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고드는 밤-38화 (38/85)

38화. 짐승 같은 짓

30여 분을 달린 차는 선아의 집 앞에서 멈추어 섰다.

“선배 오늘 정말 고마워.”

집으로 오는 내내 도진과 단둘이 있는 게 불편했던 선아는 어서 차에서 내리고 싶었다.

그녀가 차에서 내리기 위해 문손잡이에 손을 가져다 댔다.

“선아야, 안전벨트.”

“아, 응.”

너무 긴장하고 있던 나머지 안전띠도 풀지 않고 차에서 내리려 했다.

선아가 뒤늦게 안전띠를 풀려 했다. 도진과 선아의 손이 안전띠 위에서 닿았다.

“아.”

선아가 놀라 손을 거두어들였다. 그러자 도진이 선아의 안전띠 잠금을 풀어주었다.

“오늘 고, 고마웠어.”

“인사 방금 했잖아.”

“아…….”

긴장하니 자꾸만 하지 않던 실수가 나왔다. 선아는 화끈거리는 얼굴을 감출 길이 없었다.

“반포동에서 무슨 일 생기면 언제든 부르고.”

“반포동?”

반포동은 선아의 신혼집이 있는 동네기도 했고, 도진의 집이 있는 동네이기도 했다.

“아…….”

그 말인즉 재혁이 이상한 짓을 하거든 언제든 도움을 요청하란 말이었다. 선아가 불편할까 봐 에둘러 말한 것이다.

도진의 뜻을 알아차린 선아는 마른 입술을 달싹이다가 운을 뗐다.

도진은 재혁의 잘못을 콕 집어 말하지 않았지만, 그에게 부끄러운 모습을 들켰기에 오늘 있던 일에 관해선 설명을 해야 할 듯했다.

“오늘은 그냥……. 재혁 씨랑 다툼이 좀 있어서…….”

운전대에 올려둔 도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손등 힘줄이 붉어질 정도로 운전대를 꽉 쥐었다가 놓았다.

그의 손을 보며 선아는 괜한 변명을 했다고 생각했다.

“그럼 들어가 볼게.”

계속 여기 있다간 자잘한 실수가 이어질 것이다. 결국 선아는 도망치듯 차에서 내릴 수밖에 없었다.

***

선아가 집을 뛰쳐나간 뒤로 재혁은 쭉 좌불안석이었다.

두 시간 전쯤에 선아가 달려 나간 후 계속 전화를 시도했지만. 선아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집에 찾아가서 사과할까도 생각했지만, 자신을 보고 하얗게 질린 채로 엘리베이터 문을 닫는 걸 본 뒤라 그럴 수 없었다.

자신이 선아에게 저지른 짓을 현숙이 알기라도 하면 이 결혼이 어찌 될지 장담할 수 없었다.

핸드폰을 쥔 채 고심하던 그은 결국 선아의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네. 여보세요.

수화기 너머에서 현숙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님, 밤중에 죄송합니다. 선아 들어왔나 해서요.”

-선아?

그때였다. 수화기 너머로 ‘다녀왔습니다.’라고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재혁의 얼굴에 잠시간 화색이 돌다가 이내 다시 어두워졌다. 선아가 현숙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털어놓을까 봐 불안해진 것이다.

-선아 지금 막 들어왔는데, 바꿔줄게. 선아야. 재혁이야. 전화 받아봐.

잠시 후, 선아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재혁은 곧바로 꼬리를 내렸다.

“선아야. 정말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그는 마른 손을 쥐었다가 펴며 선아의 답을 기다렸지만, 전화기에선 한참 동안 침묵만 흘렀다.

“선아야, 이번 한 번만 봐줘. 내가 실수한 거야. 다신 안 그럴게.”

-재혁 씨, 방에 가서 핸드폰으로 전화할게. 조금 이따가 통화해.

“아, 응. 알겠어. 꼭 전화해줘. 꼭, 꼭. 기다리고 있을게.”

전화를 끊은 재혁은 초조하게 선아의 전화를 기다렸다.

거실보다 한 층 위에 있는 방으로 올라가서 가방을 놓고, 옷을 갈아입는 데까지 5분의 시간이 걸리지 않을 건데도, 그 5분의 시간이 재혁에게는 억겁의 시간처럼 길게 느껴졌다.

“아……. 왜 전화를 안 하는 거야.”

선아가 전화를 걸어올 때까지 그 잠시의 시간도 재혁은 엉덩이를 바닥에 붙이지 못했다.

손바닥에서 땀이 인 그는 양손을 잠옷 허벅지에 북북 문질러 닦았다.

