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고드는 밤-37화 (37/85)

37화. 좁은 곳

선아의 머리카락이 마르고 나서야 도진은 컴퓨터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

선아에게 책상 의자를 양보한 그는 간이의자를 끌고 와 선아의 옆에 앉았다.

선아보다도 훨씬 커다란 손이 마우스를 쥐었다.

손등의 푸르른 혈관은 손목을 타고 올라가 두 단 접은 셔츠 소매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먼저 성별을 선택하고, 그다음 인종을 선택해야 해.”

도진이 입을 열자 선아의 시선이 손에서 컴퓨터 모니터로 옮겨갔다.

“여기 보면 인종별로 얼굴 형태가 정해져 있거든. 그런 다음에 연령을 선택하는 거야. 어린이와 성인의 얼굴 형태가 달라서 연령도 지정을 해야 해.”

그가 마우스를 집고 이곳저곳을 클릭할 때마다 컴퓨터 화면에 뜬 인물의 얼굴이 바뀌었다.

이 세상 어디선가 살고 있을 법한 생생한 모습의 사람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대략적인 건 매뉴얼에서 선택한 다음 이 조절 바를 통해서 미세한 조정을 해야 해. 자, 봐봐.”

도진은 눈 설정 아래 눈동자 크기를 조절하는 바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옮겨갔다. 그러자 모니터 화면 속 인물의 푸른 눈동자가 커졌다가 작아졌다.

“눈동자 색깔까지 조절할 수 있거든. 한국인이더라도 동공이 까만 사람이 있는 반면에 옅은 갈색인 사람도 있잖아.”

“그런 세세한 조정까지 할 수 있어?”

“응.”

도진은 설명 대신 직접 시범을 보였다. 눈동자 색깔뿐 아니라 눈 색깔, 입술 색, 피부색과 머리카락 색까지도 커스터마이징 프로그램을 통해 자유롭게 설정할 수 있었다.

프로그램 시연을 마친 도진이 마우스에서 손을 뗐다.

“할 수 있겠어?”

“응. 해볼게.”

도진이 간이의자에서 일어나 자리를 피해주었다.

달칵 소리와 함께 작업 방의 문이 닫히자 선아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엄마, 내가 만두같이 생겼어? 유치원 선생님이 나보고 만두같이 귀엽다는데?’

눈을 감으니 세빈이와 있었던 일들이 떠오르면서 세빈이의 생김새가 하나하나 떠올렸다.

올이 가늘고 보드라운 머리카락. 예쁜 두상이 돋보이게 자른 상고머리…….

‘왜 미용실에 갈 때마다 도토리 같은 머리 모양으로 자르는 거야?’

세빈이의 단골 미용실에서는 세빈이의 머리를 둥글게 깎은 뒤에 앞머리만 짧게 잘라서 도토리 같은 머리 모양을 만들어주었다.

그 머리 모양이 세빈이와 잘 어울렸다. 언젠가 세빈이가 했던 말처럼 뺨이 만두처럼 통통했던 아이의 모습을 더욱 귀여워 보이게 했다.

선아는 자신의 기억 속 세빈이를 컴퓨터 안으로 불러왔다.

손을 신중하게 움직이면서 도진에게 배운 대로 커스터마이징 프로그램을 조작하기 시작했다.

성별과 인종, 나이를 선택하는 것까지는 쉬웠는데, 막상 얼굴 형태를 잡으려니 마음먹은 것처럼 되지 않았다.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세빈이와 닮은 듯 다른 어설픈 얼굴이 되었다.

선아가 마우스를 놓고 한숨을 쉬었다.

문을 열고 작업 방에 들어온 도진은 선아의 옆에 커다란 머그잔 하나를 놓아주었다.

“코코아. 몸 좀 녹이면서 하라고.”

이미 머리도 다 말랐고, 마른 옷을 입고 있어서 추위도 가신 상태였다. 그렇지만 도진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로 선아를 보고 있었다.

“나 안 추운데.”

“그래도.”

“고마워, 선배.”

선아는 머그잔을 입가에 대면서 자신이 만들어놓은 얼굴을 찬찬히 보았다. 그녀의 뒤에서 허리를 숙이고 모니터를 들여다보았다.

“잘 안 돼?”

“응. 내가 아는 아이 얼굴은 지금 이 화면에 뜬 얼굴보다도 볼이 더 빵빵하거든. 뺨 모양을 설정하는 게 잘 안 돼.”

