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속궁합
선아와 재혁의 결혼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희진의 다이어리 캘린더에는 이날이 D-day로 표시돼 있었다.
달력에 표시된 빨간 동그라미를 볼 때마다 희진은 속이 울렁거렸다.
하루에도 열두 번씩 재혁과 자신의 관계를 폭로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되면 재혁과 자신의 관계도 파국을 맞이할 게 뻔해 참고 있었다.
어물쩍거리면서 재혁의 행동을 묵인해준 사이에 일이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재혁이 정말 이혼할까. 이혼하면 제게로 오는 걸까.
희진은 답답한 명치를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재혁의 결혼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일까. 요즘 그녀는 무얼 먹어도 소화가 잘되지 않았다.
며칠째 얹힌 듯 속이 좋지 않아 요즘은 통 학원 수업에도 집중할 수 없었다.
재혁은 희진의 몸 상태도 아랑곳하지 않고 결혼 날짜가 가까워질수록 더 희진의 몸을 탐했다.
신혼집에 입주한 지도 3주가량이 되었는데, 그동안 매일같이 희진은 그 집에 불려갔다.
오늘도 학원 수업이 끝난 뒤에 그의 신혼집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해두었다.
평소와 다르게 조급하게 구는 그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결국엔 희진도 쾌락에 무너지고 말았다.
희진도 재혁과의 잠자리를 좋아하긴 했다. 속궁합이라는 게 존재하는가 싶을 정도로 그와 잘 맞았지만, 요즘 들어 한 가지 찝찝한 점이 생겼다.
전에는 선아가 싫어서 더욱 자신을 원하는 듯이 보였던 재혁이 이상한 행동을 보이고 있었다.
희진에게 점점 더 자주 선아 흉내를 강요하고 있었다. 마지못해 선아 흉내를 내면 재혁은 평소보다도 훨씬 흥분해서 날뛰었고, 행위는 더욱 집요해지고 길어졌다. 물론 그 덕분에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쾌락도 더욱 커졌다.
어느 순간부터는 희진도 선아인 척하며 재혁과 관계 맺는 걸 즐겼지만, 결혼 후 자신에게 했던 것 같은 짓거리를 선아에게 할 생각을 하면 피가 거꾸로 솟았다.
선아가 혼전순결을 고집하고 있다고 들었지만, 결혼하고 나면 두 사람은 잠자리하기 시작할 것이다.
선아인 척하는 것만으로도 평소보다도 훨씬 흥분하는 재혁인데, 선아와 잠자리를 하고 난 이후에는 어떻게 변할까.
그 생각만으로도 희진의 속이 또다시 울렁거렸다.
희진이 명치를 꾹 누르며 집중하지 못하는 사이 학원 수업이 끝났다.
“과제는 우리 반 스터디 카페에서 내용 확인하시고요. 다음 주에 만나요.”
젊고 예쁜 영어 강사가 과제에 대한 안내를 끝으로 강의실을 나섰다.
선아의 엄마는 희진에게 가장 비싼 취업 학원에서 공부를 할 수 있도록 해주었고, 방금 수업을 끝낸 강사는 이 학원에서도 가장 높은 몸값을 자랑했다.
자기 관리가 철저한 강사는 또각또각 구둣발 소리를 내며 강의실을 나갔다. 그녀가 나간 뒤 학생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엠버 선생님 있잖아. 어릴 때부터 대치동에서 알아줬대.”
“뭘 알아줘?”
“예쁘잖아. 예쁘고 집 잘산다고.”
“헐. 성공해서 다 뜯어고친 줄 알았는데 모태 미녀였어?”
“그렇다던데?”
같은 반 수업을 듣는 또래들의 말을 듣던 희진은 곧장 가방을 들고 강의실을 벗어났다.
대학 때는 다들 고만고만하다고 생각했지만, 사회에 나와보니 잘난 사람들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자신은 이렇게 학원 강의실에 있는데 재혁은 이미 취업하고 사회에 나가 그 잘난 사람들과 어울리고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희진은 더욱 불안해졌다. 저만 제자리에 그대로인 듯하고 재혁은 이미 저만치 앞서나가고 있는 것 같아서였다.
선아와 이혼할 거라 해서 재혁을 용인하고 있지만, 이혼을 한다 해도 그 뒤가 걱정되었다.
