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거짓말
“여기 앞장 10페이지까지 드레스 모두 피팅해볼게요. 추가금 내면 다 피팅해볼 수 있는 거죠?”
추가금을 내면서까지 신상 드레스를 다 입어보겠단 말에 희진의 입이 쩍 벌어졌다.
“선아야. 굳이 드레스를 그렇게 많이 입어봐야 해?”
“결혼은 인생에 한 번뿐인 거잖아.”
결혼을 한 번 할 거라는 건 진심이었다. 선아는 세빈이를 낳은 후 다시는 결혼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있으나 마나 한 남편과 10년 가까이 결혼 생활을 하고 나니 남편이 굳이 필요한 건가 의문이 들어서였다.
“그래도 열 벌은 너무 많지 않아? 예쁜 거 몇 벌 골라서 그것만…….”
“그거야 예산 아끼는 신부가 그러는 거고. 나야 굳이 그럴 필요 없잖아. 이 중에서 제일 어울리는 걸로 입을 거야.”
잠시 후, 웨딩숍 직원이 선아와 희진의 앞에 따뜻한 차를 내주었다.
희진은 찻잔을 들어 따뜻한 차로 입술을 축였다. 한 번뿐인 결혼을 완벽하게 치르겠다고 열의를 보이는 선아를 보면서 질투심에 입술이 말랐다.
두 사람이 있던 대기실로 또 다른 직원들이 들어섰다. 그들은 드레스 열 벌이 걸린 행거를 밀고 나타났다.
“오늘 아침에 입고된 신상 드레스예요. 우리 신부님께서 늘씬하셔서 따로 가봉 없이 입어도 될 듯하네요. 바로 피팅 진행할까요?”
“네.”
미소 띠며 자리에서 일어난 선아가 커튼 뒤 피팅 공간으로 향했다.
행거에서 드레스 한 벌을 걷은 직원이 선아의 뒤를 따랐다.
희진의 시선은 행거에 걸린 드레스에서 피팅룸을 가리고 있는 커튼으로 옮겨갔다.
“첫 번째로 입으실 드레스는 미카도 실크 드레스예요.”
커튼 뒤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재벌가는 결혼식 때마다 이런 드레스 입는 거 아시죠? 독특한 광택감이 우아해 보이고, 도톰한 재질의 직물이라 추운 계절 결혼식에 특히 선호되고 있어요.”
직원은 막힘없이 유려한 말로 드레스 설명을 이어갔다.
“드레스에 다른 장식이 없는 건데도 직물 특유의 고급스러움 때문에 선호하시는 분들이 많고요. 특히 이번 시즌 드레스의 경우는 어깨 라인에 셔링을 잡아서 물처럼 흐르는 듯한 자연스러운 느낌으로 포인트를 주어 더욱 우아해 보여요.”
직원의 설명이 끝나자마자 커튼 안에서는 직원들의 감탄사가 이어졌다.
“어쩜 가슴이 큰데도 군살이 전혀 없으시네요. 꼭 드레스 모델 같아요.”
선아가 드레스를 입은 모양이었다.
“신부님 피부색과 미카도 실크가 정말 잘 어울려요.”
희진은 부러움에 피가 바싹 마르는 기분이었다.
매 시즌 유명인의 결혼식을 협찬할 정도로 유명하고 비싼 숍에서 신상 드레스를 마음껏 피팅하는 선아의 처지도 부러웠고, 큰돈을 턱턱 쓰면서 사람들에게 대우받는 모습도 그랬다.
그런 모습은 저로서는 감히 꿈도 꿀 수 없는 모습이었다.
자신이었더라면 곤궁해서 이런 숍을 선택하지도 못했을 것이고, 주머니 사정 때문에 저렇게나 많은 드레스를 피팅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당연히 직원들의 대우도 선아와는 딴판이었을 것이다.
비단 드레스 숍에서 뿐만이 아니라 어쩌다 한 번 옷을 사러 백화점을 가게 되어도, 희진은 자신의 돈을 내고 옷을 사면서 도리어 직원의 눈치를 보았다.
가난하게 살아온 경험이 언제나 그녀를 주눅 들게 했다.
이제는 부자 엄마가 생겼고, 전과 달리 넉넉하게 용돈을 쓰고 좋은 옷을 입을 수 있게 되었지만, 몸에 밴 가난의 그림자가 쉽게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자, 피팅 끝났습니다.”