“잠깐만.”

선아가 모니터 앞에서 살짝 피해 주자 그는 본격적으로 마우스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이쪽 세부 조정에 보면 롤러가 있어. 롤러로 볼륨을 주고 싶은 데를 문지르면 볼륨이 생겨. 사람마다 얼굴 굴곡은 다르니까 뺨이나 눈두덩이, 입술에 입체감을 주는 기능이거든.”

설명 중인 그에게서 진한 머스크 향이 느껴졌다. 사무실에서도 맡은 향이지만 그의 공간에서 그의 향을 맡으니 괜스레 기분이 이상했다.

“이 정도 설명이면 될까?”

“…….”

“선아야?”

“아, 응.”

홀린 듯이 설명을 듣던 선아는 정신을 차리고 도진에게서 마우스를 넘겨받았다.

“!”

다시 모니터를 바라본 그녀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세빈이랑 얼굴형이 같아…….’

도진이 몇 번 조작했을 뿐인데, 선아가 했을 때보다도 세빈이와 더욱 비슷한 얼굴형이 되었다.

복숭아처럼 사랑스러운 뺨과 동그란 짱구 이마, 볼록한 입술까지. 얼굴 형태만으로도 세빈이가 떠오를 정도였다.

“아…….”

선아는 눈을 깜빡이며 몇 번이고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그 옆에서 도진은 선아의 손에 들린 머그잔을 슬그머니 빼앗아 들었다.

“쏟아질까 봐.”

“아, 미안 미안.”

“나한테 미안할 건 없고. 너한테 쏟아질까 봐.”

선아는 다시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후. 세빈이의 얼굴을 떠올리기 위해 집중했다.

사실 이 세상에서 다시 살게 된 뒤로 두려운 것이 생겼다.

인간의 기억에는 한계가 있다.

클라우드에서 본 희진과 재혁의 외도는 메모장에 기록을 해둘 수 있었지만, 세빈이의 얼굴은 자신의 기억이 아니고서는 어디에도 기록해둘 수 없었다.

그림 솜씨라도 좋으면 아이 얼굴을 그려둘 수 있었겠지만, 안타깝게도 선아에게는 그런 재능이 없었다.

점점 흐릿해지는 기억과 더불어 세빈이의 얼굴마저도 잊을까 봐, 그녀는 시간이 흐르는 게 두려웠다.

다시는 세빈이를 만나기 위해 열심히 사는 것과 별개로 자식을 잃은 참담함은 날로 커졌다.

그런 와중에 세빈이를 다시 볼 방법이 생긴 것이다.

선아는 모니터 속에 들어갈 기세로 집중한 채 세빈이의 얼굴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도진은 옆자리에서 묵묵히 그녀를 지켜보았다.

선아는 자신처럼 아몬드 형태의 눈을 선택하고, 제 눈보다는 더 둥글게 모양을 조절했다.

눈동자는 밤색을 선택하고 설정값보다도 조금 옅은 색을 넣었다.

동공을 크게 만드니, 마치 세빈이가 저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세빈이의 코는 아직은 어린이라 그런지 콧대가 짧았다.

콧대를 짧게 만들고 콧방울을 둥글게 만들고 나서 보니 영락없는 세빈이의 모습이었다.

선아가 마우스를 놓은 채 감격에 젖자 도진은 마우스를 움직여 프로그램 하단의 무빙 버튼을 눌렀다.

그 순간 선아는 너무 놀라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 말았다.

“!”

모니터 속 세빈이가 눈을 깜빡였다. 그리곤 눈을 굴려 옆쪽을 바라보다가 다시 정면을 보곤 입술을 움직이며 무언가 말을 했다.

‘안녕.’

그렇게 말하는 듯 보였다.

“선배……. 이게 대체…….”

“나중에 몽타주 프로그램으로 기부하려고 모션 기능을 추가했어. 사람은 잠시도 가만있지 않으니까 활동성을 추가하면 더 실제 같을 거 같아서.”

도진의 말대로였다. 모니터 속 세빈이는 마치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것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선아는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화면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세빈이를 바라보았다.

“선배……. 나……. 이 모습만 따로 추출해서 저장해줄 수 있어?”

“많이 보고 싶은 아인가 봐.”

그녀의 뺨을 타고 눈물 두 줄기가 흘러내렸다.

