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고드는 밤-36화 (36/85)

36화. 붉게 물들다

“선아야.”

재혁이 선아의 이름을 불렀다.

선아는 엘리베이터의 1층 버튼과 함께 문 닫힘 버튼을 눌렀다.

-문이 닫힙니다.

안내음과 함께 문이 닫히기 시작했지만, 그사이 현관문 앞에 서 있던 재혁도 엘리베이터로 달려오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원래 이렇게 느리게 닫혔던가.

“내가 미안해 선-”

그의 손이 엘리베이터 버튼에 닿기 전, 다행히도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엘리베이터는 빠른 속도로 1층으로 내려갔다.

선아는 덜컹거리는 심장 언저리를 손으로 눌렀다.

재혁이 계단으로 달려 내려와도 엘리베이터를 따라잡는 건 역부족일걸 아는데도, 선아의 심장은 속절없이 뛰고 있었다.

-1층입니다.

이윽고 알림음과 함께 1층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1층에 발을 딛자마자 선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공동 현관을 뛰쳐나갔다.

찬 바람이 모직 코트 안으로 새어들었지만, 코트를 여밀 새도 없이 달렸다.

샤워기 물을 맞은 머리카락과 블라우스가 찬 겨울바람에 딱딱하게 굳었다.

이가 달달 떨릴 정도로 추웠지만, 선아는 멈추어 설 수가 없었다. 재혁이 따라올 것만 같아서였다.

보도블록을 디딜 때마다 얼음장같이 차가워진 발에서 통증이 일었다. 그녀는 맨발로 달리고 또 달렸다.

이전 삶에서는 재혁과 잠자리를 했었지만, 그를 사랑할 때였다.

현재는 마음의 준비도 되지 않은 상황이었고, 가뜩이나 그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증오하고 있었다.

아파트 화단을 달려 놀이터를 지나쳤다. 한시라도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정문을 나가 대로변에서 택시를 잡아탈 생각으로 계속 달리던 중, 발에서 따끔한 통증이 일었다.

“아앗!”

멈추어 선 선아는 자신의 맨발을 내려다보았다.

“으윽…….”

발바닥을 뒤집자 발 가운데 큼지막한 유리 조각 하나가 박혀 있었다.

“아우, 진짜…….”

발에 박힌 유리를 어찌해야 하나 생각할 때, 가방 속에 있는 핸드폰에서 진동이 일기 시작했다. 재혁이 전화를 하는 모양이었다.

전화를 받아서 욕이라도 해주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너무 추워서 입까지 얼어붙었다.

선아는 발에 박힌 유리를 빼내지도 못하고 한쪽 발을 까치발처럼 세운 채 정문으로 향해갔다.

발에 박힌 유리 때문에 속도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혹시라도 재혁이 뒤따라올까 봐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그놈은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끌고 욕실로 들어가는 형편없는 놈이었기에 더한 짓도 할 수 있는 놈이었다.

힘겹게 정문까지 간 선아는 택시를 잡아탔다.

“응급실이 있는 인근 병원으로 가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시간이 늦어서 대학병원 응급실로 모실게요.”

선아는 택시 안에서 멀어지는 아파트를 바라보았다. 택시 뒷좌석에 앉고 나서야 안도감이 몰려왔다.

발가벗은 채로 달려들다니…….

재혁이 사람 같지 않은 놈인 건 알고 있었지만, 직접 겪어보니 생각보다도 더 쓰레기였다.

그런 놈과 앞으로 잠자리를 해야 한다니……. 자신의 앞날이 끔찍한 너머지 눈물이 핑 돌았다.

***

응급실에서 진료를 마친 선아는 대학병원 지하의 편의점으로 내려갔다.

계속 맨발로 다닐 수 없으니 급한 대로 슬리퍼 같은 거라도 사 신어야 할 듯했다.

편의시설이 몰려 있는 지하에는 편의점을 비롯해 의료보장구 판매점, 구내식당과 같은 시설이 몰려 있었다.

편의점으로 들어간 선아는 삼선 슬리퍼를 집어 들었다. 응급실에서 빌린 슬리퍼를 반납하기 위해서라도 새로 하나를 사야 했다.

“5,500원입니다.”

돈을 결제하고 나서야 슬리퍼를 신었다. 슬리퍼를 신고 걸을 때마다 다친 발에서 따끔한 통증이 일었다.

