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임신
네이비와의 미팅을 마치고 회사로 향하는 차 안에서도 선아의 감탄은 이어졌다.
“선배 정말 대박이야. 네이비와 MOU 체결하기로 한 걸 보고하면 어쩌면 서버실 구축도 더 큰 규모로 할 수 있을 거고.”
신호에 걸려 멈추어 설 때마다 도진은 선아의 얼굴을 보았다.
“그렇게 기뻐?”
“당연하지. 이만큼까지 할 수 있을 거라고 상상도 못 했단 말이야.”
신호가 바뀌고 차가 출발했다. 조수석에 앉은 선아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서류가 든 가방을 손으로 쓸었다.
그 안에 도진이 만들어준 세빈의 커스터마이징 사진이 있었다.
아이를 다시 만나는 날을 위해서 여기까지 왔지만, 지금 그녀의 삶은 그전보다도 더 많은 것을 이루어 가고 있었다.
세빈이를 키우던 전업주부이던 시절, 아이 앞에선 항상 밝은 모습을 보여주려고 노력했지만, 집에서 살림을 하는 일 특성상 외롭고 축 처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랬기에 이번 삶에서 세빈이를 다시 만나면 능력 있는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세빈아, 엄마 열심히 노력하고 있어.’
“근데 선배.”
그러고 보니 도진이 개발하고 있는 커스터마이징 프로그램은 어떻게 쓰일지 궁금해졌다.
“커스터마이징 프로그램은 어떻게 하기로 했어? 성수 선배네 회사에서 그 프로그램 도입하겠대?”
도진은 운전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아쉬운 기분이 들어 선아는 가방 손잡이를 꽉 쥐었다.
게임 커스터마이징 프로그램으로 쓰인다면 돈도 벌고 더없이 좋긴 하겠지만, 그 프로그램은 사람의 실물과 흡사할 정도로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프로그램이었다.
그런 대단한 프로그램으로 몽타주 같은 걸 만든다면 범인의 얼굴을 만들어내기도 훨씬 좋을 것이고 사회에 크나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구나…….”
아쉬움에 목소리가 작아졌다. 그러자 도진이 말을 보태왔다.
“커스터마이징 프로그램의 프로세스만 넘겨주기로 했고, 프로그램은 조금 더 보완해서 경찰청에 예정대로 기부할 생각이야.”
“정말?”
그 말에 선아의 목소리에 다시금 힘이 실렸다.
“응. 정말.”
그 모습에 도진은 웃음기를 실어 대답했다.
“근데 거기서 더 보완해야 할 것들이 있어?”
“사람이 어느 한 시간에만 머무르는 게 아니잖아.”
“그……렇지?”
선아는 머뭇거리며 도진의 말에 동의했다.
사람이 어느 한 시간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말은 나이 들고 늙는단 뜻일 텐데, 그 말이 꼭 자신의 현재 상황을 두고 한 말인 양 느껴졌다.
그렇다면 사람의 시간이 흐른다는 게 커스터마이징과 무슨 연관이 있는 걸까.
“누구에게나 시간이 흐르잖아.”
선아는 답을 기다리는 듯한 얼굴로 도진의 옆모습을 응시했다.
“미제 사건을 예로 들면 10년 전에 일어난 사건의 범인을 잡는다고 했을 때, 그 10년 사이 범인이 늙어서 얼굴이 달라졌을 테니까 몽타주에 세월의 흐름을 담을 수 있으면 좋겠다 싶더라고.”
“나이 든 얼굴을 유추해서 몽타주를 만든다는 거야? 근데……. 그거 좀 위험한 발상 아닐까? 그러다가 얼굴이 아예 달라지면 어떡해?”
아예 다른 얼굴로 몽타주를 만들어버린다면 만드느니만 못한 게 되어버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인종별로 노화하면서 나타나는 특징들이 달라. 발음에 따라서 입가 주름이 다르게 생기는 등, 그런 특징을 모아서 노화를 예측해 몽타주에 도입하는 거지.”
“아…….”
“만약에 범행 현장에서 있었던 DNA가 있다면 더 정확한 몽타주를 만들 수도 있어. DNA를 분석하면 어떤 식으로 노화하는지도 풀어볼 수 있거든.”
문득 선아는 한 가지가 궁금해졌다.