“응. 무척……. 너무, 너무, 보고 싶은 아이라서…….”

도진은 왜 우느냐고, 이 아이가 누구냐고 물어보지 않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세빈이의 모습을 사진처럼 출력해주었다.

선아는 염치없어 보일 걸 알면서도 여러 가지 사이즈로 세빈이의 얼굴을 출력해달라고 졸랐다.

세빈이와 꼭 같은 얼굴이 눈앞에 있다는 사실에 욕심을 부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도진은 그녀의 채근대로 무엇이든 다 해주었다.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는데…….”

선아는 제 손에 들린 프린트물을 바라보다가 가슴에 안기도 하고, 손으로 쓸어보기도 했다.

감격에 젖은 그녀를 보면서 도진은 말없이 웃기만 할 뿐, 끝끝내 사진 속 아이가 누구인지 물어보지 않았다.

선아는 그의 사려 깊음에 늘 감사했다.

비단 이번 생뿐만이 아니었다.

-건조가 완료되었습니다.

그사이 블라우스 건조가 끝이 났는지 방 바깥에서 알림음이 들려왔다.

“오늘 정말 고마워. 옷 갈아입고 갈게.”

알람음에 정신을 차린 선아는 거실로 가 블라우스를 꺼내 들었다. 그러곤 옷을 든 채 뒤돌아섰을 때였다.

“잠깐만.”

도진이 다가와 선아의 발치에 와서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고 앉았다.

“……?”

“발 좀 들어봐.”

“발?”

도진의 손이 응급실에서 치료받은 선아의 발에 닿아 있었다.

언제 가져온 건지, 도진은 새 양말의 포장을 뜯어 선아의 발에 가져다 댔다.

“맨발에 슬리퍼 신기엔 좀 추운 날씨라.”

“내, 내가 신을게, 선배.”

“됐어. 무릎 꿇은 김에 신겨줄게. 상처 안 닿게 발에 신길 테니까 발만 들어봐.”

선아가 조심스럽게 발을 들었다. 도진은 양손으로 양말을 넓게 벌려 상처에 닿지 않도록 양말을 신겨주었다.

다른 발은 괜찮다 하려고 했지만, 이미 그의 손이 다른 쪽 발에도 닿아 있었다.

커다란 남성용 양말을 신자, 뒤꿈치의 둥근 부분이 발목까지 올라와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되었다.

하지만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발 딛는 부분에 통증이 가신 것도 같았다.

옷을 갈아입고 나온 선아는 도진을 향해 고갤 숙였다.

“정말 고마워.”

마른 옷으로 갈아입은 뒤여서인가, 도진의 표정도 누그러져 있었다.

“고맙단 말 그만해도 돼. 오늘 워낙 많이 들었잖아.”

“그래도. 그래도 고마워.”

도진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이고는 아무것도 바르지 않아 이마로 쓸려 내려온 머리카락을 손으로 훑었다.

넓고 판판한 이마 아래로 날렵한 콧날과 적당히 도톰한 입술.

저도 모르고 그의 얼굴을 타고 시선을 내리던 선아는 더는 그를 바라보지 못하고 홱 고갤 돌렸다.

“이제 가볼게.”

“데려다줄게.”

“괜찮아.”

“내가 안 괜찮아서 그래.”

선아는 귓불까지 빨개진 채 코트를 챙겨 현관에 갔다.

“같이 나가. 선아야.”

차 키를 든 도진이 그녀의 뒤를 따라나섰다.

***

선아가 안전띠를 매자 도진은 곧장 차를 출발시켰다.

선아는 운전하는 그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회사에서와 다르게 흐트러진 머리카락 때문인지, 묵묵히 운전하는 그는 조금 피로해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아무 생각 없이 도진의 차를 얻어 타던 전과는 다르게 혼란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이상하리만큼 운전하는 그의 움직임이나 숨소리까지 의식되고 있었다.

도진의 차는 재혁의 차와 같은 브랜드의 독일제 세단이지만, 그보다 트림이 더 높았고, 훨씬 넓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좁은 데 들어온 것처럼 답답했다.

도진의 키가 재혁과 비교해 10cm가 넘게 크고, 어깨도 훨씬 넓었지만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닌 듯했다.

선아는 도진의 쪽을 바라보지 않으려고 애쓰며 제 가방 손잡이를 꽉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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