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내로남불
입술을 짓씹은 재혁은 누가 볼세라 메시지창을 끄고 핸드폰을 서류 가방 깊숙이 집어넣었다.
희진의 메시지를 받은 후, 초조하게 앉아 있던 재혁의 얼굴이 무참하게 일그러졌다.
임신이라니.
지금껏 희진과의 관계에서 피임을 하지 않았지만, 5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희진은 한 번도 임신하지 않았다.
그랬기에 안전한 날이라는 희진의 말만 믿고 성관계를 한 것인데…….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그 순간 희진에 대한 불신이 생겨났다.
사실 재혁은 선아를 만난 뒤에 희진을 정리하려고 했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오히려 희진은 선아에게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폭로하겠다고 협박을 해왔었다.
그런 희진을 상대로 가난하게 살고 싶냐고 화를 냈다가, 사랑하는 건 너뿐이라고 설득하길 여러 차례, 마침내 희진이 재혁과 선아의 관계를 수긍했다.
물론 선아와 조금만 살고 위자료를 받아 이혼하겠단 조건이 붙었다. 가난하게 살고 싶지 않다는 절규가 통한 것이었다.
그렇게 희진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지만, 재혁은 애초에 희진을 만나지 말았어야 했단 후회를 하곤 했었다.
같은 동네에 살았던 터라 희진네 집 사정을 누구보다도 재혁이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있으나 벌이를 하지 않아 엄마 홀로 생계를 책임지는 자신의 집이나 엄마 없이 홀로 아빠가 생계를 책임지는 희진네나 사정이 비슷했다.
아니, 오히려 억척스러운 엄마가 있는 재혁네가 좀 더 여유가 있는 편이었다.
그랬기에 희진은 재혁에게 결혼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가난이 지긋지긋하단 것은 진심이었다. 한 번 사는 인생 폼 나게 살고 싶었던 재혁은 자신보다 사정이 나은 여자와 만나서 최소한 중산층의 삶을 살고 싶었다.
옆집과 담벼락이 붙은 집이 아니라 아파트에서 살고 싶었고, 차도 갖고 싶었다. 일주일에 한 번쯤은 외식도 하는 안락한 삶을 살고 싶었다.
그런 생각이 커질 와중에 만난 선아는 재혁의 인생에 동아줄 같은 여자였다.
잘사는 집 여자들은 닳고 닳았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선아는 남자에 있어서는 순진무구했다.
아빠가 없기에 남자에 대한 로망이 클 것이라고 생각해 선아를 가족처럼 챙기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선아의 마음을 얻었다.
결혼을 약속하면서도 희진을 끊어내지 못한 건 희진이 다루기 쉬운 여자인 것도 있었지만, 선아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었다.
선아와 함께하면 할수록 그녀가 쉽다는 생각보다는 자신과 다른 세상에서 자랐다는 생각이 공고해졌다.
반면에 저와 같은 개천에서 자란 희진은, 부자 새엄마가 생긴 뒤로 눈에 띄게 처지가 바뀌었다.
재혁에게 있어서 희진은 아무 때나 쉽고 편하게 들 수 있는 보험 같은 존재였다.
선아와 사귀었다고 하나 희진과는 오래 인연을 이어왔기에 선아가 자신을 차버린다고 하더라도 희진과 이어지는 데는 어렵지 않을 듯했다.
더군다나 희진의 부자 새엄마는 희진에게 필요한 거라면 무엇이든 들어주었다.
오히려 어떨 때 보면 현숙은 친딸인 선아보다도 희진에게 더 돈을 헤프게 쓰는 듯한 생각이 들 정도로 희진의 주머니 사정이 넉넉해졌다.
돈 한 푼 벌지 않는 희진이 서울 시내 호텔 비용을 척척 내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돈을 버는 자신도 서울 시내 호텔비는 부담이 되는데, 희진은 정말이지 부잣집 딸처럼 돈을 써댔다.
그런 희진이 자신의 뒤통수를 칠 줄이야…….
재혁의 머릿속에는 희진에게 받은 문자가 끊임없이 떠올랐다.
문자로 수신돼 온 사진 속 임신 테스트기는 선명한 두 줄이었다.
