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젖은 몸
신혼집 아파트에 들어선 선아는 아파트 앞 슈퍼에서 사 온 커다란 종량제 봉투를 펼치고 재혁이 쓰던 이불이며 베개를 종량제 봉투에 집어넣었다.
“그거 원룸 입주하면서 산 건데 버리게?”
“응. 어차피 솜이불 얼마 안 하잖아. 새집 들어왔으니까 새 이불에서 자.”
말은 그렇게 했지만, 재혁을 탈탈 털어버릴 생각에서였다.
이부자리를 버리면 그가 가져온 짐들이라곤 캐리어 두 개가 전부다.
나중에 재혁을 쫓아낼 땐 그 캐리어 두 개에 짐을 꾹꾹 눌러 담아 밖으로 집어 던질 생각이었다.
집 보증금까지 차 할부금에 털어버렸으니 그때 가서 재혁은 알거지나 다름없게 될 것이다.
그를 내쫓을 생각을 하니 속에서 희열이 올라왔다.
선아는 침실로 가 새로 산 이불을 침대에 깔았다.
“그거 그냥 써도 되는 거야? 한 번 빨아서 써야 하는 거 아니야?”
“바로 쓸 수 있게끔 나온 거야. 그러려고 백화점에서 비싼 값 주고 이불 사는 거지.”
물론 거짓말이었다. 어차피 자신이 누워 잘 게 아니었기에 빨래도 하지 않고 이불을 깔았다.
“진짜?”
재혁이 미심쩍다는 듯 눈을 뜨자 선아는 되레 큰소리를 쳤다.
“아무렴 남편 될 사람이 쓸 물건으로 장난치려고. 나한테 재혁 씨가 어떤 사람인데. 이제 내 가족은 재혁 씨잖아. 내가 재혁 씰 얼마나 아끼는데. 안 그래?”
“그, 그렇지? 그보다 선아야, 오늘 이불도 새로 사 왔는데, 자고 가. 네가 쓸 침대랑 이불이니까 폭신한지 한번 누워보고.”
선아는 은근슬쩍 붙어오는 재혁을 피해 거실로 나왔다.
어쩐지 침대와 자신을 번갈아 바라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다 싶더니 본색을 드러낸 것이다.
“엄마가 집에서 기다려. 오늘 외박 허락도 안 받았는데 무단으로 그러면 걱정할 거야.”
“네가 애도 아니고, 곧 결혼도 하는데, 예비 부부끼리 시간을 보내는 게 뭐가 어때서.”
재혁은 물러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와의 논쟁이 굳이 시간을 빼고 싶지 않았다.
도망치듯 집을 떠나려는데, 재혁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챘다.
“재혁 씨?”
자신의 허리 뒤까지 선아의 손을 쭉 잡아당긴 그는 선아의 허리에 손을 감았다.
“왜 이래?”
그는 선아의 허리를 죌 듯이 감싸 안고는 그녀의 입술을 향해 얼굴을 내렸다.
얼굴과 얼굴 사이의 거리는 불과 10cm.
떨고 있는 선아의 눈동자를 바라보면서 재혁이 눈을 감았다.
“!”
코끝이 닿았다. 그의 숨 냄새가 느껴졌다.
거기서 고개를 돌려야 했지만, 지금껏 무수히 달라진 태도를 보였기에 이마저도 거부하면 의심을 살 것만 같았다.
선아는 어쩔 수 없이 눈을 감았다. 입술 위에 그의 입술이 닿았다.
재혁은 외모 관리에 신경 쓰는 남자였고, 습도라곤 찾아볼 수 없는 건조한 겨울이었지만, 나름대로 립밤을 바르면서 관리한 그의 입술은 촉촉했다.
그래서 더욱 거북했다. 도마뱀이나 뱀 같은 파충류에게 입술을 물리는 듯했다.
그가 입술을 깨물거나 벌리지 않았는데도 그저 닿은 것만으로도 불쾌감에 치가 떨렸다.
그는 선아의 입술 위에서 자신의 입술을 문지르며 틈이 벌어지길 기다렸다.
이미 두 사람 사이엔 무수히 많은 입맞춤이 존재했다.
당연히 타액을 나누는 딥키스 또한 존재했고, 선아도 키스에 있어서만큼은 무지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선아는 고집스럽게 입술을 다문 채로 그의 혀를 방어했다. 그러자 재혁이 피식 웃었다.