학원에서 저를 가르치는 강사뿐 아니라, 또래 수강생 중에도 자신보다 못나 보이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
이혼한 뒤의 재혁이 다른 여자들에게 눈을 돌리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사이 HS 엔터테인먼트의 사위로 살면서 눈이 높아졌을 것이고, 이혼 후 그의 계획대로 위자료나 재산 분할을 받는다면 부자가 돼 있을 텐데, 그런 그가 자신을 여전히 좋아할지도 의문이었다.
희진은 더부룩한 아랫배를 손으로 쓸었다. 어릴 때부터 생리가 불규칙했는데, 요즘 들어 더 그런 기분이었다.
지금껏 생리불순 때문에 임신하는 일이 없었기에 최근까지도 재혁에게는 안전한 날이라고 둘러대었다.
재혁은 피임을 좋아하는 남자가 아니어서 더 그랬다.
만약에 임신해서 재혁의 아이를 갖는다면 그가 아이와 자신을 사랑할까.
“…….”
생각해보니, 그럴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부모에게조차도 정이 없는 남자였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재혁과 잘 사는 그림이 상상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를 붙잡는 이유는, 그것밖에는 희진에게도 다른 선택지가 없어서였다. 희진에게 첫사랑은 그런 것이었다.
희진은 학원 앞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재혁과 선아의 신혼집까지 왔다.
새로 입주하는 아파트이고, 선아와 재혁이 함께 살 집의 평수가 넓다 보니 한 라인에 한 집만이 있는 구조로 돼 있어서 이웃들을 마주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엘리베이터 올라가는 버튼을 누르니 1층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어?”
엘리베이터 안에는 지하 주차장에서부터 올라왔는지 젊은 여자가 타 있었다.
새댁으로 보이는 여자는 배가 크게 불러 있었다. 그녀는 1층에서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는 희진에게 인사를 건네왔다.
“안녕하세요.”
“아. 네…….”
희진은 떨떠름하게 대꾸하며 21층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여자는 반갑다는 듯이 희진에게 연이어 말을 걸었다.
“21층 입주하시나 봐요. 저희도 19층에 입주했거든요.”
자꾸만 말을 시키는 여자 때문에 희진은 어쩔 수 없이 여자와 시선을 맞추었다.
다시금 희진의 눈에 들어온 건 여자의 부른 배였다. 임신 후기쯤으로 보이는 여자의 배는 정말 거대했고, 스웨터 카디건 겉으로 드러날 정도로 태동이 일고 있었다.
여자는 희진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배를 쓸며 묻지도 않은 이야길 했다.
“다음 달에 태어나요.”
“아……. 네…….”
“제가 이 동네에 친구가 없거든요. 21층 입주하셨으면-”
희진이 냉큼 여자의 말을 잘랐다.
“제가 입주하는 건 아니고 자매가 입주하는 거예요.”
재혁이 이혼할 때까지는 재혁과 희진의 사이가 선아의 귀에 들어가면 안 되었다.
그러면 재혁과의 관계도 끝이 날 것이기에 희진은 황급히 여자에게 선아와의 사이를 둘러대었다.
“아. 그러시구나.”
다행히 여자는 별다른 생각이 없어 보였다. 잠시 후, 19층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여자는 희진에게 친절한 얼굴로 눈인사를 한 후에 내렸다. 희진은 여자의 얼굴을 외면한 채 닫힌 버튼을 재차 눌렀다.
“뭐야. 짜증 나게. 왜 저렇게 친근하게 굴어.”
이 자리에 자신이 있는 것에 대한 자격지심이 몰려왔다.
선아가 이 엘리베이터에 있었더라면 여자의 친근한 인사에 답을 하고 그녀와 사이좋은 이웃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나이대도 비슷해 보였고, 선아도 결혼 후에 임신을 준비할 테니 여자와 정보 교류도 하면서 원만한 관계가 될 것이다.
선아의 자리에 자신이 대신 서 있는 것만 같아서 기분이 급속도로 우울해졌다.
그 탓이었을까. 그 순간 아랫배에 찌릿한 통증이 일었다.
“아…….”
희진이 아랫배에 손을 가져다 댔을 때 2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희진은 자신의 집처럼 자연스럽게 비밀번호를 눌렀다.
선아가 마련한 집이지만 이 집을 드나드는 데에 죄책감 같은 건 없었다. 오히려 선아의 것을 망쳐놓는단 생각에 희열마저도 느껴졌다.
생각해보면 자신은 언제나 그런 사람이었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자신을 차별하는 선생님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반에서 만든 텃밭을 망친 적도 있었다.