말소리와 동시에 하얀 커튼이 열렸다.
언제 조명을 켠 것일까. 피팅룸에 밝은 핀 조명이 쏘아지고 있었고, 그 밝은 빛 아래, 선아가 광택 나는 재질의 새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서 있었다.
가녀린 어깨선과 목이 잘 드러나는 드레스였다. 몸을 타고 흐르는 듯한 웨딩드레스의 라인이 올림머리와도 잘 어울렸고, 도도한 이미지의 선아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던 희진은 깜짝 놀라며 입술을 다물었다.
“어때, 희진아?”
“음…….”
희진은 쉬이 대답할 수 없었다.
저뿐 아니라 남들이 보기에도 분명 선아의 모습이 아름다울 건데, 제 입으로까지 선아의 모습이 아름답다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더군다나 지금 고르는 드레스는 자신의 남자와 결혼할 선아가 입을 드레스였다. 그래서 더욱더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다른 드레스도 봐야 알 것 같아.”
간신히 짜낸 한마디였다.
“그래?”
선아는 희진의 답을 듣자마자 옆에 서 있는 실장에게 눈짓했다.
“그렇다네요. 다음 드레스 피팅할 테니 준비해주세요.”
“아. 네. 알겠습니다.”
대기하고 있던 직원이 두 번째 드레스를 들고 피팅룸으로 갔다. 또다시 커튼이 닫히고 드레스 숍 실장의 드레스 설명이 이어졌다.
“이번 드레스는 마카도 실크 드레스보다 훨씬 가벼운 느낌이에요. 마카도 실크가 우아하고 중후한 느낌이었다면 이번 드레스는 그보다 훨씬 발랄하죠.”
다음 드레스의 피팅이 끝나고 커튼이 양옆으로 열렸다.
이번에 드레스는 눈이 부실 정도로 비즈가 화려하게 박힌 벨 라인의 드레스였다.
실장은 촘촘하게 큐빅이 박힌 폭이 좁고 높다란 티아라를 선아의 머리 위에 쓰였다.
핀 조명이 비즈에 부딪히며 무수한 빛무리를 만들어냈다. 선아는 마치 빛 속에 홀로 서 있는 것 같았다. 동화 속에 나오는 공주처럼 화려한 모습이었다.
“…….”
희진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좀 더 별로인 드레스를 입었으면 하는 마음에 두 번째 피팅을 권한 것이지만, 두 번째 드레스야말로 선아와 매우 잘 어울렸다.
희진은 눈을 감았다가 뜨며 몇 번이고 선아의 모습을 확인했다.
드레스에 이는 반짝임만큼이나 그녀의 마음속에 이는 맹렬한 불꽃도 커졌다.
“이번 건 어때?”
사실 이 드레스는 이전 삶 결혼식에서 선아가 입은 드레스였다.
이전 삶에서는 열 벌까진 피팅하지 않았지만, 브로슈어로 확인했을 때부터 이 드레스가 자신과 가장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고, 예상대로 서너 벌 입어본 드레스 중 제일 나았다.
당시 함께 웨딩숍에 방문한 재혁과 현숙도 모두 이 드레스가 최고라고 말했었다.
그러나 희진의 입에서 나온 말은 달랐다.
“처음 게 더 나은 거 같아.”
선아가 생각한 대로였다. 희진은 절대로 진심으로 드레스를 골라주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선아는 그녀의 말을 믿는다는 듯 고갤 끄덕였다.
그 이후로도 드레스 피팅은 계속되었다. 그렇게 다섯 벌쯤 갈아입었지만, 희진은 내내 모호한 답을 했다.
돈을 받고 하는 피팅이었지만, 이쯤 되니 웨딩숍 직원들은 희진의 말에만 의지해 드레스를 고르는 선아를 답답하다는 듯 바라보기도 했다.
“힘들어서 더는 못 하겠어요. 10분만 쉬었다가 하면 안 될까요?”
다섯 벌째 피팅을 마친 선아는 가운만 입은 채 소파에 와서 앉았다.
“아, 네. 알겠습니다. 차를 시원한 거로 바꿔드릴까요?”
“네. 그래 주시면 감사하죠.”
직원이 아이스티를 내어주자 선아는 아이스티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아, 힘들다 진짜…….”
그녀는 진심으로 지쳐 있었다. 사실 이전 삶에서도 결혼 준비는 힘들고 고됐다. 그걸 두 번이나 하려니까 괴롭기만 더 괴로웠다.