그렇게 똥 마려운 개처럼 거실을 서성일 때였다. Rrrr. Rrrr. 마침내 핸드폰에서 벨 소리가 들려왔다.

재빨리 핸드폰으로 손을 뻗은 그는 액정에 뜬 이름을 확인했다.

액정에 뜬 이름 세 글자를 확인한 그의 얼굴을 구겼다.

[정희진]

재혁에게 전화를 건 이는 선아가 아니라 희진이였기 때문이다.

“아씨. 하필이면 지금 전화하고 난리야.”

곧장 통화 버튼을 누른 재혁은 매몰차게 소리쳤다.

“내가 다시 전화할 테니까 끊어!”

-오빠, 잠-

재혁은 희진의 말을 듣지 않은 채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혹시라도 희진과 통화를 하다가 선아의 전화가 부재중으로 넘어갈까 싶어서였다.

그러고 나서 5초쯤 지났을까. Rrrr. Rrrr. 다시 또 벨 소리가 울렸다.

“이게 전화한다니까 말귀를 못 알아-”

희진인 줄 알고 성을 내던 재혁은 핸드폰 액정에 뜬 이름을 보고 표정을 바꾸었다.

[윤선아]

선아에게서 온 전화였기 때문이다.

마침내 기다리던 전화가 왔다. 재혁은 마른 입술을 달싹이며 전화를 받았다.

“선아야. 내가 잘못했어.”

그는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사과부터 했다.

이 결혼은 그의 미래가 걸린 결혼이었다. 선아와 이어지느냐 마느냐에 따라서 자신이 미래가 결정된다.

다시 시장 점포에 딸린 주택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무능력한 아버지도, 기가 센 엄마도 싫었지만 언젠가 부모님의 노후를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감도 싫었다.

선아나 선아의 엄마도 드세긴 했지만, 적어도 그들을 돈이 많았고, 노후를 책임질 필요도 없었다.

“내가 생각이 짧았어. 너도 날 원한다고 생각해서 그랬던 거야. 다시는 안 그럴게. 정말로 미안해.”

부자인 선아와 함께라면 한 번 사는 인생 제 마음대로 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다시 또 이만한 부잣집 딸을 만난다는 보장이 없으니 선아를 놓칠 수 없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선아의 말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애가 탄 재혁은 재차 사과의 말을 뱉었다.

“선아야. 아까는 내가 너무 흥분해서 미쳤었나 봐. 네 뜻도 모르고 신혼집에 입주했으니까 그래도 된다고 생각하고 실수한 거야.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 이번 한 번만 용서해주라.”

-재혁 씨.

“내가 정말 미안해. 결혼하기 전까지는 손끝 하나도 대지 않을게. 정말이야. 약속할게.”

선아로부터 원망의 말이 따라 나올 줄 알았지만, 의외의 말이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왔다.

-나야말로 정말 미안해.

“응?”

선아가 사과할 줄 몰랐던 재혁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실 내가 아직 경험이 없잖아. 처음이라서 무섭고 겁이 나서 도망친 거야.

사색이 된 채 도망치던 선아의 모습을 떠올린 재혁은 이해된다는 듯 고갤 끄덕였다.

“네 잘못 아니야. 나야말로 네가 처음인 거 생각하면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근데……. 재혁 씨는 처음이 아닌가 봐?

“응? 나?”

-응.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같이 자자고 하길래…….

“아, 아냐. 나도 처, 처음이지. 나도 네가 처음이지.”

-그렇구나. 어쨌든 재혁 씨도 내가 도망쳐서 당황하고 놀랐지?

“어, 응…….”

-그래서 말인데, 재혁 씨……. 나 정말로 혼전순결 지키고 싶거든. 재혁 씨도 마찬가지로 혼전순결 지키고 있었잖아. 그러니까 우리 조금만 더 참았다가 결혼하고 하면 안 될까?

드세고 강하다고만 생각했던 선아가 자신에게 혼전순결을 지켜달라 말하고 있었다.

재혁의 귀에는 그 말이 마치 이 관계의 결정권을 제게 준다는 말처럼 들렸다.

-그래 줄 수 있지?

선아의 예상 밖 반응에 재혁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응. 당연히 그래야지. 결혼 전까지는 네 몸에 손끝도 대지 않을게.”

수화기 너머에서 선아가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

자갈 굴러가는 듯 간지럽고 사랑스러운 웃음소리였다.

맹세컨대, 재혁은 단 한 번도 여자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사랑스럽다는 듯한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선아의 웃음소리에 재혁의 마음이 지나칠 정도로 간질거리기 시작했다.

