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유산 위기
결혼 D-3일. 회사에 출근한 선아는 뜻밖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네이비에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이미 한번 빅터 프로그램을 갖고 네이비와 미팅을 진행했었으나 네이비에서 또한 키워드 분석 프로그램을 갖고 있어서 협업이 불발되었다.
지금 현 지점에서 가장 높은 신뢰도를 보이는 프로그램은 빅터였으나, 네이비는 자사의 프로그램과 빅터의 신뢰도 차이는 기술 발전으로 극복이 가능한 수치라고 판단했다.
그렇게 네이비와의 협업은 무산되었었다.
이미 한번 고배를 마셨지만 도진과 선아는 포기하지 않았다.
빅터만이 가능한 수많은 가능성, 이 시점에서는 누구도 생각해내지 못한 것들을 브레인스토밍 회의를 통해 찾아내었고, 그중 당장 실현이 가능한 것들을 제시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네이비에서 다시 한번 보자 연락해온 것이다.
“윤선아 씨, 10분 뒤 미팅룸에서 봅시다.”
팀장석에서 일어난 도진이 회의실 공간으로 걸어갔다.
뚜벅뚜벅 발소리에 미래전략팀 사람들은 고개를 들고 그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그사이, 유투북에서 온 데이터를 분석해 원픽의 데뷔 앨범에 들어갈 곡의 소재를 정했다.
데뷔 앨범이 완성됨과 동시에 서버실이 마련되면 그때부터 실시간으로 빅데이터를 분석하고, 그에 맞춰 원픽의 유투북 마케팅이 시작된다.
오프라인에서의 방송 활동, 온라인에서의 유투북 마케팅이 조화를 이루어 원픽은 곧 전 세계 대중음악 시장에 큰 반향을 일으킬 것이다.
이 모든 준비를 앞두고 미래전략팀은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회의실로 가려는 선아를 신유미 대리가 붙잡았다.
“선아 씨, 결혼이 당장 코앞인데, 전날에 네이비 미팅이 가능하겠어?”
“그럼요. 신 대리님도 임신 초긴데 일 엄청 많이 하시잖아요.”
“많이 하긴, 팀장님이 계속 편의 봐줘서 나야말로 편하게 지내는걸. 그보다 결혼 일정 때문에 업무 진행이 도저히 어렵겠다 싶으면 나한테 넘겨도 돼.”
“에이, 신 대리님 몸이 더 힘들죠. 아직 조심해야 할 때라면서요.”
두 번째 삶을 살면서 모르던 걸 하나씩 깨우쳐 가고 있었다.
그중 하나는 신유미 대리가 임신 초기였다는 사실이었다.
이제 보니 이번 삶에서 이전 삶보다 많은 일을 하게 된 것은 신유미 대리의 임신 때문이었다.
“나 임신 알기도 전부터 피가 비쳐서 휴직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정말 고민 많이 했거든. 때마침 설문조사도 앞둔 상황이었고.”
신유미 대리가 도진에게 임신 사실을 먼저 털어놓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도진이 신유미 대리에게는 상대적으로 몹쓸 일이 없는 편안한 업무를 맡겼고 신유미 대리는 위험한 상황을 무사히 넘겼다.
“내부에서 설문조사 진행 상황만 점검하라고 하시곤 무슨 바람인지 재택근무도 괜찮다고 하시더라고. 나야 그 덕분에 정말 안심했지.”
선아가 고갤 끄덕였다. 신유미 대리가 임신 초기에 유산 위험을 겪었다는 건 며칠 전에야 알게 된 사실이었다.
다행히 임신 12주가 지나면서 안정기에 접어든 신 대리가 팀원들에게 임신 사실을 털어놓았다.
도진이 신 대리의 임신 사실을 미리 알았는지, 알지 못했는지는 이제 선아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일이 가장 많은 대리 직급이 해야 하는 지원 업무를 선아에게 맡김으로써 선아는 더 많은 일을 하게 되었고, 미래는 아는 그녀가 중요 업무를 많이 맡게 되면서 더 큰 성과를 낼 수 있었다는 게 더 중요했다.
이를테면 과거에는 없었던 네이비와의 커뮤니케이션 같은 것 말이다.
네이비와 협업이 되든 안 되든 간에 새로운 가능성이 열렸다는 것이 지금의 선아를 기쁘게 했다.