가소롭다는 웃음 다음에 따라온 건 끔찍한 그의 손길이었다.
그는 선아의 바지 정장 허리춤에 들어간 블라우스를 빼내고 등 뒤로 손을 넣었다.
툭. 순식간에 브래지어가 풀어졌다.
“!”
자신도 브래지어를 풀 때면 양손을 사용해 끙끙거리는데, 그는 너무도 쉽게 여자의 속옷을 풀었다.
그만큼 재혁은 이런 스킨십에 익숙하고 능숙한 남자였다.
그가 선아의 맨살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척추뼈를 타고 올라오는 손길에 선아는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으…….”
너무 싫어서 나온 소리였다.
선아의 입술 사이가 벌어지자 재혁은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입술 틈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
선아는 있는 힘껏 재혁을 밀쳐냈다.
“뭐, 뭐 하는 거야?”
토악질이 나올 것만 같아서 양손으로 입을 가렸다.
스킨십을 하다 말고 뒤로 떠밀린 재혁은 놀란 표정으로 선아를 보다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씻고…….”
선아는 간신히 그 한마디를 짜냈다.
“뭐?”
“씻고……. 씻고 하자. 재혁 씨 안 씻었잖아.”
선아는 자신의 입술을 벅벅 닦으면서 힘겹게 말했다.
입술에 묻은 그의 타액을 참으려고 했지만, 벌레가 붙은 듯 불쾌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일단 씻고 나와.”
재혁은 그 말을 조건부 허락으로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그는 얼굴에 화색을 띤 채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알았어. 잠깐만 기다려. 금방 씻고 나올게. 깨끗이 벅벅 닦고 나올게.”
그는 곧장 뒤 돌아 욕실로 달려갔다.
선아는 욕실에 들어서는 그를 보면서 아파트까지 따라온 걸 후회했다.
아파트에 오면 그가 잠자리를 요구할 거라는 걸 빤히 알았지만, 싫다고 거절하면 된다고 안일하게 생각했다.
어차피 자신에게 강압적으로 하지 못할 테니 괜찮겠다고 생각했지만, 오산이었다.
그와 입맞춤한 곳이 오물이라도 닿은 듯이 더럽게 느껴졌다.
손등으로 계속해 문질러 닦아도 그 더러운 느낌이 사라지지 않았다.
‘미친 자식.’
그렇지만 이런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이 집에 온 것은 확인할 게 있어서였다.
선아는 수직으로 고개를 들어 천장에 붙은 화재경보기를 바라보았다. 사실 그 안에 초소형 카메라를 설치해두었다.
몰래카메라는 불법이지만, 엄연히 이곳은 선아의 집이었고, 자기 집에 ‘방범’을 목적으로 카메라를 단 게 문제가 될 리 없다.
만약 문제 되는 게 있다면 저 카메라 앞에서 할 연놈들의 헛짓거리가 문제지, 건전하고 제대로 된 마인드를 갖고 올바른 행동을 한다면 그 무엇도 문제가 아닐 것이다.
욕실에서 물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선아는 등 뒤로 손을 뻗어 브래지어 훅을 연결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 순간, 달칵 소리와 함께 욕실 문이 열렸다.
등 뒤로 손을 뻗어 브래지어 훅을 연결하려던 선아는 그 자세 그대로 어정쩡하게 굳은 채 욕실 쪽을 바라보았다.
욕실에서 재혁이 걸어 나왔다. 샤워를 하다 말고 달려 나온 듯 그는 물에 젖은 나신이었다.
선아는 헉 소리를 내며 고갤 돌렸다.
재혁의 나신은 지나치게 선정적이고 흉했다. 특히나 검은 수풀 아래 달랑거리는 것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아, 미친놈이 진짜…….’
선아는 황급히 브래지어 훅을 연결하려고 했지만 당황해 손이 자꾸만 미끄러졌다.
“벗을 걸 뭐 하러 입어?”
이 새끼야. 나는 너랑 그럴 마음 없거든?
“어차피 벗을 거잖아.”
선아는 사색이 된 얼굴로 뒷걸음질 쳤다.
“재혁 씨, 물 떨어져. 빨리 욕실로 들어가. 원목 바닥에 물 떨어지면 바닥 부풀어 오르는 거 몰라?”
재혁을 욕실에 다시 들여보낼 생각으로 한 말이었지만, 그는 태연한 얼굴로 어깨만 으쓱거렸다.
