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행위
“유투북이 아니라 네이비와 빅데이터 계약을 체결하면 또 모르지.”
네이비라는 말에 선아는 입을 쩍 벌렸다.
네이비가 어떤 회사인가. 몇 해 전 파란 모자를 쓴 연예인을 앞세운 광고를 내보낸 후,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1위의 포털 사이트가 되었다.
인터넷에서 정보를 찾으려는 사람들은 당연하다는 듯 네이비에 접속을 했고, 네이비는 이를 알고 전문가를 유입해, 개인이 궁금해하는 것까지도 전문가의 답을 들을 수 있는 ‘지식 on’이라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네이비 블로그에 일상을 기록하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그 사람들의 기록을 토대로 맛집 탐방 열풍이 불기도 했다.
현재는 포털 사이트에 불과하나 선아가 살던 8년 후에는 바이럴 마케팅의 기본이 되는 곳이 블로그였고, 심지어는 식당이나 제품의 블로그 홍보만을 해주는 업자들도 있었다.
네이비 쇼핑에서는 제품의 가격을 손쉽게 비교할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했고, 스토어라는 창구를 통해 소상공인들이 오프라인 매장 없이도 장사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면서 한국인과 떼려야 뗄 수 없는 IT 기업으로 자리매김한다.
“네이비는 어렵지 않을까? 네이비가 뭐가 아쉬워서…….”
“임직원들이 유투북에는 회의적인 시각을 보내고 있어. 그 사람들 연령대가 일단은 유투북 연령대가 아니고, 외국 사정엔 문외한이니까. 그런 사람들 보기에 가장 구미가 당길 곳이 어디겠어. 바로 네이비 아닐까?”
엄마의 말이 맞았다. 네이비는 외국 포털 사이트가 국내시장을 감히 넘보지 못할 정도로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한국에서 가장 방대한 양의 빅데이터가 생성되고 있는 네이비와 협업을 한다면 국내 마케팅에 있어서 어마어마한 이점을 선점할 수 있을 터였다.
드라마를 기반으로 한 한류의 물살이 있긴 했어도 아직까지 한국의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세계시장으로 뻗어나가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러나 내수만으로도 매출이 상당하기에, 네이비와의 협업이라면 임직원들이 쌍수를 들고 환영할 만했다.
“여하튼 네이비라면 나도 찬성이지만, 그 정도 건수가 아니고서는 임직원들 꼼짝도 안 할 거야. 물론 나도 그렇고.”
네이비라니…….
선아의 손바닥이 또다시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이미 정장 바지에 비벼 닦았음에도 거대한 벽을 맞닥뜨린 듯한 느낌에 손이 절로 축축해졌다.
***
“윤선아 씨 회의합시다.”
도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빅터의 신뢰도 조사 값으로 보고서를 작성하던 미래전략팀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팀장석으로 향했다.
도진은 서류가 든 노란 봉투 하나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회의실로 향해가는 그의 뒷모습엔 군더더기 하나 묻어 있지 않았다.
그런 그와 달리 선아는 아침부터 프린트한 각종 인쇄물과 노트, 펜과 태블릿을 허둥지둥 챙겨 그 뒤를 따라갔다.
도진이 먼저 회의실에 들어섰고, 선아가 그 뒤를 따라 들어섰다.
달칵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회의 테이블 상석에 앉아 있던 도진은 그제야 선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선아는 도진과 마주 보는 자리에 가져온 인쇄물을 펼쳐놓고 노트를 넘겨 빈 페이지를 펼쳐두었다.
“서버실 준비 현황은?”
“20층 입주 기업 이전 준비 시작했습니다.”
20층 오피스에 입주한 회사와 협의가 끝났다.
한때 강남과 역삼동, 삼성동 일대에 IT 기업들이 우후죽순 들어섰으나 정부 시책에 따라 판교 일대에 IT 밸리가 조성되면서 그쪽으로 정부 혜택을 목적으로 이전하는 기업들이 늘어났다.
강남에 있는 HS 빌딩에 입주한 기업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운 좋게도 20층에 입주할 기업이 빠져나가면서 HS 엔터테인먼트 사무실 바로 아래층에 서버실을 구축할 수 있게 되었다.
“음…….”
도진은 고심하는 듯 자신이 가져온 서류를 넘겨보며 턱을 쓸었다. 날렵한 턱선에 시선이 갔다.
