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시커먼 속내
“결혼 앞둔 여자가 이래도 되는 거야?”
내로남불도 이런 내로남불이 다 있을까.
결혼을 앞둔 여자가 도진에게 마음이라도 있느냔 그 말에 선아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재혁 씨, 뭔가 오해하나 본데-”
선아가 자신의 행동을 설명하려고 했지만, 이미 만취해 있는 재혁이 그 말을 알아들을 리 없었다.
“오해? 오해라고?”
도리어 재혁은 더 크게 목소릴 키웠다.
“화장실 간다고 거짓말하고 나와서 류도진한테 가는 걸 내가 눈을 똑똑히 뜨고 지켜봤거든. 너 지금 저 새끼한테 가려고 하는 거잖아.”
외도한 걸로만 따지면 재혁은 지난 삶까지 다해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선아를 기만했다.
그뿐 아니었다. 이번 삶에서 또한 결혼을 앞두고도 희진과 성관계하는 걸 몇 번이나 목격했다.
그런데도 재혁은 자신의 죄는 모르는 채 남의 티끌만을 타박하고 있었다.
급기야 재혁은 선아의 손을 세게 쥔 채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겼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이 손 안 놔?”
선아는 재혁 쪽으로 끌려가지 않으려고 버텼다.
“아프단 말이야. 좀 놓아.”
“못 놔.”
급기야 재혁은 선아를 저항하지 못하게 손목을 비틀며 끌어당겼다. 손목을 따라 선아의 몸이 기울었다.
“어어엇!”
급작스럽게 재혁에게 끌어당겨지면서 보도블록 틈에 발이 걸린 선아가 휘청휘청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이었다. 누군가 등 뒤에서 선아의 허리를 단단히 휘감았다.
익숙한 머스크 계열의 향이 코끝에 스쳤다. 뒤를 돌아보지 않았지만, 선아는 자신을 잡아준 게 도진임을 알 수 있었다.
“하, 이 씹새끼가.”
선아의 어깨너머에 시선을 둔 재혁이 욕설을 지껄였다.
“너 이 씨발 새끼야. 그 손 안 놔?”
앞에선 재혁이 선아의 손을 잡고 있었고, 뒤에선 도진이 선아의 허리에 팔을 감고 있었다.
넘어질 뻔한 선아를 구하려다가 일어난 일이지만 그 모습을 본 재혁의 눈에서 불이라도 튈 듯했다.
“내 여자한테서 손 떼라니까?”
“그쪽이나 놓지? 선아가 불편해하는 거 같은데?”
“불편? 부우울편? 하, 이 씹새끼가.”
만취한 재혁은 할 말 못 할 말 가리지 못한 채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였다.
“일이다 뭐다 해서 계속 선아 빼돌려서 밖으로 돌리더니, 그사이에 정분이라도 났냐? 씹질 이라도 했어? 어?”
‘씨발, 씹질’같이 쌍시옷이 난무한 단어들 앞에서 선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재혁 씨! 대체 왜 이러는 건데?”
선아는 진절머리 난다는 얼굴로 재혁의 손을 떨쳐냈다.
“하, 너 지금 내 손 놨냐?”
그러자 재혁은 더 고래고래 소릴 지르며 날뛰기 시작했다.
“와 씨발. 이것들이 보자 보자 하니까! 그러잖아도 저 새끼가 너 쳐다보는 눈이 이상했어. 세상일에 무심한 것처럼 굴면서도 너만 보면 눈빛이 음흉해진다고!”
재혁의 언사는 점입가경이었다. 가만있는 도진을 속이 시커먼 사람으로 매도해가면서까지 울분을 감추지 못했다.
지나가던 행인들의 시선이 세 사람에게로 모였다.
“윤선아, 이 맹추야. 정신 차려! 저런 속 모르는 새끼랑 엮이면 너만 피곤해진다고!”
선아가 질린다는 듯한 얼굴로 소리쳤다.
“재혁 씨, 그 입 안 닫아?”
“너 지금 류도진 편드는 거야? 너 이 씨발. 남편 될 사람이 아니라 류도진 편드는 거냐고!”
선아도 지지 않고 소리쳤다.
“편드는 게 아니라 재혁 씨 혼자 난리잖아! 대체 도진 선배가 뭘 어쨌길래 이러는 건데?”
“이게 확, 씨!”
재혁이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도진이 선아를 자신의 뒤로 감추며 앞으로 나왔다.
“윤선아 너 이리 안 와? 류도진 비켜! 니가 쟤 서방이라도 돼? 니가 쟤 기둥서방이냐고!”