“선배. 몽타주가 범인을 잡을 때만 쓰이는 게 아니더라고. 저번에 실종아동찾기 전단을 보니까 12년 전에 헤어진 아이가 어떻게 자랐을지를 상상한 초상화를 첨부해서 아이를 찾는 걸 봤어. 혹시 이 프로그램을 그런 데도 쓸 수 있지 않을까?”
“응. 맞아. 만약 실종아동처럼 부모의 얼굴을 특징지을 수 있다면 세월이 흐른 모습을 더 정확하게 구현해 낼 수 있어.”
선아의 잇새로 짧은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도진 선배는 천재가 틀림없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그의 차는 HS 빌딩 주차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커스터마이징 프로그램에 대해 더 묻고 싶었지만, 도진이 주차선에 차를 세웠다.
그는 곧장 안전띠를 풀고 차 문을 열었다.
“안 내려?”
더 질문을 해보려고 눈치를 살폈지만, 도진의 말에 선아는 질문을 다음 기회로 미루었다.
“이제 내리려고.”
선아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차에서 내렸다.
***
그날 저녁에 팀 회식이 예정돼 있었다. 원래는 선아와 재혁의 결혼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보통은 결혼을 앞둔 이들은 청첩장을 돌리면서 지인들에게 밥을 사곤 했지만, 그동안 미래전략팀 일이 바빠서 선아도 팀원들도 함께 밥을 먹을 시간이 없었다.
결국 결혼 이틀 전이 되어서야 팀원들에게 밥을 살 짬이 났지만, 네이비와의 MOU 체결이 확실시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회식의 목적이 바뀌어버렸다.
MOU 체결을 구두로 약속받았단 말에 현숙은 법인 카드가 아니라 개인카드를 턱 하니 내밀었다.
금액 상관없이 비싼 거로 회식하란 말도 따라왔다.
돈 한 푼 아까워하는 현숙이 돈 생각하지 말고 비싼 소고기로 마음껏 먹으란 말에 회식 자리에 둘러앉은 팀원들의 사기는 어느 때보다도 높았다.
“와우, 네이비와 협약이라니. 이거 정말 대박 아닙니까?”
최대희 과장이 도진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도진보다도 네 살이나 많은 최대희 과장은 원래는 도진에게 반존대 비슷한 말을 하던 사람이었지만, 빅터의 신뢰도 조사 이후로 이제는 깍듯하게 말을 높이고 있었다.
“류도진 팀장 능력 있는 거 알았지만, 이렇게 난사람인 줄 몰랐어. 대단해, 아주 대단해.”
그 옆에서 박성우 차장이 말을 보탰다.
미래전략팀 가장 연장자로 빅터 프로그램을 활용한 마케팅에 제일 회의적이었던 이가 박성우 차장이었다.
그랬던 그가 이제는 도진의 능력을 인정하면서 추켜세우기에 이르렀다. 비단 박성우 차장만 이런 게 아닐 것이다.
네이비와 정식으로 MOU를 체결한다면, 미래전략팀을 계륵이라 표현하며 업신여기던 임직원들의 눈도 달라질 것이다.
네이비라는 이름이 한국에서 갖는 영향력은 그만큼이나 절대적이었기에 오늘 팀원들이 환호하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이렇게 좋은 날 마셔야 하는데, 신유미 대리는 아쉬워서 어떡해. 우리 최 과장 소맥 제조 능력이 최고조에 이르렀는데 말이야.”
반쯤 약 올리듯 말하는 박성우 차장의 맞은편에서 선아는 탄산수 한 병을 툭 땄다.
“소맥 못 마시면 어때요. 신 대리님은 청포도 향 탄산수 드시면 되죠.”
선아는 소맥을 제조하는 최 과장 옆에서 빈 잔에 탄산수를 따랐다. 소맥 잔에 이는 거품만큼 탄산수 잔에도 풍성한 거품이 올라왔다.
“하기야. 술이 중요한가. 이렇게 좋은 날 우리 팀원들끼리 으쌰으쌰 하는 게 중요하지.”
그렇게 해서 팀원들 앞으로 잔이 하나씩 놓였다.
“자, 그럼 우리 류 팀장님 소감 한마디 들어봅시다!”
최 과장이 잔을 높게 들며 말하자 사람들이 한목소리로 ‘류 팀장’을 연호했다.
도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팀원들의 시선이 도진의 얼굴에 가서 닿았다.