“물기는 이따 닦으면 돼. 게다가 물 몇 방울 떨어진 거로는 바닥 안 상해.”
“상해. 상한다고! 빨리 욕실로 안 들어가?”
그러는 사이에도 재혁은 선아의 가까이 다가서고 있었다.
“부끄러워서 그러는 거야?”
이 미친놈이 진짜.
“부끄러워할 필요 없어. 어차피 우리 부부 될 거잖아.”
“이런 식으로 첫날밤에 대한 환상 같은 거 깨지 말고-”
그 순간 물젖은 손이 선아의 손목에 닿았다.
“같이 씻자.”
재혁은 막무가내로 선아를 욕실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선아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의 손을 털어내 보려 애썼다.
“왜 이래. 이거 놔, 재혁 씨.”
재혁은 선아를 꽉 잡은 채 욕실 문을 열었다.
“어차피 우리 할 거니까 같이 씻고.”
선아가 계속 거부에 재혁이 계획을 바꾼 것이다. 한 번 하고 나면 선아는 빼도 박도 못하고 자신의 소유가 될 터였다.
같잖게 여자 하나에게 목을 매느니 차라리 억지로라도 취하면 된다.
요즘 남녀 사이에 혼전 관계가 흠은 아니니 결국은 선아도 이해할 것이다.
아니 자신의 스킬이 뛰어나기에 결국은 선아도 다른 여자들처럼 자신을 원하고 갈구하게 될 것이다.
재혁은 샤워부스 안에 선아를 집어넣고 물을 틀었다.
안 하겠다고 버티지만, 흠뻑 적셔서 옷을 벗겨 내면 그만이었다.
샤워기에서 뿜어져 나온 물이 선아의 머리 위로 쏟아진 그 순간이었다.
“왜, 왜 이래!”
선아는 젖 먹던 힘까지를 짜내 힘껏 재혁을 밀쳤다.
“내가 이러지 말라고 했지!”
“어어억! 으앗!”
무방비한 상태의 재혁은 화장실 타일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어어억! 꼬, 꼬리뼈!”
그는 그 상태로 자신의 엉덩이를 쥔 채 뒹굴었다.
벌거벗은 채 엉덩이를 쥐고 뒹구는 모습이 가관이라 사진이라도 남기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선아는 그가 또 달려들까 봐 두려운 나머지 부리나케 욕실을 빠져나왔다.
잠깐 물을 맞은 것이지만 샤워기 물살이 선아를 흠뻑 적셨다.
하얀 블라우스 안에 살구색 브래지어가 비쳤고, 브래지어 훅을 여미지 못해 가슴이 덜렁거렸다.
그렇지만 물기를 닦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선아는 곧장 거실에 둔 코트를 집었다. 코트에 대충 팔만 끼우고 가방을 든 채 도망치듯이 집을 빠져나왔다.
황급히 복도로 나온 선아는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엘리베이터를 누르는 손이 달달 떨렸다.
1층에서부터 올라오는 엘리베이터의 속도가 더디게 느껴져 엘리베이터 앞을 지키고 있을 수가 없었다.
선아는 결국 비상계단으로 달려 나갔다. 정신없이 계단을 딛는 그 순간이었다.
“아악!”
계단에 발이 미끄러졌다. 휘청거리던 선아는 난간을 붙잡았다.
간신히 넘어지는 걸 면했지만, 발밑에서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구둣발을 내려다본 선아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구두 굽이 부러졌다.
“미쳐 정말…….”
굽이 부러진 구두를 신었다가는 기동성이 떨어질 테니 구두를 벗어 가방 안에 대충 쑤셔 넣었다.
한 층 내려와 복도로 나가니 그사이 엘리베이터가 선아가 있는 층 가까이 올라와 있었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자 그녀가 있는 층에서 엘리베이터가 멈추었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선아는 놀란 가슴을 쓸었다.
“아오, 미친 변태 새끼. 머릿속에 든 게 그것밖에 없나…….”
그러나 안심한 것이 무색하게 엘리베이터는 20층에서 21층으로 향했다.
“아…….”
그러고 보니 신혼집이 있는 21층에서 엘리베이터 무심코 버튼을 눌러 놓았다.
“미친…….”
-문이 열립니다.
안내음과 함께 21층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때마침 재혁이 옷을 챙겨 입은 채 복도로 나오고 있었다.
“!”
다음 순간, 현관문 앞에 선 재혁과 엘리베이터 안에 탄 선아의 시선이 부딪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