재혁이 선아를 붙잡기 위해 손을 뻗자 도진이 그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자 재혁은 도진에게 붙잡히지 않은 다른 손으로 도진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퍽, 소리와 함께 도진의 얼굴이 한쪽으로 돌아갔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재혁 씨!”
선아의 비명에도 재혁은 분이 풀리지 않는다는 듯 또다시 주먹을 들어 올렸다.
선아는 하얗다 못해 파랗게 질린 얼굴로 도진과 재혁의 사이로 끼어들었다.
“재혁 씨, 그만 못 해?”
그녀는 도진의 앞을 막아선 채로 재혁을 향해 소리 질렀다.
“이게 끝까지 류도진 편을 들어? 저 새끼가 널 어떤 눈으로 바라보는지 모르지? 저 새끼가 왜 너한테만 그렇게 일을 주는지 알아? 그거 다 너한테 흑심이 있어서야, 이 맹추야!”
뭐 눈엔 뭐만 보인다지만 재혁은 도가 지나쳤다.
“류도진! 너 씨발, 선아가 나랑 결혼한다니까 몸이 달아?”
재혁은 해도 해도 너무했다 싶을 정도로 이성을 잃은 채 날뛰고 있었다.
“그러니까 업무니 뭐니 하면서 선아 빼돌려서 헛짓거리하려는 거잖아! 이 씨발 새끼. 내가 네 까만 속을 모를 줄 알고?”
그 말에 도진이 코웃음 쳤다.
“저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뭐 이 씹새끼야? 저 같은 소리? 이 씨발 놈이 너 말 다 했어?”
약이 바짝 오른 재혁이 도진에게 달려들려고 하는 그 순간이었다. 소란스러운 소리를 들은 팀원들이 바깥으로 나오고 있었다.
때마침 재혁이 도진의 멱살을 잡으려 하고 있을 때였다.
“이재혁 씨!”
그 모습을 본 박성우 차장이 소리쳤다.
“저게 뭐 하는 짓이야! 이재혁 씨 잡아!”
최대희 과장이 달려들어 재혁의 양어깨를 뒤에서 붙잡았다.
“놔, 씨발, 이거 안 놔? 저 씨발 새끼. 남의 여자한테 침 흘리는 저 새끼, 오늘 내가 개박살 낸다! 씨발! 놓으라고오!”
말리면 더 성을 낸다고 재혁은 분이 풀리지 않는다는 듯 어깨를 붙잡힌 채 도진을 향해 헛발질을 했다.
기럭지가 짧아 도진에게까지 발이 닿진 않았지만, 위협적으로 보이는 발길질이었다.
도진은 선아를 붙잡아 재혁의 손이 닿지 않는 곳까지 멀찍이 떨어졌다.
“저거 봐! 남의 여자 손목을 아무렇게나 잡잖아! 이 씹새끼야! 너 그 손 안 놔?”
재혁은 이미 술에 이성을 잡아먹힌 상태였다.
“아이고, 이재혁 씨 술 먹으면 개네, 멍멍 개가 따로 없어.”
박 차장이 연신 발길질 중인 재혁의 다릴 붙잡았다. 박 차장 또한 어린 나이에 승승장구하는 도진이 아니꼽긴 했어도 회사 안에는 위계질서라는 게 있었다.
이 팀의 장이 도진인 이상 이런 하극상은 용납되지 않았다.
“이재혁 씨 취해서 꼬장 부리면 안 되지.”
눈에 뵈는 게 없는 재혁은 박 차장에게까지 고래고래 소리쳤다.
“꼬장? 꼬장을 누가 부렸는데? 류도진 저 새끼가 씨발, 내 여자한테 찝쩍거렸다고!”
“팀장님이 찝쩍거리긴 언제 찝쩍거려. 일하느라 붙어 있었던 거잖아.”
“팀원들이 이렇게 많은데 말단 사원한테 일을 몰아주는 게 말이 돼? 그게 다 시커먼 속내가 있단 뜻이잖아!”
“시커먼 속은 무슨 시커먼 속이야. 일을 못 하면 몰라도 선아 씨가 나서서 네이비랑 업무협약도 잘 진행했고, 아이고, 이재혁 씨 술 취하면 안 되겠구나. 술 취하니까 사람이 아니네, 사람이……. 최 과장 좀 꽉 좀 잡아.”
그사이 소란을 들은 식당 종업원들까지 나와 소란을 구경하고 있었다.
재혁을 타이르던 박성우 차장은 머리를 짚었다. 일단은 소란부터 정리해야 할 듯했다.
박 차장은 선아에게 사장으로부터 받은 카드를 꺼내 쥐여주었다.
“선아 씨. 재혁 씨는 우리가 들여보낼 테니까 계산 좀 부탁해.”