미래에 그는 지금보다도 훨씬 부드러운 인상을 하고 있었다.
빅터 프로그램 가동과 유투북 마케팅을 반대하는 이들과 끊임없는 협의와 타협을 거치면서 그는 날카로움을 숨길 줄 아는 이가 되었다.
그러나 현재 20대의 마지막을 보내는 그는 그때의 다듬어진 모습과 다르게 좀 더 공격적이고 날 선 이미지였다.
선아는 마른침을 삼키며 도진의 이야길 기다렸다.
“선아야.”
마침내 도진의 입에서 선아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네.”
“말 편하게 하자. 상의하고 싶은 게 있거든.”
“나랑?”
“응. HS 사옥 바로 아래에 서버실이 위치하면 구동과 관리에 효율이 올라가긴 할 건데……. 과연 이걸로 충분할까?”
“응?”
“병원에서 네가 한 이야기 듣고 생각해봤어.”
선아는 엄마가 건강 검진을 받는 동안 도진에게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지금 스마트폰 보급률이 세계적으로 빠르게 늘고 있잖아. 아직까지 스마트폰 사업을 미국과 북유럽 브랜드, 우리나라 브랜드가 3분할 해서 갖고 있지만, 곧 중국에서도 개발을 시작하고 저가 스마트폰 보급이 시작될 거라고 봐. 통신사에서도 무선 인터넷망이 돈 되는 사업인 걸 깨달았으니 저개발 국가 진출에 박차를 가할 거고. 나는 그게 3년 안에 이루어질 거라고 보거든.’
미래에 대한 정보를 추측인 양 주었을 뿐인데, 도진은 그 정보로 무언갈 또 생각해냈다고 말하고 있었다.
“네 추측대로라면 몇 해 안에 현재의 서버실 설비만으로는 데이터를 감당하지 못해.”
도진의 말대로였다.
8년 후 HS 엔터테인먼트는 11층부터 20층까지를 서버실로 사용한다.
유투북 가입자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면서 HS 엔터테인먼트로 넘어오는 데이터의 양 또한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늘어났다.
그사이 프로그램 업데이트를 마친 빅터의 분석 능력 또한 더욱 정교해져서 원픽의 마케팅뿐 아니라 신인 가수를 키울 때도, 소속 연예인으로 마케팅을 할 때도 유리한 지점을 차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피스 건물의 3분의 1을 서버실로 사용할 수 있었던 건 어디까지나 원픽이 성공하면서였다.
처음엔 한 층이었던 서버실을, 세 개 층으로, 그 이후엔 일곱 개 층으로 늘렸다가 최종으로 열 개 층으로 확장했다.
그럴 때마다 새로 설비를 해야 했기에 설비값이 배로 들어갔고, 효율이 떨어졌다.
만약 지금 서버실을 증축할 수 있다면 훨씬 큰 이점이 생긴다.
“저기, 선배. 그래서 찾아본 게 있는데…….”
선아는 오전 내내 찾아본 자료를 앞으로 내밀었다.
무선 인터넷망 사업의 가능성을 본 세계의 기업들이 개발도상국 무선 인터넷망 사업을 두고 각축전을 벌이기 시작할 거란 기사였다.
엄마의 말대로 네이비와 협업할 수 있다면 단번에 임직원들의 동의를 얻을 수도 있고, 더 많은 투자를 끌어올 수 있겠지만, 현재로서 네이비가 HS 엔터테인먼트와 손잡을 리 없었다.
그들 또한 자신들의 포털 사이트로 인해 생성되는 빅데이터를 분석하는 프로그램이 있을 것이고,아쉬울 게 없을 터였다.
그랬기에 선아는 개발도상국 무선 인터넷망 사업이 늘고 있으니 유투북 빅데이터를 취급할 서버실 규모를 조금이라도 늘려보자고 설득하잔 아이디어를 냈다.
도진은 선아가 내민 자료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자료를 훑는 그의 입꼬리가 살짝 휘었다.
미소를 짓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너는 우리 일이 잘될 거라고 철석같이 믿는 모양이네.”
“응. 선배.”
믿기만 할까. 이미 그 세상을 살아도 보았다.
도진은 자신이 가져온 서류 봉투를 선아의 앞으로 내밀었다.
“이게 뭔데?”
“열어봐.”
선아는 의문스러운 얼굴로 봉투를 열었다.
그리고 봉투 안에 든 문서를 본 그녀는 눈을 크게 떴다.