물론 그것보다도 더 좋은 건 신유미 대리가 유산 위기를 무사히 넘겼단 사실이었다.
아이를 잃어본 적 있는 선아는 자식을 잃는 슬픔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신유미 대리의 기쁨이 자신의 기쁨인 듯 행복했다.
“성별 나오면 꼭 알려주세요. 예쁜 아기 내복 선물해드릴게요.”
“내 몫까지 일 많이 하는 거 같아서 미안하기만 한데.”
“그런 게 왜 미안해요. 임산부는 당연히 배려받아야죠.”
시계를 힐끗 보니 도진과 회의실에서 보기로 한 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선아는 책상에 흩트려놓았던 자료와 노트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그럼 회의 다녀올게요.”
“선아 씨, 파이팅.”
신유미 대리는 주먹을 움켜줘 보이며 선아를 응원했다. 선아는 그녀에게 미소로 화답한 후, 회의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도진이 고갤 들어 선아를 바라보았다.
“늦었네.”
“네?”
당황한 선아는 미팅룸 안에 있는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겨우 30초 늦은 거잖아요.”
선아가 볼멘소리하자 도진이 칼같이 선아의 말을 잘랐다.
“어쨌든 늦었어.”
“죄송합니다.”
선아는 큰 소리로 죄송하다 인사하고 도진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들고 온 프린트물을 책상에 펼치던 그녀는 프린트물을 고갤 들어 도진을 바라보았다.
“아 참, 선배.”
둘이 있을 때면 저도 모르게 사석에서 쓰는 호칭이 나왔다. 선아는 한결 편안한 어투로 내내 궁금했던 걸 물었다.
“신유미 대리님 임신 사실 말이야. 선배는 미리 알고 있었어?”
“…….”
도진은 대답하지 않은 채 자신의 앞에 놓인 서류 하나를 들어 선아에게 내밀었다.
“응?”
방금 질문했으면서도 선아는 답변을 들어야겠다는 생각도 잊은 채 도진이 내미는 서류로 시선을 내렸다.
“알고리즘 생성 메커니즘?”
“응. 오탈자 있는지 확인 좀 해주고, 네이비에 보내기 좋은 양식으로 좀 바꿔줘.”
의대를 나와 공학도의 길을 걷고 있는 도진은 문서 업무에 젬병이었다.
그런 일은 인문학을 전공한 선아가 훨씬 잘했고, 두 사람의 협업에서 또한 선아가 맡은 역할이었다.
“그나저나 선배, 이게 지금의 기술로 실현이 가능한 거야?”
선아는 놀란 얼굴로 도진이 내민 문서를 살펴보았다.
알고리즘이란 일정한 규칙에 따라 무언가를 배열하는 걸 이르는 말이다.
선아가 살던 8년 후 세상은 알고리즘이 인터넷상에서 다양하게 활용되었다.
유투북 사용자들은 알고리즘의 규칙에 따라 새로운 동영상이나 자신의 기호에 맞는 동영상을 추천받는다.
그 동영상들이란 사용자가 클릭을 할 수밖에 없는, 이른바 선호 키워드로 선별한 동영상이고 이게 알고리즘의 법칙이다.
결국 그 알고리즘의 법칙에 따라서 사용자들은 동영상을 연달아 보게 되고 유투북 사용 시간이 늘어난다.
그러면서 유투북의 파급력이 점점 더 커져만 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전에 검색해본 쇼핑 품목이 검색창 중간에 떠서 클릭을 유도하고 결제로 이어지게 하는 것 또한 알고리즘이었다.
그렇게나 미래에선 알고리즘이 많은 역할을 하고 있었지만, 인터넷에서 생성되는 빅데이터를 이제 막 활용하기 시작하는 현시점에서는 꿈의 기술이나 다름없었다.
“알고리즘 이야기는 그냥 한번 해본 이야기였는데…….”
실은 현재의 도진에게 알고리즘에 관해 이야기한 건 선아였다.
알고리즘이란 용어 자체도 떠오르지 않아서 빅데이터를 통해 분석한 선호도를 따라서 추천 동영상이나 추천 쇼핑 품목이 떠오르게 하는 건 어떻냐고 이야길 했었다.
도진은 그 이야길 듣고 미래에 이미 실현된 기술인 알고리즘을 떠올렸다.
