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고드는 밤-40화 (40/85)

40화. 호텔 @AW

“선아랑 호텔에서 묵을 거라고 했잖아. 나도 그 호텔에 방 잡을 테니까 잠깐이라도 나한테 왔다 가면 안 돼?”

희진의 제안에 재혁은 인상을 찌푸렸다.

쟤가 미쳤나 무슨 소릴 하는 거지? 지금 그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솔직히 난 두 사람 결혼식도 탐탁지 않단 말이야. 꼭 선아한테 오빨 빼앗기는 거 같고…….”

“빼앗기긴 뭘 빼앗겨. 잠깐 사는 거라니까.”

“잠깐 사는 거여도 결혼은 처음이잖아. 그런 걸 다 선아랑 하니까…….”

희진은 ‘부부클리닉 전쟁과 사랑’에 나온 조강지처의 마음에 깊이 이입한 상태였다.

남편을 빼앗긴 조강지처는 결국 눈물로 돌아섰고, 두 사람은 조강지처를 잊고 가정을 꾸렸다. 그 장면을 보고 난 뒤라 이대로 재혁을 영영 잃을지도 모른단 생각에 눈물이 핑 돌았다.

“또 왜 울고 그래? 지금까지는 아무 말 없이 잘 있었으면서.”

재혁은 그런 희진의 모습을 보면서 정색을 했다.

선아를 꼬드겨가면서 간신히 여기까지 왔는데, 희진이 하는 짓이 꼭 자신의 결혼에 초를 치는 짓거리 같아 보였다.

희진이 재혁의 손을 붙잡고 또다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려 했다.

“그러지 말고 오빠…….”

“지랄하지 말고-”

재혁이 홱 희진의 손을 떨쳐내는 순간, 소파 위에 놓아둔 희진의 핸드폰에서 벨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희진이 부담스러웠던 재혁은 마침 잘됐다 싶은 마음으로 냉큼 그녀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너 전화 온다.”

희진에게 핸드폰을 넘겨주려던 그는 액정에 뜬 이름을 보곤 그도 깜짝 놀랐다.

[윤선아]

전화를 건 이가 다름 아닌 선아였기 때문이다.

“뭐야, 왜 선아가 너한테 왜 전활 해?”

“난들 알아?”

희진은 퉁명스럽게 핸드폰을 낚아챘다.

그녀가 보기에 선아를 향한 재혁의 태도가 확연하게 달라졌다.

전엔 미묘하게 바뀐 듯했지만 가면 갈수록 선아를 두고 안달복달하는 것 같았다.

마음이 상한 희진은 핸드폰을 들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 선아야. 웬일이야?”

-희진아 너 내일 학원 수업 없는 날이지? 새아빠한테 물어보니까 그렇다던데.

“어? 어……. 그런데 왜?”

전화를 받은 희진의 옆으로 재혁이 얼굴을 붙여왔다. 핸드폰 너머에서 들려오는 통화 내용을 듣겠단 뜻이었지만, 선아의 목소리를 그에게 들려주기 싫었던 희진은 몸으로 그를 밀쳤다.

“어어엇…….”

소파 아래로 떨어진 재혁은 비명을 지르다 말고 제 입을 틀어막았다.

-지금 무슨 소리 들린 거 같은데. 누구야? 남자친구?

핸드폰 너머에서 선아의 질문이 날아왔다.

“소리? 신경 쓰지 마. TV 소리야.”

-아……. TV 소리.

“응. TV에서 난 소리니까 신경 쓰지 마.”

희진이 둘러대자 재혁은 그제야 안심한 채 숨소리마저도 죽였다.

-그나저나 너 내일 할 일 없으면 나랑 청담동에서 만나자.

“청담동? 왜?”

-너한테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서.

망설이던 희진은 자신의 발치에 앉은 재혁을 내려다보았다.

재혁은 애가 타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까지 지랄 어쩌고 하던 남자 같지 않은 얼굴이었다. 이렇듯 그는 선아 관련한 일에서만 약해지는 남자였다.

아무리 약점을 잡혔기로서니 손바닥 뒤집듯이 행동하는 재혁을 보면서 희진은 뜻을 굳혔다.

“알았어. 내일 청담동으로 갈 테니까 시간이랑 장소 좀 문자로 보내줘.”

희진이 전화를 끊자 재혁은 소파로 올라와 희진을 닦달하기 시작했다.

“시간이랑 장소는 왜 물어봐? 선아랑 만나기로 한 거야?”

“…….”

“빨리 대답 좀 해보라니까?”