자신이 한 일인 건 티가 나지 않았지만, 망가진 텃밭을 보고 분통을 터트리는 선생님의 모습을 보고 남모르게 희열을 느꼈다.
이 집에서 지내는 것 또한 마찬가지였다.
‘사랑해, 재혁 씨. 재혁 씨도 그렇지?’
‘응. 나도 사랑해.’
‘세상에서 제일?’
‘당연하지. 세상에서 윤선아를 제일 사랑하지.’
자신의 남자를 두고 사랑이니 뭐니 개소리를 하는 윤선아.
그런 윤선아의 것을 망친다는 생각에 희진은 부러 더 집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새 물건에 손때를 묻혔다.
선아도 자신의 남자를 제 것처럼 굴고 있으니 자신도 그래야지만 속이 풀렸다. 선아의 것을 망치고 있다는 생각에 희열마저도 들었다.
“자매 좋아하시네…….”
부모님이 결혼했지만 선아와 희진은 호적으로 엮이지 않았다.
부모가 재혼한다고 해서 배우자의 자녀가 상대의 자식이 되는 건 아니었다. 그랬기에 희진의 아빠와 선아 사이에는 친권 같은 권리가 존재하지 않았다.
선아는 이미 성년이었기에 굳이 입양 절차 같은 걸 통해서 성본 변경을 하지 않았고 희진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그들의 부모가 결혼하면서 자매와 비슷한 어정쩡한 관계가 되어버렸다.
만약 부모들의 말처럼 선아가 자신을 친자매처럼 여겼더라면 오늘과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선아가 자신을 정말로 자매처럼 여겼다면 재혁과 연애를 시작하기 전에 한마디 상의는 했을 테니까.
그랬더라면 희진은 그들의 연애를 어떻게서든 막았을 것이다.
희진은 손을 씻은 후 주방으로 갔다. 압력밥솥 안을 확인하니 밥이 없어서 쌀을 씻어 밥을 했다.
밥이 다 될 때쯤 재혁이 돌아왔다.
그사이 냉장고에 있던 콩나물로 콩나물국을 완성한 희진은 앞치마를 입은 채 재혁에게 달려갔다.
“왜 이렇게 늦었어?”
밥 냄새를 맡았는지, 재혁은 정장 재킷을 희진에게 던지듯 안기곤 곧장 부엌으로 갔다.
식탁 위, 노란 계란말이가 펜던트 등의 빛을 받아 더욱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재혁은 씻지도 않은 손으로 계란말이를 집어 입에 넣었다.
“배 많이 고파?”
“어.”
“기다려. 국이랑 밥 퍼줄게.”
허기진 듯 계란말이를 입 안 가득 넣고 우걱우걱 먹는 그의 모습에 흐뭇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요리하느라 애썼느냔 말 한마디 하지 않는 모습에 서운하기도 했다.
“역시 집에 사람이 있는 게 좋네.”
“정말?”
희진은 재혁의 한마디에 화색을 띠며 국을 퍼 식탁 위에 놓았다.
“응. 따끈한 밥도 먹을 수 있고.”
희진은 재혁의 말이 고맙단 뜻을 에둘러 표현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식탁에 앉아 식사하고 거실 소파로 향했다.
재혁은 샤워를 해야겠다며 욕실에 들어갔다. 희진은 재혁을 기다리면서 TV를 켰다.
때마침 ‘부부클리닉 전쟁과 사랑’이라는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있었다.
-이 남자는 처음부터 내 남자였어! 감히 네까짓 게 내 가정을 깰 수 있을 거 같아?
조강지처가 내연녀에게 남편을 빼앗기는 내용이었다.
TV 속, 바람난 남편이 이혼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내연녀와 결혼식을 올렸다. 그 장면이 마치 자신과 헤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연애와 결혼을 하는 재혁과 선아 같았다.
희진은 조강지처에 깊게 이입을 했다. 가난하고 가진 게 없는 조강지처가 바람난 남편의 결혼식 날 홀로 남아 눈물을 흘리는 장면에서는 희진도 눈물을 흘렸다.
때마침 재혁이 욕실에서 나오고 있었다.
희진은 눈물을 훔치며 재혁에게 말했다.
“결혼식 날 말이야…….”
수건으로 머리를 털던 재혁은 네가 왜 결혼식에 대해 언급을 하느냔 눈으로 희진을 바라보았다.
“선아랑 호텔에서 묵을 거라고 했잖아. 나도 그 호텔에 방 잡을 테니까 잠깐이라도 나한테 왔다 가면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