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고드는 밤-34화 (34/85)

34화. 미끼

오늘부터 재혁은 신혼집에서 살림을 시작한다.

‘재혁 씨 지금 사는 원룸 공실 생기면 바로 계약되는 곳 같던데, 급한 대로 거기 보증금이라도 빼서 급한 불부터 끄고 대충 살 만큼은 살림 채워놨으니까 미리 아파트 가서 지내고 있어.’

선아의 말대로 원래 살던 원룸을 내놨더니 곧바로 세입자가 구해졌다. 대로변에 있는 원룸이기도 했고, 원래도 단기 계약 위주의 원룸이니 당연했다.

주말에 짐을 빼서 신혼집에 옮겨두었고,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신혼집에서 생활을 시작할 예정이었다.

어쩐지 지금껏 선아가 이야기했던 것보다 인테리어가 덜 된 느낌이었지만, 신혼집은 지금껏 그가 살던 어떤 집보다도 크고 호화로웠다.

누구보다도 신혼살림을 고대한 게 선아였으니 좋은 말로 살살 구슬려서 그녀를 신혼집으로 데려갈 생각이었다.

일단은 함께 있게 된 뒤에 분위기를 잡아 애정행각을 유도할 것이다. 그게 재혁의 특기였고 연애 방식이었다.

잠자리라면 자신이 있었다. 선아가 경험이 없긴 했지만, 자신이 잘 구슬려서 몇 번 하다 보면 다른 여자들처럼 자신에게 목을 매게 될지도 모른다.

그날 온종일 재혁은 퇴근 시간만을 기다렸다.

원래대로라면 인트라넷을 통해 선아에게 쪽지를 보내 약속을 잡았겠지만, 회사에선 그러지 말잔 말 이후로 재혁은 선아에게 쪽지를 보내지 않았다.

전과 다르게 선아의 눈치를 보게 된 것이다.

어느덧 해 질 녘이 되었다. 사무실 직원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떴다.

재혁은 선아가 자리에서 일어나길 기다렸지만, 그녀는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다가 타이핑하는 걸 반복할 뿐이었다.

30분을 더 기다리던 재혁은 인내심에 한계를 느끼고 선아의 책상으로 다가갔다.

똑똑, 책상 끝을 두드리자 선아가 화들짝 놀라며 작성하던 문서창을 닫았다.

“뭘 그렇게 놀라, 퇴근 안 해?”

“아, 벌써 퇴근 시간이야?”

“퇴근 시간 되고도 30분이나 지났어.”

“아……. 언제 시간이 이렇게 됐지.”

선아는 팀장석을 힐끔 보았다. 때마침 도진도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챙겨 들고 있었다.

“왜? 아직도 업무 남은 거야?”

재혁의 채근에 선아는 고갤 가로 저었다. 도진이 퇴근한다는 건 선아의 업무도 끝났단 이야기였다.

선아도 뒤늦게 컴퓨터를 끄는 순간, 사무실을 나서는 도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월요일에 봅시다.”

재혁은 그를 향해 허릴 숙여 인사했고, 선아는 멀어지는 도진의 모습을 보다가 남은 짐을 꾸렸다.

“팀장을 왜 그렇게 신경 써?”

재혁의 질문에 선아는 가방 속에 태블릿을 넣다 말고 멈추어 섰다.

“같이 일하니까 당연히 신경 쓰이지.”

“원래 그렇게까지 팀장 신경-”

“재혁 씨, 여기 회사야. 엄연히 직급 차가 존재하는데, 존칭 써야지.”

재혁은 선아의 지적이 못마땅하긴 했지만, 그 지적에 딱히 할 말이 없었던 터라 입을 다물었다.

“그래, 뭐…….”

재혁이 입을 다문 뒤에야 선아는 다시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핸드백 안에 짐을 챙긴 선아는 책상 의자에 걸어두었던 코트를 입었다. 트렌치코트 형식으로 나온 모직 코트의 허리끈을 여미자마자 재혁은 기다렸다는 듯 선아의 손을 낚아챘다.

“나 오늘부터 신혼집에서 지내.”

“어제부터 아니야? 어제 짐 옮겼다면서.”

“어젠 짐만 옮겨두고 잠만 잔 거지. 오늘부터 짐 풀고 거기서 지낼 거야.”

“그렇구나.”

“무슨 대답이 그래. 우리가 쓸 신혼집인데, 너도 한 번은 와봐야지.”

“나도?”

“당연히 너도 와서 봐야지.”

선아는 재혁의 말속에 숨은 속뜻을 알아챘다.

이미 전부터 몇 번 혼전 관계를 하자 언급을 해왔던 남자였으니 분명 그의 말은 잠자리를 뜻하는 것일 테다.