그사이 선아에게서 문자가 날아왔다. 시간과 장소가 적힌 문자였다.

전화는 재혁의 말을 무시하면서 선아에게 알겠다는 답장을 보냈다. 그러자 재혁은 그새를 참지 못하고 희진의 핸드폰을 낚아채서 문자를 확인했다.

“뭐야, 네가 왜 선아를 만나는데?”

“나도 몰라.”

“모르는데 왜 만나겠다고 약속을 잡아?”

“설마 내가 선아한테 다른 말이라도 할까 봐 불안해서 그래? 나 못 믿어서 이렇게 짜증 내는 거야?”

재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는 모습이 마치 수긍같이 느껴진 희진은 버럭 화를 냈다.

“이럴 거면 선아 말고 다른 여자를 만났어야지! 선아랑 나랑 어떤 사인 줄 뻔히 알면서 선아를 만난 주제에 나한테 짜증 내면 안 되지!”

“왜……. 왜 그래 희진아…….”

재혁이 희진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까딱 잘못했다간 희진뿐만 아니라 모든 사실이 탄로 나 선아마저 잃을까 봐, 아니 선아의 재산마저 잃을까 봐 불안했다.

시한폭탄 같은 희진은 이대로 둘 순 없었다.

“결혼식 날 호텔로 갈게.”

“?”

“내가 진짜 사랑하는 건 너뿐이야. 가난이 싫어서 선아랑 결혼하는 거지, 너랑 나야말로 원앤온리, 유일한 사랑이잖아. 마음 풀어, 희진아. 응? 응?”

원앤온리, 유일한 사랑이라는 유치한 그 말이 희진의 단단한 마음을 녹였다.

“몰라아……. 또 속상하게 하기만 해봐.”

희진이 재혁의 목에 팔을 감자 재혁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붙였다.

입술과 입술이 포개졌다.

둘은 진득하게 키스를 나누며 한 꺼풀 한 꺼풀 옷을 벗었다.

둘의 이런 모습을 CCTV 너머 선아가 보고 있었다.

“에이씨, 또 못 볼 걸 봤네.”

굳이 남의 사생활을 보고 싶지 않았던 선아는 CCTV 앱에서 캡처 녹화 버튼을 눌러놓고는 눈을 손등으로 벅벅 문질렀다.

“하여튼 니들은 진짜 찐사랑이다, 찐사랑. 어떻게 하루를 안 빼놓고 붙어 있냐…….”

선아가 마련해놓은 신혼집에 두 사람은 살림을 차리다시피 했다. 재혁이 입주하고 20일가량을 희진은 매일 그 집으로 갔다.

이쯤 되니 누가 불륜녀인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그렇게 좋으면 둘이 결혼할 것이지.

“아아, 뭐, 그렇게 될 수도 있겠지. 그냥 니들끼리 살아라.”

선아는 픽 웃으며 갈아입을 옷을 들고 욕실에 들어섰다.

***

“선아야!”

횡단보도 너머에서 희진을 손을 흔들고 있었다. 막 택시에서 내린 선아는 희진 쪽을 돌아보았다.

멀리서도 티가 날 정도로 희진의 얼굴이 밝았다. 얼굴에서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거 보면 어제 재혁의 사랑을 드으으으음뿍 받은 모양이었다.

선아 또한 희진에게 지지 않고 반갑게 웃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희진이 찻길을 건너 선아의 앞까지 왔다.

사랑받는 여자는 티가 난다고 했던가. 행복에 절은 희진의 얼굴은 눈이 부시다 못해 눈이 따가울 지경이었다.

선아는 친한 척 희진의 팔짱을 꼈다.

“오늘 되게 예쁘게 하고 나왔네?”

“응. 청담동에서 만나자 하니까 어디 좋은 데 갈 거 같아서…….”

과하다 싶을 정도로 외출 준비를 한 건 다 선아 때문이었다.

선아에게 기죽지 않기 위해서 졸업식 날 입고 아끼느라 지금껏 꺼내 보지도 못한 원피스에 코트까지 입은 것이었다.

“근데 우리 어디 가는 거야?”

“드레스 숍.”

선아의 말에 희진이 걷다 말고 멈추어 섰다.

“어디라고?”

선아는 발걸음을 멈춘 그녀를 의아하다는 듯이 바라봤다.

“드레스 숍.”

선아의 답변에 희진의 입매가 단단하게 굳었다. 그 모습을 본 선아는 속으로 조소했다.

8년 후, 30대 중반이 된 정희진은 제 속마음을 감추는 데 능숙한 이였다.