서류 안에는 네이비로부터 온 공문이 들어 있었다.
[수신 : HS 엔터테인먼트 대표이사
귀사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이렇게 시작하는 공문 안에는 빅터 프로그램 보고서를 인상 깊게 보았다는 구절이 적혀 있었다.
선아는 도진의 말에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공문 내용을 눈으로 훑었다.
네이비에서는 이른 시일 안에 약속을 잡아서 빅터 프로그램에 대해 더 이야길 해보자는 말이 덧붙여 있었다.
“선배……. 이게 대체…….”
선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공문의 제일 하단에 찍힌 네이비 직인을 바라보았다.
도진 선배가 엄마의 머릿속에 들어갔다 나온 걸까.
선아가 네이비와의 협업을 포기하고 다른 방법을 찾고 있을 때, 도진은 이미 네이비와 접선을 마쳤다.
심지어는 빅터 프로그램에 대한 긍정적인 답까지 받아두었다.
잘만 하면 정말로 네이비와도 협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내가 윤선아의 믿음에 보답할 수 있어야 할 텐데.”
고개를 든 선아는 눈을 끔뻑거리며 도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도진은 그녀에게 자신만만한 미소를 돌려주었다.
“믿는다며.”
“…….”
“네 믿음에 어디까지 답할 수 있을지 나도 궁금해졌어.”
이 일이 그저 믿는다는 말 한마디에서 출발한 거라고?
“선배는 정말…….”
도진은 선아를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말대로 내 확신대로 밀고 나가보려고. 자, 그보다 윤선아 씨.”
“네, 네.”
얼떨결에 대답한 선아는 도진의 눈을 바라보았다.
“네이비 담당자와 연락해서 미팅 날짜 최대한 빠르게 잡읍시다.”
도진은 그 마지막 업무 지시를 남겨둔 채 회의실을 떠났다.
또각또각 구둣발 소리에 선아는 홀린 듯 그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왜일까.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심장이 뛰는 이유가 미래에 대한 기대감 때문인지, 아니면 도진의 행보에 압도당해서인지 알 수 없었다.
두근, 두근, 두근. 선아는 도진의 뒷모습을 응시한 채 왼쪽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
***
또각또각 발소리가 들려오자 재혁은 파티션 너머로 고개를 길게 빼고 사무실로 들어서는 도진을 바라보았다.
대체 일이 어떻게 되어가는 건지, 설문조사 이후에 선아는 더욱 바빠졌다.
무언가 더 준비를 하는 듯한데, 도진과 선아는 해당 이슈를 미래전략팀에 공유하지 않았다.
TF팀인 미래전략팀은 업무 프로세스가 정해져 있지 않은 팀이어서 각자 맡은 일 위주로 돌아갔다. 그래서 더 선아의 일이 궁금했다.
원래대로라면 선아는 중요 업무를 재혁과 상담하고 진행했지만, 언제부턴가 그녀는 재혁에게 자신의 이야길 하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재혁은 휴게실로 가는 척하면서 회의실 옆을 지나갔다.
유리로 된 회의실 안에는 선아가 홀로 앉아 제 왼쪽 가슴께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저게 왜 저러고 있어? 가슴이 뛰기라도 한다는 거야? 류도진한테? 미친 거 아니야? 결혼할 남자를 두고!’
넋 나간 선아의 모습에 화가 미친 재혁은 휴게실에 가려던 목적도 잊고 다시 사무실로 들어섰다.
팀장석 앞에 선 도진은 바로 선 채 서류를 읽고 있었다.
정장 재킷을 벗은 도진은 셔츠에 정장 바지 차림이었다. 몸에 잘 맞는 셔츠는 넓은 어깨를 부각했고, 꼿꼿한 자세는 키 큰 그를 더욱 커 보이게 했다.
같은 남자가 보기에도 그는 지나치게 잘났다.
재혁은 자신의 마음속에서 피어나는 감정이 도진에 대한 질투인지, 아니면 선아가 자신에게 가진 것을 나눠주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데서 기인하는 불안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무엇이든 간에 좋은 변화는 아니었다.
왜 이렇게 선아에게 불안감을 느끼는가 생각해보니 서로에게 확신이 들 만한 행위를 하지 않아서였다.
‘그렇다면 오늘 밤…….’
재혁은 음흉한 눈빛으로 선아가 있는 회의실 쪽을 바라보았다.