“네. 알겠습니다.”
선아가 계산하러 들어간 사이에도 재혁의 고함은 계속됐다.
선아는 너무 창피해서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고, 저 때문에 망신을 당한 도진에게 미안했다.
재혁이 도진에게 또 대들지 모른단 생각에 허둥지둥 계산을 마치고 나왔다.
밖에 나오니 박 차장과 최 과장이 재혁을 붙잡아 택시에 밀어 넣고 있었다.
택시 안에서도 고함을 치는 재혁의 모습에 홀로 보낼 수 없다고 판단한 두 사람은 도진에게 묵례로 인사한 후, 함께 택시에 올라탔다.
그렇게 그들이 탄 택시가 멀어졌다.
“선아 씨 계산 다 했어?”
“네…….”
남은 사람은 신유미 대리와 도진, 선아뿐이었다. 어쩐지 선아를 보는 신유미 대리의 눈빛이 애잔해져 있었다.
술버릇을 알고 결혼하는 거냔 듯한 눈빛 앞에서 선아는 입술만 달싹거렸다.
어디 술버릇뿐일까. 더한 버릇도 알고 하는 결혼이었다.
때마침 식당 앞으로 택시 한 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손을 들어 택시를 잡은 도진이 신유미 대리를 손짓해 불렀다.
“신유미 대리.”
“아, 네.”
“회식 참석한다고 고생했어요.”
“아닙니다. 팀장님. 회식이 이렇게 끝나서 어떡하죠?”
“그 점은 걱정 말고요.”
“그나저나 이재혁 씨가…….”
“술 깨면 정신 차리겠죠,”
평소와 다름없이 말하는 재혁을 보면서 그의 팬을 자처하기 시작한 신유미 대리는 안심한 듯한 얼굴을 했다.
“그럼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신유미 대리가 택시에 올라탔다. 도진이 택시 문을 닫자 신유미 대리가 창문을 내렸다.
“아 참, 선아 씨.”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선아가 택시 앞까지 달려갔다.
신유미 대리가 선아에게 눈짓을 보냈다. 도진의 얼굴을 보란 눈짓이었다.
그제야 도진의 얼굴을 제대로 바라본 선아는 탄식을 터트렸다.
“아…….”
도진의 입가가 터져 있었다.
“그럼 먼저 갈게.”
“네. 대리님 들어가세요.”
택시가 저 멀리 떠나간 후, 선아는 면목 없다는 눈으로 도진을 바라보았다.
“괜찮아, 선배?”
“응. 괜찮아.”
“괜찮긴 뭐가 괜찮아.”
도진의 입술을 향해 손을 뻗으려던 선아는 흠칫 놀라며 손을 거두어들였다.
재혁이 난리를 피우고 떠난 터라 도진을 대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신경 쓰였다.
맹세코 도진과는 일 외에 무엇도 한 적이 없지만, 혹여나 재혁의 말 때문에 사람들이 도진과의 사이를 오해하면 어떡할까 걱정이 되기 시작한 것이다.
자신이 오해를 받는 건 상관없지만, 저 때문에 도진까지도 이상한 사람으로 오인당하는 것은 안 될 일이었다.
특히나 다른 이가 아닌 재혁에게 도진이 모욕을 받는 게 싫었다.
도진은 그런 개차반에게 모욕당할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술에 취한 채 손발을 휘두르며 도진을 위협하던 재혁의 모습이 떠오르자 그런 사람이랑 결혼하고 잠자리까지 해야 한다는 사실이 살 떨릴 만큼 싫었다.
아니, 싫은 걸 넘어 절망스럽기도 했다.
“선배 일단 약국부터 가자.”
“이 정도 터진 건 괜찮아.”
“아니야. 약 발라야 금방 나아.”
괜찮다는 도진을 억지로 잡아끌고 거리를 걸었다.
다행히도 멀지 않은 곳에 늦게까지 영업하는 약국이 있었다. 그 안으로 들어간 선아는 약을 소독약과 연고를 샀다.
“이리 와 선배, 잠깐 앉아서 약 바르고 가자.”
선아는 도진을 끌고 약국 앞 작은 공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선아는 벤치에 약국 봉투를 놓고 그 안에서 소독용 솜을 꺼내 도진의 입가를 닦았다.
소독솜이 입술에 닿자 도진은 쓰라린 듯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게 왜 맞고만 있었어. 선배도 같이 주먹을 날렸어야지.”
속상해서 한 말이었다. 그 말에 도진이 키득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결혼을 앞둔 사람 얼굴에 흠집을 낼 순 없잖아.”
“흠집 낼 자신은 있었고?”
“당연하지. 묵사발로도 만들 수 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