이런 식으로 선아를 엿 먹이는 생활을 8년이 넘도록 해왔으니 속을 감추는 데 충분한 연습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정희진은 그렇지 않았다.

사교성도 없을뿐더러 사회생활 경험도 적은 현재의 희진은 선아가 떠보는 것만으로도 곧장 불편한 내색을 드러냈다.

이번 삶으로 오게 된 후의 선아는 일부러 이렇게 둘을 골려줄 행동과 말을 했다. 그러면서 희진과 재혁의 반응을 즐겼다.

저들은 오랫동안 자신을 두고 이런 짓거리를 해왔다. 그러니 자신이라고 못 할 이유가 없었다.

“드레스 숍은 왜……? 웨딩드레스 저번에 고르지 않았어?”

“그건 웨딩 촬영 때 입을 드레스였고. 이제 본식 드레스 골라야지.”

“본식 드레스? 결혼식 날 입는 드레스를 또 골라?”

“네가 결혼을 안 해봐서 모르는 모양인데, 원래 다들 그래. 촬영용 드레스 따로 정하고, 결혼식 앞두곤 결혼식용 드레스 또 고른다고.”

일부러 희진을 무시하는 듯이 말했다. 희진은 마른 입술을 달싹이다가 어렵게 입술을 열었다.

“예비 신랑이랑 같이 골라야 하는 거 아니야?.”

“재혁 씨한테는 결혼식 날 짠 하고 보여주려고.”

그렇게 말하면서 선아는 진심으로 행복하다는 듯 미소 지었다.

무구한 그녀의 미소 앞에서 희진은 입을 다무는 것밖에는 무엇도 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희진아. 네가 제일 예쁜 드레스로 골라줘야 해. 알았지?”

“……응.”

“저번에 이불 고르는 안목 보니까 나랑 보는 눈이 비슷한 거 같아서.”

“아…….”

이불이라는 말에 희진의 표정이 밝아졌다. 형편없는 똥색 이불이 떠올라서였을 것이다.

그 얕은 마음에 선아는 또 한 번 속으로 웃었다.

“어쨌든 오늘 잘 부탁해, 희진아.”

“응.”

선아는 자매처럼 희진의 팔짱을 꽉 낀 채 인근의 드레스 숍으로 향했다.

웨딩숍의 유리문을 열고 들어서자 직원들이 밝은 얼굴로 두 사람을 맞이했다.

“윤선아 신부님, 이제 결혼이 6일밖에 남지 않았네요. 많이 떨리시겠어요.”

“네. 맞아요. 기대도 많이 되고요.”

오늘 웨딩드레스를 고른다는 명목으로 오후 반차를 신청하고, 웨딩드레스를 입는단 핑계로 미용실에 가서 올림머리까지 했다.

굳이 이런 수고로움을 감수하는 건 희진을 자극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두 사람 외도의 증거는 충분히 모았다. 그걸 언젠가 폭로할 것이지만, 증거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이번 시즌 드레스가 오늘 들어온다고 했죠?”

“네. 프랑스제 드레스가 오늘 오전에 항공편으로 도착했어요.”

“그럼 제가 처음으로 시착하는 거네요?”

“네. 맞아요. 윤선아 신부님은 특별히 신상 드레스 보여드리려고 본식 드레스 피팅을 뒤로 미룬 거예요. 그럼 일단 브로슈어 통해서 드레스 디자인 확인해보시겠어요?”

직원들은 선아와 희진을 대리석으로 장식된 고급스러운 방으로 안내했다. 곧바로 웨딩드레스를 입어볼 수 있는 피팅룸이 있는 방이었다.

커튼이 달린 피팅룸이 방의 정면에 있었고, 그 뒤로는 커다란 소파와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선아와 희진이 자리에 앉자 또 다른 직원이 다가와 차를 준비해주겠다고 물었고, 안내를 맡은 직원은 선아의 앞에 이번 시즌 드레스의 브로슈어를 놓아주었다.

“웨딩드레스의 경우는 특히나 겨울에 화려해요. 직물이 두꺼워지는 대신에 더 많은 장식을 가미할 수 있어서요. 더군다나 지금은 봄 시즌 드레스 신상까지 나와서 드레스를 폭넓게 선택할 수 있어요.”

선아는 직원을 바라보며 고갤 끄덕였고, 희진의 시선은 드레스 브로슈어에 닿아 있었다.

선아는 희진을 의식하며 감흥 없는 얼굴로 브로슈어를 한 장 한 장 넘겼다. 그럴 때마다 희진의 입에서는 커다란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그 모습을 보면서 선아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좋으면 네가 해라, 이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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