이제 와 선아와의 결혼을 막기 위해 수작을 부리는 게 아닐까.
[우리 어떡해?]
술잔을 움켜쥔 재혁의 손이 분노로 부들부들 떨렸다.
‘우리 어떡해’라니…….
재혁이 생각하기엔 우리가 아니라 몸을 함부로 굴린 희진이 홀로 고민해야 할 내용이었다.
결혼을 앞둔 사람에게 임신 통보라니, 이 얼마나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일이란 말인가.
재혁은 술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쓰디쓴 술이 목구멍으로 넘어가고 나니 그나마 속이 진정되는 거 같았다.
“이재혁 씨, 술 너무 많이 마시는 거 아니야?”
“그러게. 오늘 계속 자작하고 있네. 설마 우리가 결혼 축하도 잊고 네이비랑 MOU 이야기만 해서 삐진 거야?”
재혁의 속을 알 리 없는 박 차장과 최 과장이 놀리듯 말했다.
“자자, 그럼 우리 팀 공식 커플이나 다름없는 윤선아 씨와 이재혁 씨의 결혼 축하 건배도 한번 해보자고!”
“그래요. 신랑 신부 건배사도 한번 듣죠!”
박 차장이 사람들 앞으로 또 한 번 술잔을 돌렸다.
테이블 가운데서 지글지글 소고기가 익고 있었고, 테이블을 시계 방향으로 빙 돌아 술잔이 채워졌다.
“선아 씨, 재혁 씨, 결혼 축하해요.”
신유미 대리가 탄산수를 높이 들고 축하 인사를 건네왔다. 그 인사를 시작으로 팀원들의 덕담이 따라왔다.
“결혼해서 행복하게 잘 살아. 싸우지 말고.”
“애는 성별 가리지 말고 하나만 낳아서 잘 키워. 애가 둘이 되니까 힘들어 죽겠어.”
덕담인지 아닌지 헷갈리는 말도 있었다.
한마디씩 하는 사람들을 뱅 돌아 도진의 덕담 차례가 돌아왔다.
도진은 말없이 잔을 들었다. 건배하잔 뜻을 알아들은 선아와 신유미 대리가 도진의 잔 바로 앞으로 잔을 내밀었고, 팀원들이 합세해 잔을 부딪쳤다.
또다시 챙, 맑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머릿속이 복잡한데도 팀원들에게 맞추느라 억지로 웃었던 재혁은 잔에 있는 술을 그대로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캬, 새신랑 술 벌컥벌컥 잘 마시고 시원스러워서 좋네!”
한 잔이 두 잔이 되고, 석 잔이 되었다. 스트레스를 건전하게 푸는 방법을 모르는 재혁은 그렇게 술로 자신을 위로하면서 취해갔다.
흥청망청한 분위기 속, 팀원들도 취해갔다. 미래가 불투명하기만 했던 TF팀에 발령받았을 때, 승진은 저 멀리 달아났다고 했었는데, 미래전략팀이 계속해 성과를 올리자 모두의 마음이 하나로 모였다.
이제는 누구도 미래전략팀이 실패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기분 좋게 취한 사람들은 선아와 재혁을 상대로 짓궂은 장난을 쳐왔다.
“그동안 회사 안에서 사내 연애하기 힘들었을 텐데, 예비 부부 뽀뽀하는 거라도 한번 봅시다.”
거나하게 취한 박 차장이 말하자, 그만큼이나 얼굴이 붉어진 최 과장이 손뼉을 치며 환호했다.
“뽀뽀해. 뽀뽀해.”
“왜들 그러세요. 사장님이 사내 연애 되게 싫어하시잖아요. 엄연히 여기도 회식 자리고 업무의 연장선상인데.”
정신이 말짱한 신유미 대리가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에이, 저 그런 거 못 해요.”
선아도 손사래를 치며 테이블 뒤로 몸을 뺐다. 그 모습을 본 재혁은 오기가 솟았다.
이미 술에 취해 이성이 마비된 상황이었다. 그런 와중에 선아가 뽀뽀를 거부하니 약이 빠짝 올랐다.