전이라면 몰랐을 테지만 그는 발정 난 짐승과 같은 남자였기에 집으로 오란 말의 진의는 뻔했다.

선아는 슬그머니 말을 돌렸다.

“그보다 재혁 씨. 살림살이는 장만했어?”

“살림살이?”

“이불이랑 베개 같은 거 말이야. 주방 집기에 신혼살림 채울 때까지 원룸에서 쓰던 거 쓴다 쳐도 원룸에서 쓰던 이불은 침대에 비해 너무 작잖아.”

재혁의 원룸에 있던 침대는 슈퍼싱글 사이즈의 침대였고, 신혼집에 대충 골라 채워놓은 침대는 킹 사이즈 침대였다.

어차피 막돼먹은 연놈들이 구를 침대라 버릴 예정이긴 하지만, 신혼집을 위해 가구를 채워놓은 것처럼 보이도록 큰 사이즈의 침대를 넣었다.

“이불이 작긴 하더라.”

“그럼 오늘 나랑 이불 사러 가자. 재혁 씨가 가져온 베개도 하나뿐일 거잖아.”

사실 베개는 두 개였다.

희진이 재혁의 집에 왔다 갔다 하고 있어서 하날 더 사두었고 그것도 신혼집에 가져왔다.

그렇지만 재혁은 굳이 베개가 두 개란 말을 하지 않았다.

베개를 더 산다는 건 신혼집에 와서 자고 가겠단 말로 이해한 재혁은 살림살이를 사러 가잔 말에 세차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

“이 이불 좀 보세요.”

백화점에서 침구를 판매하는 점원은 선아를 향해 양모 이불을 내보이곤 만져 보라는 듯 이불을 툭툭 두드렸다.

한 채에 200만 원이나 하는 값비싼 호주산 양모 이불이었다.

“요즘 신혼침구로는 양모 이불이 대세예요. 모질 사이에 공기층이 있어서 포근하고, 덮으면 느낌이 정말로 좋아요.”

선아는 판매 점원을 따라 양모 이불을 손으로 매만졌다. 가볍고 따스한 느낌에 세빈이와 잠들던 때가 절로 떠올랐다.

이 이불은 이전 삶에서 신혼살림으로 산 이불이었다.

매해 봄이면 양모 이불을 드라이클리닝 해서 장롱 속에 넣어두고 날이 추워지면 꺼내 세빈이의 잠자리를 마련했다.

판매 점원의 말에 이끌려 산 비싼 이불이었지만 본전 생각이 나지 않을 만큼 매해 잘 썼다.

선아의 옆에서 양모 이불을 만져 본 재혁은 신이 난 듯이 말했다.

“선아야. 이 이불 진짜 포근하다.”

선아는 재혁을 향해 고갤 저었다.

자신이 쓸 살림살이를 장만한다면 폭신한 느낌의 양모 이불을 사겠지만, 재혁을 위해서 굳이 이렇게 비싼 이불을 살 생각은 없었다.

“양모 이불 자주 빨기도 힘들고, 빨래하면 할수록 모질이 상해서 드라이클리닝 맡겨야 해. 귀찮으니까 차라리 솜 들어간 차렵이불 사서 자주 바꾸자. 저기요. 여기 차렵이불도 있죠?”

차렵이불이란 말에 점원의 표정이 심드렁해졌다. 침구 브랜드의 차렵이불도 값이 꽤 나갔지만, 양모 이불에 비하면 헐값이기 때문이다.

“차렵이불은 이쪽에서 보시면 돼요.”

점원은 이불을 켜켜이 쌓아둔 차렵이불 매대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단독으로 디스플레이 된 양모 이불과 달리, 솜으로 만든 차렵이불은 여러 채를 쌓아 전시해두었다.

양모 이불의 경우는 이불을 사서 커버를 씌워서 써야 했지만, 솜 패드에 겉감을 대고 박음질한 차렵이불의 경우는 이불마다 갖가지 패턴이 그려져 있었다.

선아는 그중에서 가장 난해한 패턴의 이불 두 채를 손으로 가리켰다.

중년 부부의 침실에나 있을 법한 커다란 장미가 그려진 이불과 칙칙한 갈색 체크무늬 이불이었다.

“나는 이게 좋을 거 같은데, 재혁 씨는?”

재혁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고갤 갸웃거리다가 선아를 향해 되물었다.

“이게……?”

“응. 유행은 돌고 도는 거라고 이런 복고풍이 질리지 않고 좋아. 그렇죠?”

판매 점원에게 동의를 구하듯 물어보자 그녀는 냉큼 표정을 바꾸고 선아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럼요. 고객님 안목이 조, 좋으시네요.”