-나 때문에 재혁 씨도 기분 나쁘고 놀랐을 건데, 이해해줘서 정말 고마워.

“고맙긴.”

-그럼 잘 자, 재혁 씨. 나도 씻고 잘게.

그러나 선아를 두고 간지러운 마음과 별개로 재혁은 답도 없는 종자였다.

“근데 선아야.”

-응?

이제 막 집에 들어와 씻고 잔다는 선아에게 두 시간 전에 어디에서 누구랑 무얼 했느냐고 추궁하고 싶었다.

그는 제 맘을 가까스로 다스리며 다정한 인사를 건넸다.

-왜 부르고 말이 없어?

“아니야. 잘 자라고. 내 꿈 꾸고.”

-응. 재혁 씨도 내 꿈 꿔.

전화가 끊어졌다. 소파에 앉아 있던 재혁은 제 가랑이 사이를 내려다봤다.

지켜주겠다는 약속까지 했지만, 그의 몸은 선아의 웃음소릴 들은 순간부터 달아올라 있었다. 어쩌면 오늘 선아와 잠자리를 해야겠다고 한 순간부터 이런 상태였는지도 모른다.

“쪽팔리게 혼자 해결할 수도 없고…….”

결국 재혁은 희진과 했던 약속을 지켰다. 전화를 끊자마자 희진에게 전화했다.

“희진아. 지금 여기로 좀 올래? 왜긴. 너한테 내 집 보여주고 싶어서지. 너도 궁금하잖아.”

***

씻고 나온 선아는 수건을 머리에 두른 채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핸드폰을 켜고 홈 CCTV 앱을 실행했다.

집 안에 CCTV가 설치된 걸 확인했으니 잘 작동하는지도 볼 생각이었다.

로딩 화면이 지나가고 핸드폰에 집 안의 영상이 뜬 순간 선아는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뜻밖의 장면이 핸드폰 액정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정희진……?”

희진이 그 집에 들락거리게 될 거라고 예상하긴 했지만 당장 오늘부터 둘이 그 짓거릴 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신혼 침구를 고른다면서 희진을 약 올린 이유도 자극하려던 것이었지만, 이렇게 금방 반응이 나타날 줄이야…….

집 안으로 들어온 희진은 곧장 재혁의 목에 팔을 감으며 안겼다.

선아는 혀를 끌끌 찼다.

“너흰 진짜 찐사랑이다, 찐사랑.”

전에야 콩깍지가 씌어서 재혁이 세상 최고의 남자로 보였지만, 그와 함께 살면서 진면목을 본 뒤로는 그런 환상을 다 사라졌다.

세상에 얼마나 괜찮은 남자가 많은데……. 하물며 도진 선배만 하더라도…….

도진의 생각이 떠오른 선아는 자신의 뺨을 두어 차례 짝짝 때렸다.

“정신 차려, 윤선아. 오르지 못할 나무야.”

선아는 늘 도진을 오르지 못할 나무라고 생각해왔다.

대학 때는 지나치게 과묵한 도진이 어려웠고, 이후에 도진의 집안에 대해 알게 된 이후로는 내놓으라 하는 명문가, 심지어는 대한민국 상류층 커넥션의 중심에 있는 병원 재단 집안 아들이라는 점이 그를 더욱 어려워 보이게 했다.

8년 후엔 HS 엔터테인먼트가 대한민국에서 손꼽을 정도의 회사가 된다고 하나, 그건 어디까지나 8년 후의 이야기이지, 지금으로선 감히 도진네와는 댈 수도 없었다.

그랬기에 선아에게 도진은 오르지 못할 나무였고 하늘에 뜬 구름이나 같은 존재였다. 그런 이유로 선아는 한 번도 도진을 이성으로 인지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현재의 그녀는 몸만 미혼이었지, 정신은 기혼에 아이 엄마였다.

“사람이 양심이 있어야지…….”

선아는 고개를 휘휘 저어 도진에 관한 생각을 털어버리곤 다시 핸드폰으로 시선을 두었다.

핸드폰 속에는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장면이 이어지고 있었다.

선아는 인상을 찌푸리며 영상의 캡처 버튼을 눌러두고 핸드폰을 껐다.

노골적인 성행위까지는 증거로 수집할 생각이 없어서 침실이 아닌 거실에만 CCTV를 설치한 것인데, 두 연놈은 거실에서 일을 벌일 기세였다.

“이것들아. 침대에서 해라, 침대에서. 짐승도 아니고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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