이렇게라도 선아에게 도장을 찍어놔야 할 만큼 현재 재혁의 마음은 궁지에 몰려 있었다.
희진이 임신을 무기로 저를 압박해온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의 보는 눈 때문에 선아가 결혼을 강행하도록 무언가라도 해야만 했다.
재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무 취한 탓이었을까. 자리에서 일어선 재혁은 몸을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오오, 새신랑, 패기 좋게 일어났네!”
누군가가 환호하자 재혁은 몸을 휘청거리면서 선아에게 다가섰다.
“왜 이래, 재혁 씨. 나 이러는 거 별로 안 좋아해.”
선아가 고개를 저었지만, 재혁은 끝끝내 테이블을 돌아 선아의 앞에 가서 섰다.
“차장님이랑 과장님 취하셔서 그러시는 거야. 재혁 씨까지 이러지 마.”
그러자 박 차장과 최 과장이 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에이, 취하긴 누가 취해. 우리 말짱해.”
어딜 가나 술에 취해 진상을 부리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었다.
문제는 가뜩이나 인원도 적인 TF팀에는 그런 사람이 둘이나 된다는 것이었다.
“그럼 그럼. 축의금도 많이 내려고 준비 중인데, 신랑 신부 뽀뽀하는 건 한번 봐야지.”
박 차장과 최 과장의 말에 힘을 얻은 재혁은 기어이 제 입술을 선아의 얼굴 가까이 가져다 댔다.
“하지 마. 아무리 그래도 회사 동료들 앞이라는 거 명심해.”
선아가 낮은 목소리로 재혁에게 경고를 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우리 때문에 분위기 망치면 안 되잖아.”
재혁은 취기에 끅끅 딸꾹질하면서도 멈추지 않고 입술을 들이밀었다.
선아가 양손을 들어 그를 밀어내려던 순간이었다.
“장난 그만 칩시다.”
조용히 잔을 비우던 도진의 한마디에 그때까지도 뽀뽀하라고 외치던 최 과장이 입을 다물었다.
회식이 이루어지던 고깃집 룸 안 분위기가 순식간에 냉각되었다.
“에이, 그러게 이런 장난을 왜 해요. 요즘은 지인이 결혼해도 이런 거 안 한다고요.”
신유미 대리가 분위기를 환기하려고 나섰지만, 분위기는 나아지지 않았다.
급기야 도진은 담배를 챙겨 들고 룸을 나가버렸다.
도진보다 네 살이 많은 최대희 과장이 그가 나간 문을 보고 혀를 끌끌 찼다.
“칼 같은 건 알았지만 진짜 얄짤없네.”
최 과장이 도진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던 걸 기억한 선아는 입 안이 까끌까끌해져 사이다를 들이마셨다.
아무래도 밖으로 나간 도진이 신경 쓰였다.
정작 회사에 좋은 일은 그가 다하는데, 지나치게 젊다는 이유로 돌아서면 이렇게 눈총을 받았다.
어차피 시간이 흐르면 모두 그의 능력을 인정할 것이고, 이전 삶에서의 선아 또한 지금 도진의 입장 같은 건 전혀 신경 쓰지 않았는데도, 이제는 선아가 도진을 그냥 볼 수 없었다.
그에 대해 알고 나니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결국 선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선아는 회식이 이루어지고 있는 룸을 나와 건물 밖으로 나왔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보니 저 멀리 홀로 담배를 피우는 도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홀로 선 도진의 모습이 익숙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뿐만 아니라 대학생 시절에도 그는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밖으로 나가 담배 한 대를 태우곤 했다.
선아는 도진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 순간 누군가가 뒤에서 선아의 팔을 낚아챘다.
“너 화장실 간다면서 뭐야?”
술 취한 재혁이 선아의 뒤를 따라 나와 그녀를 붙잡은 것이다.
돌아서자마자 재혁에게서 술 냄새가 훅 풍겨왔다.
“뭐냐고 윤선아. 너 저 새끼한테 마음이라도 있어?”
선아가 인상을 찌푸렸다.
“재혁 씨,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무슨 소릴 하긴! 결혼 앞둔 여자가 이래도 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