그럼에도 드레스를 열 벌이나 피팅해보려고 한 건 다 이유가 있어서였다.
“신부님. 충분히 휴식 취하신 뒤에 말씀해주세요. 바로 피팅 준비해드릴게요.”
“아, 네. 저기 근데…….”
선아가 할 말이 있다는 듯이 직원을 불렀다.
직원이 옆으로 다가오자 선아는 희진을 바라보았다.
“희진아, 드레스 입어보고 싶지 않아?”
“드레스?”
“내 대학 동기 중에 일찍 결혼한 애가 있거든. 걔 결혼식 준비할 때 같이 가서 드레스 골라줬는데, 그때 나는 드레스가 되게 입어보고 싶더라고. 너도 그럴 거 같아서.”
“나야 뭐…….”
그렇다고 말은 않았지만, 희진의 얼굴에 답이 나와 있었다.
“저기, 혹시 저기 걸린 드레스를 들러리 드레스로 입을 수 있나요?”
선아의 말에 직원은 행거에 걸린 드레스를 바라보았다.
들러리 드레스란 보통 웨딩드레스보다는 덜 화려하고 가격이 낮은 드레스였지만, 행거에 걸린 드레스는 모두 프랑스제 고가의 드레스였다.
들러리 드레스로 입기엔 너무 고가가 아니냐고 직원이 반문하려 할 때였다.
“당연히 들러리 드레스로도 가능하죠.”
직원 중 직급이 가장 높은 실장이 맞장구를 쳤다.
“들러리분께서 신부님께 특별한 분이라면 이벤트성으로 가능하다고 보입니다.”
장삿속이 밝은 그녀의 답변에 선아는 얼굴에 화색을 띠었다.
“사실 저희가 자매거든요.”
호적상 자매는 아니지만, 부모끼리 재혼을 했기에 그렇다고 둘러대었다.
“결혼식이 신랑 신부의 일이 아니라 가족 잔치라고 하잖아요. 기왕이면 정말로 가족 잔치가 되면 좋을 것 같아서요.”
“어머, 그러시구나. 신부님 마음 씀씀이가 정말 고우세요.”
“이제 보니 두 분이 정말 닮은 것 같기도 해요.”
웨딩숍 직원들은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면서 맞장구쳤다.
“그래서 말인데 희진아. 네가 내 결혼식 들러리 해주면 안 될까?”
“내, 내가?”
“응. 네가. 너랑 내가 드레스 차려입으면 부모님도 흡족해하지 않겠어?”
“그렇기야 하겠지만…….”
급기야 선아는 희진의 손을 붙잡고 부탁하듯이 조르기 시작했다.
“그럼 드레스 입자, 응? 예쁜 드레스 입고 들러리 해줘, 응? 응?”
“……알았어.”
결국 희진은 못 이기는 척 선아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나머지 드레스는 얘가 피팅할 거니까요. 실장님들께서 신경 써서 도와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피팅 바로 준비할까요?”
“네. 잠시만요.”
선아는 핸드백에서 집게 핀을 빼 희진의 머리를 하나로 올려주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진짜 자매 같다고 할 모습이었다.
“웨딩드레스를 입을 땐 머리를 올리는 게 좋대. 그래야 목선이랑 어깨선까지 다 볼 수 있거든.”
“아……. 그렇구나.”
행거에 걸린 드레스 중 머메이드 라인 드레스를 고른 직원이 드레스를 피팅룸으로 옮겼다.
“그럼 신부님 자매분께서도 바로 피팅하실게요.”
“아……. 네……. 알겠습니다.”
마지못해 피팅을 하는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피팅룸으로 들어서는 희진의 발걸음에는 설렘이 묻어났다.
그 모습을 보면서 선아는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지난 삶에서 결혼식에는 이 드레스 숍에서 신랑 턱시도까지 준비했지만, 이번 삶에서 재혁의 턱시도는 예복을 맞춘 양복점에서 준비하도록 했다.
본식 드레스 피팅에 재혁을 대동하지 않은 건 이 깜짝 이벤트를 위해서였다.
피팅룸의 커튼이 닫혔다.
얼굴에서 웃음을 지운 선아는 적의를 띈 눈으로 피팅룸을 가린 커튼을 바라보았다.
두고 봐. 너희 둘. 내가 아주 우스운 꼴 당하게 해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