젖은 옷과 머리도, 정장 차림에 받쳐 신은 슬리퍼도, 기분까지도 모두 엉망이었다.

병원 로비로 올라온 선아는 응급실에 슬리퍼를 반납하고 출입문을 향해 발걸음을 서둘렀다. 어서 집에 가려고 발을 뗄 때, 그녀의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윤선아.”

선아가 돌아섰다.

“너…….”

그녀의 모습을 본 도진은 당황한 얼굴로 달려왔다.

“너 꼴이 왜 이래?”

“…….”

“이 날씨에 왜 이렇게 젖었는데?”

응급실에서 상처 드레싱을 받는 동안에도 머리카락과 블라우스는 마르지 않았다.

도진의 선아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를 훑어보았다. 그의 시선이 슬리퍼 신은 발에서 멈추었다.

“신발은 어디에 두고…….”

그는 말문이 막힌 듯 뒷말을 잇지 못했다.

“선배가 병원에 무슨 일이야?”

“너야말로 이 시간에 왜 여기 있는데? 왜 이런 모습을 하고 있고?”

“내가 먼저 물었잖아.”

재혁과의 일을 설명하고 싶지 않아서 한 말이었다.

도진은 미간을 찌푸린 채로 대답했다.

“아버지 만나러 잠깐 왔어.”

“아…….”

“집에 가려는 거지? 내가 데려다줄게. 아니다. 우리 집에 들러서 머리부터 말리고 가. 그 꼴로 가면 사장님 걱정하시겠다.”

선아는 자신의 모습을 훑어보았다. 그제야 제 몰골이 엄마에게 보일 만한 몰골이 아님을 깨달았다.

뇌동맥류를 앓고 있는 엄마는 스트레스나 충격을 조심해야 했다.

도진의 말대로 하는 게 나을 듯하다고 판단한 선아는 순순히 도진의 뒤를 따랐다.

***

“발은 왜 그래?”

도진의 집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질문이 따라왔다.

“다친 거 맞지? 발 제대로 못 딛던데.”

“응. 맨발로 걷다가 유리를 밟았어.”

“그러니까 왜 맨발로 걸었는데? 구두는 어쩌고?”

“굽이 부러졌어.”

“굽이 쉽게 부러지는 게 아닐 텐데. 선아야. 난 지금 네 모습이 납득이 잘 안 된다.”

무슨 일인지 좀 더 설명해보란 뜻이었지만 선아는 고집스럽게 입술을 닫았다.

도진은 한숨을 쉰 채 보일러 컨트롤러 앞으로 다가갔다.

그는 집 안 온도를 최대로 높이고, 수건을 꺼내 선아에게 건넸다.

“설마 이재혁이 이런 건 아니지?”

선아가 코트를 벗다 말고 멈추자, 도진의 시선이 선아의 블라우스에 닿았다. 그의 얼굴이 더욱 험악하게 구겨졌다.

하얀 블라우스는 물에 젖어 속을 비추었고, 재혁의 손에 버클이 풀린 브래지어는 가슴과 블라우스 사이에서 덜렁거리고 있었다.

그제야 자신의 꼴을 인지한 선아는 수건으로 블라우스 앞섶을 가렸다. 동시에 도진도 고갤 돌렸다.

도진은 선아를 바라보지 않은 채 무릎담요를 들어 그녀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고갤 돌린 도진의 옆얼굴이 그답지 않게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귀뿐 아니라 목까지도 온통 새빨갰다.

“갈아입을 옷 가져올 테니까 젖은 옷 벗어줘. 건조기 돌려줄게.”

선아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고맙게도 도진은 그 이상의 질문을 해오지 않았다.

도진에게 홈웨어를 건네받은 선아는 문이 열려 있는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도진과의 키 차이가 30cm 가까이 되기에 그의 티셔츠는 원피스처럼 선아의 허벅다리 위로 내려왔다.

반바지 또한 아이가 어른 옷을 빌려 입은 것처럼 무릎 아래에 닿았다.

젖은 옷을 들고 거실로 나간 선아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건조기로 향해갔다.

“건조기 저쪽에 있지?”

젖은 옷과 머리만 말리고 어서 집으로 가고 싶었다.

건조기를 작동시키고 돌아서자 도진이 그녀 가까이 다가와 눈을 마주 보았다.

그는 마치 화를 참고 있기라도 한 듯이 이를 악물고 있었다.