알고리즘의 개념에 대해 이해하고 기술 개발을 하려는 움직임이 이미 있긴 하지만, 아직 실현되지 않은 기술이었다.
그런데 도진은 그런 기술을 짧은 연구 끝에 상용화 가능한 기술로 바꾸어 버린 것이다.
그 보고서가 지금 선아의 손에 들린 보고서였다.
“선배는 대체…….”
놀라 입을 쩍 벌린 선아 앞에서 도진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모든 기술은 다 꿈에서부터 시작되는 거야. 중세 사람들이 현재의 낮같이 밝은 밤을 생각이나 했겠어? 누군가 전기를 발견하고, 전기로 등을 밝힐 꿈을 꾸면서부터 오늘과 같은 기술이 생겨난 거지.”
에디슨은 말했다. 천재는 99%의 노력과 1% 영감으로 이루어진다고. 에디슨은 그 1%의 영감에 주목했고, 도진 또한 그 영감에서 기술이 가능한 거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천재들에게 그것이 당연하다 해도 범재들에겐 아니었다.
선아는 자신의 한마디에 자극을 받아 꿈의 기술을 실현화시키는 도진의 천재적인 면모가 놀랍기만 했다.
“네이비는 대한민국 1위 인터넷 검색 엔진에서 멈추지 않고 종합 인터넷 왕국을 꿈꾸는 모양이야.”
도진의 말대로 미래의 네이비는 한국의 인터넷 강자이자 그 모든 것을 망라한 왕국이란 별칭을 갖고 있었다.
웹소설과 웹툰을 선두로 한 오리지널 콘텐츠를 갖고 있었고, 생활에 밀접한 쇼핑과 부동산, 결제 기능까지 갖춘 생활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곳이 되었다.
선아는 도진이 가진 천재적인 면모도 면모지만, 미래를 예측하는 그의 모습에 또 한 번 놀랐다.
미래를 살다 온 자신보다 도진이 더 미래를 더 잘 알고 있었다.
“네이비의 지향점을 자극한다면 빅터를 통한 협업도 충분히 승산이 있어.”
선아는 도진이 작성해놓은 문서를 바라보았다.
문서에는 사용자의 빅테이터를 분석해 사용자별로 맞춤 쇼핑 품목을 추천하고, 콘텐츠에 있어서는 사용자가 선호할 만한 콘텐츠를 추천목록에 띄운다고 되어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기존의 검색어에 연관 검색어라는 걸 만들어 해당 검색어를 많이 검색해본 사람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검색한 것들을 함께 보여준다는 전략이 적혀 있었다.
이것들은 사람들이 검색을 많이 해본 것들을 저장해 보여주는 단순한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알고리즘 분석을 통해 사용자와 비슷한 사용자들의 선호와 빅데이터를 분석해 이루어지며, 그렇게 해 사람들이 네이비의 페이지에서 오래 머무르게 만든다.
그런 기술이 실현된다면 결국엔 네이비의 인터넷 장악력이 높아지고, 더 나아가서는 한국 사회에서 갖는 네이비의 파급력과 영향력이 커지는 것이다.
“이게 정말 지금의 빅터 프로그램으로 가능한 거야?”
“물론이지. 이미 실현 가능한 선까지 개발은 해두었어. 그걸 실용화할 무대와 자본이 필요한 순간이라 생각해서 꺼낸 거고.”
도진이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 미소는 다음 날 네이비 미팅에까지 이어졌다.
미팅이 끝나기도 전, 도진은 결국 네이비 대표로부터 협업 체결에 대한 구두 약속까지 받아냈다.
그 자신만만하던 미소가 off 버튼을 누른 듯 한순간에 꺼진 것은 미팅을 끝내고 차에 올라서였다.
“하아…….”
도진은 모든 긴장을 내려놓은 듯 한숨을 쉬었다.
“정말 정말 대단해. 선배.”
미팅을 마치고 도진의 차 조수석에 오른 선아 또한 돌고래 같은 비명을 지르며 환호했다.
이번 삶에서의 성과는 상상보다 더 놀라웠고, 상상을 상회할 정도로 대단했다.
“정말! 정말로 대단해 선배!”
더 나은 삶을 살고 싶다는 꿈을 꾸었을 뿐이다.
그저 꿈을 꾸었을 뿐인데, 현실은 그 꿈보다도 훨씬 더 크고 아름답게 이루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