아를 호호 불어 마시면서 도진을 지켜보았다.
컴퓨터를 켠 그는 커스터마이징 프로그램을 실행하고, 일전에 선아가 만든 세빈이의 커스터마이징 정보를 불러왔다.
프린트물로 매일 보는 아이의 모습인데도 커다란 모니터에 쓴 세빈이의 모습은 더욱 생동감 있었다.
“네 사진 있으면 줘.”
“응. 잠시만.”
“셀피 모드로 찍은 사진보다는 얼굴이 정직하게 나온 사진이 좋아.”
선아는 핸드폰을 켜고 얼굴이 제대로 나온 사진을 고르려 했지만, 최근 사진 중에서 적당한 사진이 없었다.
“선배, 지금 바로 하나 찍어서 줄게. 잠시만 기다려봐.”
그녀는 이마가 드러나도록 머리카락을 이마 뒤로 넘긴 채 핸드폰을 들었다.
그러자 자리에서 일어선 도진이 선아의 핸드폰을 향해 손을 뻗어왔다.
“내가 찍어줄게. 아무래도 남이 찍어주는 사진이 왜곡이 덜하니까.”
“응. 부탁할게.”
선아는 서재 한쪽에 앉은 채 증명사진을 찍듯이 어깨를 판판히 폈다. 턱을 목 가까이 끌어당기면서 카메라를 응시했다.
“찍을게.”
도진이 셔터를 누르는 그 순간, 선아의 시선이 도진 뒤의 선반으로 향했다.
“어?”
벽 선반에는 도진의 집, 아니 이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되는 물건이 있었다.
“저게 왜 여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