그럴싸한 한마디라도 할 줄 알았는데, 도진은 말없이 잔을 든 후 ‘TF팀의 성공을 위하여.’라는 흔하디흔한 구호 하나를 외쳤다.
도진의 건배사에 맞춰 팀원들이 공중에서 잔을 부딪쳤다. 챙, 맑은소리가 회식 자리를 채웠다.
“팀장님 건배사 너무 싱거웠어요.”
선아의 말에 최 과장도, 박 차장도 그렇다는 듯 고갤 끄덕였다. 신유미 대리만 빙그레 웃으며 선아를 바라볼 뿐이었다.
술자리가 무르익기 시작했을 때, 신유미 대리는 선아의 옆구리를 꼭 찌르며 홀로 웃은 이유를 설명했다.
“원래 이 자리 목적이 선아 씨 결혼 축하 자리였잖아. 그러니까 팀장님이 성과 내세우지 않으려고 간단하게 건배사 한 건지도 몰라.”
“아, 그래요?”
우습게도 그 결혼의 당사자인 선아 또한 네이비와의 MOU 소식에 기뻐서 이 자리의 본래 목적을 잊고 말았다.
“팀장님이 은근히 배려심이 많으셔. 솔직히 나도 팀장님 덕분에 임신한 상태로 계속 회사 다닐 수 있는 거고.”
선아는 옆자리에 앉은 신유미 대리를 바라보면서 고갤 끄덕였다.
“그나저나 대리님, 임신 초기 때 팀장님께는 사실을 털어놓은 거였어요?”
그러자 신유미 대리가 고갤 저었다.
“아니, 그런 것도 아닌데 알아서 배려를 해주셨으니까 그 점이 신기하지. 내가 결혼한 지 2년 됐잖아. 이때쯤 대부분 아이가 생기니까 팀장님도 미루어 추측한 게 아닐까 싶어.”
들으면 들을수록 아리송한 이야기였다.
도진이 결혼을 한 유부남이라면 몰라도, 결혼 2년 차쯤에 아이가 생길 거라는 걸 알 턱이 있을까.
일 외에는 모든 것에 무심한 도진의 성격상 그런 걸 알아차린다는 게 더 이상했다.
더군다나 요즘엔 불임이며 신혼을 즐길 목적으로 아이 갖는 걸 미루는 부부도 많은데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행인 것은 도진이 우연히 신유미 대리를 배려함으로 그녀가 유산 위기를 벗어나는 데 도움을 주었단 것이다.
“진짜 우리 팀장님 같은 상사는 어디에도 없어. 인품이면 인품, 능력이면 능력, 외모면 외모. 완벽하잖아.”
그 일로 인해 신유미 대리는 완벽하게 도진의 팬이 되어버렸다.
사실 대학 동아리 시절에도 도진의 외모에 반해 그의 팬이 된 동아리 동기들이 꽤 있었다.
그들은 결국 도진의 무심함에 질려 다들 떨어져 나갔는데, 아무래도 신유미 대리는 오래도록 그의 팬을 자처할 듯 보였다.
“그나저나 선아 씨.”
“아, 네. 탄산수 더 따라드릴까요?”
선아는 눈치껏 신유미 대리의 잔에 탄산수를 부었다. 기포가 잔을 채울 정도로 올라왔다.
“그게 아니라 재혁 씨 말이야. 둘이 무슨 일 있어? 표정이 왜 저렇지?”
선아는 테이블 끝에 앉은 재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평소 회식 자리 분위기를 띄우던 이가 재혁이었는데, 그런 그가 옆자리 상사들 잔을 채워주는 것도 잊은 채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설마 이 자리 목적이 결혼 축하에서 미래전략팀 축하 자리로 바뀌어서 그런 건가?”
“에이. 설마요.”
물론 그럴 만한 좀팽이긴 했지만, 선아는 일단 재혁의 편을 들었다.
‘그나저나 진짜 왜 저런대.’
그런 생각을 하며 재혁을 바라보았다.
재혁은 핸드폰을 들어 메시지를 확인하고 있었다. 그의 핸드폰에는 희진에게서 온 메시지가 떠 있었다.
[우리 어떡해?]
방금 수신된 그 문자 바로 위에는 임신 테스트기 사진이 첨부돼 있었다.
사진 속 임신 테스트기에는 빨간 두 줄이 선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