그녀 또한 선아의 난해한 취향이 이해되는 바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고객이 왕이었다.

“요즘 젊은 분들이 특히나 선호하는 이불이에요.”

재혁은 탐탁지 않다는 듯 이불을 바라보았다.

“난 좀 그런데…….”

“왜? 재혁 씨 눈에는 별로야?”

“그게 아니라…….”

“아, 결정하기 어려워서 그렇구나.”

결혼 준비를 할 때면 지금처럼 재혁은 한 발짝 뒤로 빠져서 모든 결정을 유보했다.

드레스도, 식장을 장식할 꽃 디자인도, 신혼집 인테리어도 모두 다 선아가 결정했다,

처음엔 그런 것조차도 배려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지나치게 선아의 눈치를 보느라 자신의 의견조차도 피력하지 않은 것이고, 결정적으로 안목도 없었다.

“실은 나도 이불 두 채 모두 마음에 들어서 결정하기 어려웠거든. 그러면 우리 다른 사람한테도 어떤 게 나은지 물어볼까?”

“누구한테?”

핸드폰을 빼 든 선아는 전화번호 하나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정희진]

핸드폰에 쓰인 이름을 본 재혁은 깜짝 놀라 크게 떴다.

선아가 전화를 거는 다름이 아니라 희진이었다. 이윽고 희진이 전화를 받았다.

“희진아 뭐 해? 아, 집에서 쉬고 있다고?”

선아는 부러 더 밝은 목소리를 내며 희진에게 말을 걸었다.

“마침 잘됐다. 내가 이불 사진 보낼 테니까 뭐가 더 예쁜지 비교 좀 해줘. 재혁 씨랑 신혼집에서 쓸 건데, 결정하기 어려워서 그래.”

전화를 끊은 선아는 이불 두 채가 보이도록 나란히 놓고 사진을 찍었다.

재혁은 떨떠름한 얼굴로 선아에게 물었다.

“물어본단 사람이 희진이었어? 나는 어머님일 줄 알았는데.”

“우리 엄만 살림에 대해 잘 몰라. 예전엔 할머니가 골라주는 것만 썼고 지금은 아빠가 골라주는 것만 쓰거든. 안목은 엄마보다 희진이가 나을 거야.”

“희진이랑 안 친했잖아?”

“그러니까 이제부터라도 친해지려고.”

“친자매도 아닌데 굳이 친하게 지낼 필요가 있어?”

“친자매는 아니어도 부모가 같잖아.”

“…….”

희진이랑 친하게 지내겠단 말에 쩔쩔매는 재혁을 보니 도둑이 제 발 저린 듯이 보여 웃음이 나왔다.

아마 재혁뿐 아니라 희진이도 약이 잔뜩 올라 있을 것이다.

수더분해 보여도 재혁을 향해서는 어마어마한 소유욕을 갖고 있는 게 희진이었다.

그러니 부부간에 기념할 일이 있을 적마다 어떻게든 재혁을 불러내 함께 있으려고 했고, 자신의 사랑을 증명이라도 하듯 강박적으로 사진을 남겼을 것이다.

선아는 희진에게 이불 사진을 전송했다.

사진은 희진을 낚는 미끼였다. 신혼살림을 고르느라 재혁과 다정한 모습을 보이면 희진은 재혁의 마음을 붙잡고자 안달복달할 것이다.

그렇게 희진에게 미끼를 던지고, 두 사람의 허튼 짓거릴 구경하면서 증거를 모으는 게 선아가 할 일이었다.

사진을 전송한 지 30초도 안 돼 답장이 날아왔다.

[나는 갈색 이불이 나은 거 같아.]

답장을 본 선아가 픽 웃었다.

갈색은커녕 똥색에 가까운 이불이었다.

제가 쓸 이불인지도 모르면서 두 개의 디자인 중 최악의 디자인을 고른 것이다.

“나도 갈색 이불이 더 트렌디한 거 같았는데 희진이 생각도 나랑 같네.”

선아는 기쁜 듯 웃으면서 재혁을 바라보았다.

“어쩜 희진이랑 나는 보는 눈까지도 비슷할까? 신기하다, 그치?”

“어? 어…….”

“이렇게나 취향이 비슷한데, 희진이가 재혁 씨한테 별 마음 없는 게 더 신기하다니까? 보는 눈이 비슷해서 남자 취향까지도 비슷할 것 같은데 말이야.”

“…….”

당황한 재혁을 둔 채 선아는 점원에게 갈색 이불을 계산해 달라고 말했다.

그렇게 결국 재혁의 손에 똥색 이불 가방이 쥐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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