“그 새끼 짓-”

“있잖아, 선배-”

두 사람이 동시에 말을 뱉었다.

도진의 얼굴은 여전히 화난 얼굴이었지만 선아의 말을 받아주었다.

“……응.”

“내가 옷 갈아입은 방이 선배 작업 방이야?”

“응.”

프로그램 개발을 전공하지 않았어도 도진은 그 분야에 천부적인 재능을 지니고 있었고, 이전 삶에서도 빅터뿐만 아니라 HS 엔터테인먼트의 ERP 프로그램 등을 개발했었다.

선아는 옷을 갈아입은 방에서 본 것에 관해 물었다.

“지금 만드는 프로그램은 뭐야? 좀 특이한 걸 하던데.”

커다란 듀얼 모니터 속에는 사람의 얼굴이 떠 있었다.

처음엔 사진인 줄 알았지만, 자세히 보니 사진이 아닌 그래픽이었다.

현재의 기술이라고 하기에는 믿기 어려울 만큼 사람의 실물과 그래픽이 모니터를 가득 채우고 있었고, 그 옆으로는 얼굴 모양을 조절하는 설정 프로그램이 떠 있었다.

“커스터마이징 프로그램이야.”

“커스터마이징?”

“응. 전에 대학 때 프로그래밍 동아리에서 만난 성수 기억나?”

“아, 응. 컴공과 성수 선배.”

마케팅 동아리와 프로그래밍 동아리가 협업을 했었기에 선아도 프로그래밍 동아리 부원들을 몇 명 알고 있었다.

전성수는 도진과 같은 해에 대학에 입학했고, 졸업해서는 강남의 게임회사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성수가 이번에 MMORPG 개발하는데, 게임 커스터마이징 프로그램에 대한 조언을 해왔어. 겸사겸사 작업해본 거야.”

“게임이라고 하기에 인물이 실사에 가깝던데.”

“응. 그래서 실패작이야. 게임으로 이미지를 구현하기엔 퀄리티가 높아서.”

게임의 경우는 실사풍 캐릭터를 만든다고 하더라도 선남선녀를 선호하는데, 도진의 프로그램은 실제 존재하는 사람들처럼 얼굴의 장단이 극명하게 드러났다.

“그렇지만 버리기엔 아까운 프로그램 같아.”

“완성되면 경찰청 쪽에 기부를 할까 생각 중이야.”

“경찰청에?”

“지금까지는 범죄자의 몽타주를 만들 때 수사관이 참고인 조사를 통해 특징을 잡아내 직접 작업하는 방식이었거든. 그렇다 보니 수사관의 경험이나 실력이 중요한데, 프로그래밍 된다면 피해자가 직접 범죄자의 얼굴을 구성할 수도 있고-”

“저기 선배.”

선아가 도진의 말을 끊었다.

“나 그 프로그램 좀 써보면 안 될까?”

사실 선아가 그 프로그램을 물어본 이유는 프로그램을 보자마자 떠오른 이가 있어서였다.

세빈이였다. 이쪽 세상에서 눈을 뜬 후, 아이에 대한 기억이 흐릿해져 가고 있었다.

아이와 함께했던 기억은 또렷하지만, 전처럼 아이의 얼굴이나 목소리가 선명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사진이라도 한 장 있으면 좋을 텐데, 이 세상에서는 세빈이의 사진 한 장조차 구할 수가 없다.

“내가 너무 보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내가 그 프로그램을 써보고 싶은데…….”

“…….”

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혹시나 개발 중인 프로그램을 조작한다는 것이 실례가 된 걸까. 선아가 도진의 눈치를 살필 때였다.

성큼성큼 도진이 선아의 앞으로 다가와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

그의 손은 선아의 머리를 덮은 수건에 닿았다.

“집이 추워서 신경 쓰인다.”

선아의 바로 앞까지 온 도진은 그녀의 머리카락 위에 쓰인 수건은 벅벅 문질렀다.

“머리부터 말리고 나서 해.”

“아, 응.”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고, 재혁과의 일이 있었던 직후라 도진이 제게 다가올 때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도진은 내내 신경 쓰였다는 듯 선아의 물기를 직접 털어주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서늘한 듯한 집 안 공기가 금세 데워진 듯이 열이 올랐다.

“저, 저기……. 내가 할게, 선배.”

엄마에게조차도 이런 식의 챙김을 받은 적 없는 선아는 얼굴이 붉어진 채 어쩌질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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